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3장. 예견된 손님. -01 >
서진후가 말한 새롭게 얻은 무공이란 천검문의 장로들이 익히고 있던 것들이었다.
물론 대놓고 익힐 수는 없겠지만 암암리에 수련하는 것 정도는 괜찮았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잊힐 테고 말이다.
“그나저나 걱정입니다. 오늘 있었던 일로 견제가 더욱 심해질 게 분명하니까요.”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눈치 보는 것보단 낫잖아? 차라리 눈치를 보게 만드는 게 낫지.”
“그렇긴 합니다. 허허.”
“한 번쯤은 확실하게 무력시위를 해줄 때도 되었고. 그래야 깝죽대지 않지.”
벽우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언제까지나 비밀을 유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어느 정도까지는 밝히는 게 나았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함부로 덤벼드는 곳들은 없을 테니까.
“어쩌면 저들끼리 똘똘 뭉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공공의 적이 있으면 힘을 합치는 게 인간이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우리가 싸울 생각인 것도 아니고 엄연히 활동하는 영역이 다른데. 조금 겹치기는 하지만 아직 대호방이나 백운산장과 부딪칠 정도는 아니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계획한 대로만 하면 돼. 지금은 그게 먼저다.”
벽우진이 방향을 다시 한 번 잡아줬다.
그게 바로 수장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근데 조금 놀랐습니다. 설마 하니 혼혈인 아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이실 줄은 몰랐거든요.”
“그 아이들은 사람 아니더냐?”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제 기억 속에는 색목인이 문하로 들어온 적이 없었으니까요.”
“무골이 상당한 아이들이다. 거기다 비천단까지 있으니 아마 무서울 정도로 성장할 거다. 예지를 위협할 정도로 말이지.”
벽우진이 자신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건 서예지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자극을 주는 경쟁자만큼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예지가 쉽게 따라잡히지는 않을 겁니다. 의외로 호승심이 있는 아이라서요. 의지도 강하고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어쨌든 청해성의 정세는 꾸준히 살펴보고. 지금은 잠잠하지만 또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진후는 내일 아침에 비술에 들어갈 거니까 준비하고. 일국이는 모레 아침이다.”
꿀꺽!
두 부자가 동시에 침을 삼켰다.
서예지를 봤기에 기대가 안 될 수가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예지는 어려서 가능했지만 둘은 장담하기 힘드니까. 청민의 경우 환골에서 그쳤다.”
“저는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입니다.”
“본산제자들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을 가르쳐주셨는데 비천단까지라니요. 전 괜찮습니다.”
내심 기뻐하는 서진후와 달리 서일국은 공손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자신이 마지막까지 신의를 지켰다고 하나 그래도 영단은 너무 과분한 것 같아서였다.
막말로 진산제자만이 배울 수 있는 태청신공을 배운 것만으로도 그는 분에 넘치는 무공을 배운 상태였다.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넌 받을 자격이 있다. 거절은 내가 거절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받을 만 하니까 주는 거야. 부담 가질 거 없어. 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신은 그리 해주지 않지만, 난 달라.”
“감사히 받겠습니다.”
말했던 대로 거절은 거절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벽우진의 표정에 서일국은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현기가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도, 자신도, 딸도 천고의 영단이라 할 수 있는 비천단을 하사받았는데 서현기만 제외된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차마 아들 것까지는 바랄 수가 없었다.
서예지야 스스로 곤륜파의 제자가 되겠다고 벽우진에게 직접 찾아갔지만 서현기는 어려서부터 추열문의 제자가 되겠다고 결정하고는 장인 가문의 무공을 익혔기 때문이다.
즉 벽우진과의 연결고리라고는 자신과 부친, 서예지 밖에 없었다.
“표정이 왜 그래? 너무 감격해서 그래?”
“그, 그렇습니다.”
“상인이 표정관리를 못하네.”
“크흠!”
