< 제 13장. 예견된 손님. -03 >
“아니면 기회를 노리거나.”
많은 곳에서 보내온 서신들은 대부분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곤륜파가 기지개를 폈다고 생각은 하지만 예전처럼 패권을 쥘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작은 방파나 가문들은 곤륜파의 그늘 아래로 들어올 생각이 있어 보였지만 중견급들은 그저 협력대상으로만 봤다.
곤륜파가 자신들과 똑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장은 그렇지만 글쎄. 앞으로도 과연 그럴까?”
서일국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만 하더라도 몸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비천단이라는 영단 덕분에 말이다.
그런 만큼 곤륜파의 비상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다.
툭. 툭.
서일국이 두 개의 서신을 따로 뽑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신경 써야 한다고 여기는 두 곳에서 보내온 서신이었다.
“아직 한 곳이 남아 있기는 한데 어찌될지 모르겠군.”
서일국이 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물론 두 곳을 뽑기는 했지만 당장 원하는 자리를 만들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부탁한다고 반드시 들어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막말로 두 곳 다 청하상단이 힘들었을 때 지켜만 봤던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대해서 별말씀이 없으시네. 장문인 성격상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데.”
까칠하고 퉁명스러우며 뒤끝이 있는 벽우진이 중원의 명문정파들이 저지른 일을 잊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순수하고 순진한 인물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잠잠한 것 같아 서일국은 의문이 들었다.
“때를 기다리시는 건가.”
서일국이 턱을 쓰다듬었다.
현재로서는 이게 가장 답에 가깝지 않나 싶어서였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의 계획이 떠올랐다.
청하상단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만큼 그가 도울 수 있는 일들 역시 많아져서였다.
“최소한 받은 것만큼은 해야지.”
벽우진은 괜찮다고, 신의를 지킨 대가라고 하며 가만히 받기만 하라고 했지만 서일국은 그럴 수 없었다.
신의를 지킨 것에 비해 너무나 과분한 보답을 받아서였다.
그렇기에 서일국은 어떻게든 그 은혜를 갚고 싶었다.
“일단은 영향력부터.”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한 서일국이 눈을 빛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노선을 대략적이나마 잡은 것이다.
이윽고 그의 손이 먹물에 충분히 적셔져 있던 붓을 잡았다.
보는 순간 장엄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곤륜산의 모습에 당필교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천성을 벗어난 적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집 안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나름 영산이라 불리는 청성산과 아미산도 가봤던 당필교였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곤륜산은 그 두 곳보다도 훨씬 더 크고 웅장했다.
딱 보는 순간 영험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입 찢어지겠다.”
“중원 도가무학의 발상지라는 말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형님.”
“확실히 크긴 크지. 청성산이랑 아미산도 큰 편이지만 곤륜산은 진짜 어마어마하니까.”
당민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어린 시절 처음 곤륜산을 봤을 때 당필교와 같은 반응을 보였었다.
작은 자신과 달리 곤륜산은 정말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직도 신비로운 곳이 많다는 소문도 있었다.
“공기도 살짝 다른 거 같은데.”
“나도 그런 거 같아.”
“구경은 그쯤하고 올라가자. 부지런히 올라가야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거야.”
“알겠습니다.”
손주들이자 당소윤의 오라비가 되는 두 형제에게 당민호가 말했다.
서서히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는 해를 보니 조금은 서둘러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렇기에 당민호는 당소윤과 함께 앞장서서 곤륜산을 올랐다.
“응?”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곤륜파의 산문을 지나 외원에 도착한 당민호가 눈을 껌뻑였다.
안쪽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기도들이 느껴져서였다.
딱히 드러내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느껴지는 깊고 거대한 기도에 당민호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모르게 용담호혈에 들어온 느낌이 들어서였다.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지난번과는 너무나 달라진 거 같구나.”
“예? 제가 보기에는 똑같은데요?”
옆에 서 있던 당소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떠나기 전과 똑같아서였다.
하지만 당민호의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 이유가 있는 듯했다.
“예상보다 일찍 왔는데?”
저벅저벅.
당민호가 살짝 굳은 얼굴로 두리번거릴 때 하나의 기척이 그에게 다가왔다.
바로 이곳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벽우진이었다.
헤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뒷짐을 진 채로 느긋하게 걸어오는 벽우진의 모습에 당민호는 실소가 절로 나왔다.
“말했잖아. 이렇게 될 거라고.”
“진즉에 받아들였으면 좀 좋아?”
“그건 어쩔 수 없지. 가주라는 직위는 결정을 신중하게 해야 하니까.”
“일단 따라 와.”
벽우진이 할 말만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당민호를 위시로 당가의 혈족들이 따라 이동했다.
물론 몇몇은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젊다고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젊어 보일 줄은 몰라서였다.
-진짜 할아버지하고 친구사이라고?
-응.
-저 얼굴에?
-불가능할 것도 없잖아? 나도 환골탈태를 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당소윤의 말에 맏이이자 사천당가의 소가주인 당주혁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환골탈태를 했다고 해도 너무 젊어 보여서였다.
-의심하지 마. 오빠만 손해니까. 잘 보여도 모자란 상황인 거 알지? 성격도 보통이 아니니까 행동거지에 조심해.
-알았다.
여동생의 신신당부에 당주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첫 인상만 봐도 범상치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였다.
“인원이 좀 늘은 것 같은데?”
“호법들이 복귀했으니까. 그리고 제자를 새로 받기도 했고.”
