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9화 (39/325)

< 제 13장. 예견된 손님. -02 >

둘째인 심대현의 말에 셋째인 심소천이 이를 악물고서 대답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두 다리와 두 팔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심소천은 악으로 버텼다.

이 모든 게 자신과 형제들을 위한 것임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리고 온갖 굴욕과 치욕을 인내해야 했던 객잔 생활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해야 해!’

굶어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양껏 먹을 수 있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근근이 버틸 수 있는 정도.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짐승 이하의 대우였다.

반면에 지금의 생활은 너무나 달랐다.

밥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옷도 지금까지 입어보지 못한 새 옷을 받았다.

거기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무공까지 가르쳐 주는데 어찌 불평불만을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심소천은 비록 기절하더라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끄으으응!”

“흐읍!”

그리고 그 생각은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을 구원해준, 선택해준 벽우진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사 남매는 죽어라 버텼다.

‘대단해.’

그런데 그 모습이 서예지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다.

마냥 어리기만 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수련할 때 보면 또 그게 아니어서였다.

자신도 나름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수련을 하는데 아이들은 그녀보다 더 간절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곤륜산에 남아 있는 양일우, 양이추 형제처럼 말이다.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자신의 한계 이상을 견뎌내고 버텨내는 사 남매의 모습에, 심지어 자신과 불과 두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심대혜마저도 이를 악문 모습에 서예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연장자이자 사저로서 아이들에게 못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근성은 있네.”

그런 다섯 명의 모습을 멀리서 진구가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그의 지정석이라 할 수 있는 나뭇가지 위해서 말이다.

“인성도 좋습니다. 근골도 훌륭하고.”

“어?”

“늘 여기에 늘어져 계셨던 겁니까?”

“크흠!”

언제 온 것인지 한 뼘 정도 높은 반대편 나뭇가지 위에 뒷짐을 진 채로 서 있는 벽우진의 모습에 진구가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막 나가는 그라도 벽우진 앞에서는 어느 정도 예의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보다 강하고 일파의 장문인이었으니까.

‘내가 결코 맞는 게 두려워서 이러는 게 아냐!’

진구가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몸을 바로 했다.

그러면서 그는 벽우진을 힐끔거렸다.

“확실히 편해 보이기는 하네요. 지정석처럼 최적화된 느낌이랄까.”

“흠흠! 여기에는 어쩐 일이요? 엄청 바쁘신 분이.”

“바쁘긴 하지만 그래도 진 호법 볼 정도의 시간은 늘 있지요.”

진구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벽우진을 보니 이상하게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제게 할 말이 있는 거요?”

“예. 제자로 받아들일 이들은 좀 물색해 보셨습니까?”

“썩 괜찮은 애들이 없었소이다. 죄다 고만고만하다고나 할까.”

“아예 찾지 않은 건 아니고요?”

“그런 건 아니외다.”

진구가 최대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열정적으로 찾지 않았을 뿐이지 아예 손을 놓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물색하는 범위가 지극히 협소했을 뿐.

“저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소만.”

“저 정도만 해도 확실히 드물긴 하죠. 혼혈이기에 알게 모르게 차별도 받았을 테고. 아무래도 색목인의 피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무인들도 있었을 테니.”

“자질은 있어 보이나 그렇다고 곤륜파의 무공을 대성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대성할 정도의 자질이라면 거의 천고의 기재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벽우진이 실소를 흘렸다.

그런 기재가, 아니 천재가 흔할 리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천재라고 해서 반드시 대성하는 건 또 아니었다.

단지 출발선이 범재에 비해 말이 안 될 정도로 앞서 있는 것뿐이지.

“그 정도는 되어야 도움이 되지 않겠소이까.”

“있으면 좋겠죠. 하지만 인연이 닿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니까요. 그리고 천재라고 해서 꼭 높은 경지에 오르는 건 아니죠. 그 예가 앞에 있기도 하고요.”

“크흠!”

“한 가지 더 예를 들자면 진 호법 역시 천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웃으며 말했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진구는 더 이상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건성으로 지시를 이행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기준을 조금 낮춰서 살펴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진 호법의 진전을 이을 적전제자도 찾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연세도 적지 않으신데.”

“비인부전이라 함부로 전하지 않소이다.”

“곤륜파에 남겨 달라는 게 아닙니다. 슬슬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다는 말이지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이다.”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애초에 크게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아서였다.

다만 얻어 걸릴 수도 있기에 계속 주입하는 것이었다.

낚시처럼 어쩌다 대물이 걸릴 수도 있었으니까.

“나에게는 강요처럼 들리오만.”

“그럼 어쩔 수 없고요.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받아들인다는데 제가 별 수 있나요.”

“크흥!”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진구가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심으로도 좀처럼 이기기 쉽지 않은 상태가 바로 벽우진이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조언도 좀 해주시고요. 남도 아니지 않습니까.”

“봐서 결정할 거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벽우진은 나뭇가지를 박찼다.

여기서 더 말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어 물러난 것이다.

오히려 더 누르면 역으로 반발할 수 있기에 벽우진은 온몸을 떨면서도 기마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로 날아갔다.

“사부님!”

“열심히들 하고 있구나.”

“예!”

“기마자세는 그쯤하고. 몸 풀기는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예지를 제외한 사 남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벽우진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 역시 겪어온 훈련이었기에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너무 가만히 있는 것도 좋지 않아. 움직이면서 풀어줘야 해. 안 그러면 밤새 근육통으로 고생한다.”

“옙!”

“네!”

“예지는 혼자 수련하고 있고. 애들 봐준 다음에 봐줄 테니까.”

서예지는 어느 정도 기틀을 잡은 상태였기에 벽우진은 그리 지시하며 심대혜를 시작으로 아이들을 봐주기 시작했다.

그동안 보아온 것들을 기준으로 각자에게 맞는 무공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저는 아무것도 안 주시나요?”

“대현이 너는 권장각이 어울릴 것 같아서. 넷 중 몸을 가장 잘 쓰기도 하고.”

“으음.”

심대현이 누나와 동생들을 힐끔거렸다.

그런 심대현의 두 눈에는 짙은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목검과 목도이긴 해도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과 빈손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바로 아랫동생인 심소천이 신줏단지 들 듯이 목도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보자 심대현은 더욱더 부러웠다.

“병기가 있다면 유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승부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다. 두 주먹으로 강호를 평정한 무인들도 적지 않아. 각법(脚法) 하나로 무명(武名)을 날린 이들도 많고. 더욱이 네가 익힐 무공은 다른 곳도 아닌 곤륜의 무공이다.”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죄송해할 것은 없고.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런 거니까.”

의젓하고 조숙하다고 하나 그래 봤자 열다섯 살의 소년이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심대현의 실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 같은 남매이니만큼 자신에게만 소홀하다고 느낄 수도 있어서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절대 차별하는 게 아니었다.

제법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죽어라 배우겠습니다.”

“진짜 죽지는 말고. 의욕이 넘치는 건 좋지만, 과한 건 안 좋아.”

“명심하겠습니다.”

“먼저 대혜부터 와.”

“예, 사부님.”

현재 신장에 맞는 목검을 든 심대혜가 사뭇 긴장한 얼굴로 벽우진의 앞에 섰다.

내공심법이나 경신술은 배웠어도 검법을 배우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목검을 드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심대혜는 다부진 표정으로 벽우진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어려울 것 없어. 춤을 춘다고 생각해.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면 안 되고. 검로를 따라가면서 발도 신경 쓰고. 검법과 보법은 하나야. 별개가 아니고.”

“네!”

심대혜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한 차례 웃어준 벽우진이 연습용 목검을 들고서 시범을 보였다.

한 마리 용이 하늘을 자유롭게 노니는 듯한 형상을 따서 만든 유룡검법(遊龍劍法)이었는데 강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능히 강호일절이라 불릴 만한 검공이 바로 유룡검법이었다.

“우와···.”

자유로우면서도 유려하게 허공을 수놓는 검초에 심대혜는 물론이고 동생들도 넋을 잃었다.

무공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 남매가 유룡검 안에 담긴 검의를 보지 못해서였다.

“후우. 어떠느냐?”

“너무 아름다워요.”

“유룡검이라는 검법이다. 본 것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검로가 특징인 검법이지. 그리고 보기와는 달리 살검이기도 하고.”

“저도 사부님처럼 펼치고 싶어요.”

“후후후!”

열의가 가득 담긴 심대혜의 표정에 벽우진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행히 시범을 보인 보람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이어서 벽우진은 심대현이 익힐 종학금룡수(從鶴擒龍手)를 선보이며 다시 한 번 아이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더불어 심대현의 눈빛도 달라졌다.

간결하면서도 위력적인 종학금룡수에 매료된 것이었다.

뒤이어 벽우진은 심소천과 심소혜가 익힐 무공을 차례대로 선보이며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집무실에 앉아 있는 서일국의 표정이 요상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태세전환이 빨라.”

예전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로 서일국이 중얼거렸다.

하루가 멀다하고 청해성에서 방귀 깨나 뀌는 문파들이 서신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용이 하나같이 대동소이했다.

과거였다면 청하상단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곳들이 어떻게든 그와 인연을 맺고 싶어 했다.

“정확하게는 내가 아니라 곤륜파이겠지만.”

산적들을 퇴치하고 상계의 자잘한 힘겨루기에서 진구가 활약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 변화를 몰고 온 건 바로 대호방의 부방주와의 비무였다.

그때 진구가 확실한 힘의 우위를 보여주었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냉정하게 보면 청하상단과 곤륜파를 이용하기 위해서.

“줄을 잘 서는 것도 어떻게 보면 능력이니까.”

청하상단이 지금 누리고 있는 위상은 모두 곤륜파와 벽우진 덕분이었다.

정확하게는 벽우진이 청하상단을 찾아옴으로써 달라진 변화였다.

만약 벽우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청하상단은 사라지거나 천검문의 분타 정도로 전락했을 게 분명했다.

서예지는 공휘준의 노리개가 되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터였고.

부르르르!

벌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서일국은 전신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동시에 자신과 가문에게 얼마나 천운이 따랐는지도 절절하게 깨달았다.

“백운산장과 하오문이라.”

힘을 드러낸 곤륜파로 인해 청해성의 세력구도가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었다.

군소방파들은 새로운 강자의 등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대호방과의 경쟁에서 밀린 곳들은 곤륜파를 이용할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힘이 부족하다면 강자의 그늘 아래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손을 맞잡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 제 13장. 예견된 손님.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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