“제자?”
“응. 미래의 기둥들이라고 할 수 있지.”
“호오.”
당민호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제자를 받아들였다고 하자 어떤 아이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이따가 자연스럽게 보게 될 거야.”
“기대가 되는데.”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꿰어갈 생각도 하지 말고.”
“날 뭘로 보고.”
당민호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기 때문이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것이기도 했고.
“미리 말해두는 거야. 혹시나 해서.”
“그 정도로 무재가 대단하나?”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만사불여튼튼이라고 하잖아.”
“걱정할 필요 없다. 남의 문파 제자를 데려갈 정도로 몰상식하지는 않으니까.”
“사윗감으로 들일 수도 있으니까.”
당민호가 피식 웃었다.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되어서였다.
그러는 사이 당민호 일행은 옥청궁에 도착했다.
하지만 모두가 옥청궁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예지가 안내 좀 해줘.”
“예, 사부님.”
손님이 왔다는 말에 수련을 마무리 짓고 달려온 서예지가 땀이 흥건한 얼굴로 공손히 대답했다.
다른 제자들은 아직 어리기에 그녀가 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벽우진과 같은 항렬인 청민이 후기지수들을 안내하는 것은 말도 안 되었고.
“오랜만이야.”
“잘 지내셨어요?”
“응. 근데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지낸 거 같은데?”
“사부님 덕분이에요.”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같이 지냈었기에 당소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친근한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서먹서먹한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예지를 본 당주혁과 당진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기 드문 미녀인 서예지의 등장에 둘 다 놀란 것이었다.
“쯧쯧! 남자들이란.”
그런 오빠들의 모습에 당소윤이 혀를 찼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크흠!”
“큼!”
여동생의 비아냥거림에 두 형제가 다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머무실 곳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저번에 머물렀던 곳 아냐?”
“인원이 늘어나서 바뀌었어요.”
“그래?”
당소윤이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전에 머물렀던 곳이 풍광도 좋고 볕도 좋아서 마음에 들었었기 때문이다.
“근처니까 크게 다른 점은 없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서예지의 안내에 세 사람이 따라서 이동했다.
자리에 앉은 당필교가 신기한 눈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당민호에게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진짜 당주혁이나 당진수와 또래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라고 하자 당필교는 믿기지가 않았다.
“여기 이 녀석은 내 막냇동생. 기관진식 전문가지. 정확하게는 기관 쪽에 빠삭해.”
“잘만 만들어 준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나야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지만.”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기관진식을 원한다고 했었지.”
“최후의 수단으로 옥쇄가 가능하게. 혼자만 죽을 수는 없잖아? 이왕 죽어야 한다면 저승길 같이 갈 사람은 최대한 많이 데리고 가야지.”
당필교가 순간 움찔거렸다.
표정은 웃고 있었는데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아서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당가 사람인 그 역시도 옥쇄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최대한 많은 적을 데리고 갈 생각이었으니까.
“너답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만들어야지.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그런데 내 요구조건은 받아들이기로 한 거지?”
“세부조율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더?”
벽우진이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곤륜산을 떠나기 전에 그렇게 의견조율을 했는데 거기서 더 해야 한다고 하자 머리가 아파왔던 것이다.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아. 아주 간단해.”
“말해봐.”
“비천단은 섭식하는 사람의 체질에 맞게 만드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일반적인 영단도 만들 수 있지 않나? 체질을 가리지 않는.”
당민호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비현이 있는 만큼 다른 영단을 제조하는 것도 어렵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쩌면 비천단 이상 가는 영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당민호와 당문경은 생각했다.
“진짜 욕심쟁이네, 이거.”
“왠지 비천단이 전부가 아닐 것 같아서. 그리고 가주가 직접 여기까지 오기도 힘들고. 뒷방 늙은이인 나와는 달리 처리해야 할 업무도 많으니까.”
“그래서 아무나 먹을 수 있지만 효과는 비천단만큼이나 좋은 영단을 내놓아라?”
“흠흠!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그런 게 있으면 줄 수 있겠느냐는 거지. 대신 우리도 거저 달라는 건 아냐. 필교는 가문 내 최고의 기술자야. 그리고 중원 전체에서 따져 봐도 견줄 수 있는 이가 몇 없을 거다. 있다면 제갈세가에나 있겠지.”
당민호의 호언장담에도 벽우진은 미심쩍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리 최고의 기술자라고 하나 당필교는 혼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당가 쪽에서 원하는 게 너무 과했다.
“너도 알고 있지? 좀 과하다는 걸. 비천단만 하더라도 단순히 주기만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너도 알 텐데.”
“그래서 조율이 필요하다고 한 거다. 우리의 조건이 달라진 만큼 너 역시 더 요구해도 되니까.”
“그냥 내가 엎겠다면? 기관진식이 아깝기는 하지만 절실한 건 아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가?”
당민호가 황급히 벽우진을 달랬다.
그가 아는 벽우진이라면 충분히 이대로 뒤엎고도 남을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당소윤이라는 결과가 있기에 당민호는 물론이고 가주인 당문경도 비천단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평화로운 시대이지만 준비는 원래 이런 때 해야 했다.
전쟁이 나고 나서 준비하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
“네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잖아. 기관진식 하나 달랑 만들어 줄 테니 쌀이며 고기며 집안 살림 다 가져오라는 말이잖아?”
< 제 13장. 예견된 손님.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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