정곡을 찌르는 벽우진의 말에 서일국이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염치를 모르지는 않기에 서현기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어쨌든 그리 알고 있어. 주변 상황은 계속 예의주시하고. 특히 서녕은 확실하게 틀어쥐고 있어야 해. 여기가 청해성의 중심 아냐? 성도인 만큼 오고 가는 돈들도 많고. 이참에 다 틀어쥐라고.”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벽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장문인이 되었다지만 회의는 그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늘 최단시간을 외쳤다.
머리 아픈 얘기는 짧고 굵게 하는 게 최고였다.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늘 남아도는데.’
그의 몸은 하나였고, 시간 역시 한정적이었다.
그런 만큼 아무리 일을 해도 해도 해야 할 일은 줄어들지를 않았다.
‘이제는 가르쳐야 하는 제자들도 많아졌고 말이지.’
방을 나서며 벽우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불과 하루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제자들이 늘어나자 왠지 모르게 심적으로 든든했던 것이다.
물론 이제 시작이니 가야 할 길이 구만리였지만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중요한 건 시작을 했다는 점이었다.
한편 도망치듯이 청하상단에서 나온 대호방주는 설규와 함께 곧바로 복귀했다.
쪽도 이런 개 쪽이 없었기에 최대한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넝마가 되어 있는 겉모습과 달리 설규의 상태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정말 괜찮다고?”
“예. 내상이 좀 있기는 하지만 맞은 것에 비하면 심하지 않습니다. 기술적으로 진짜 잘 때린 것 같습니다. 맞을 땐 엄청 아프지만 실질적으로 상처는 그리 깊지 않은.”
“너 피 토했잖아?”
“그때는 죽을 만큼 아팠는데 지금은 좀 괜찮습니다. 요상약 먹고 이, 삼일 정양하면 다 나을 것 같습니다.”
대호방주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그렇다면 진짜 설규보다 한두 수 위가 아니라 그 윗줄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 노괴물이 있단 말이지.’
대호방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부방주인 설규는 대호방에서 두 번째 실력자였다.
한데 그런 설규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상대했다.
그게 대호방주는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모든 호법들이 다 그 노괴물 수준은 아닐 겁니다.”
“그래도 비슷한 수준은 될 거야. 그러니까 홀로 다니면서 산채들을 깨부수고 다니지. 단독으로 그렇게 하려면 적어도 구파일방의 장로들 정도는 되어야 해.”
“으음!”
설규가 침음을 흘렸다.
하나도 틀린 말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문이 들었다.
추락할 대로 추락한 곤륜파에 그런 고수들이 나타났다는 게 말이다.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정작 멸문지화를 입었을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고수들이 어째서 갑자기 나타났을까. 그것도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생각해보면 곤륜파의 무공을 사용한 것 같지 않습니다.”
“네가 몰라본 것일 수도 있지. 사실 나만 하더라도 곤륜파의 무공을 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구전으로 내려오는 소문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운룡대팔식 같은 것이요.”
“아예 무공을 펼치지 않은 것 같던데. 초식이 거의 없었어.”
대호방주가 고개를 저었다.
설규가 속된 말로 두드려 맞고 있기에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비무를 지켜봤었다.
하지만 곤륜파의 노괴가 펼친 건 단순한 주먹질이었다.
딱히 무초식의 경지라고 할 것도 없는.
“그렇습니까.”
“후우. 그나저나 일이 복잡하게 꼬였어. 하필이면 최악의 예상대로 흘러가다니.”
“죄송합니다.”
“부방주가 죄송할 게 뭐 있나. 그 노괴가 상상 이상이었던 거지. 그래도 곤륜파의 잠재력을 알았으니 아예 손해는 아니야.”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른 곳들도 알게 될 겁니다. 공식적인 방문이었으니까요.”
대호방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얼마 안 가 소문이 날 터였다.
귀추를 주목하고 있는 곳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그러니 그 안에 챙길 수 있는 것을 확실하게 챙겨야 했다.
“가장 좋은 결과는 부방주가 이기는 것이었는데 말이지.”
“···죄송합니다.”
“괜찮아. 나였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무림에서는 개개인의 무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세력이 지닌 힘이지.”
“맞습니다.”
설규가 맞장구를 쳤다.
삼제오왕칠성 정도 되는 고수라면 모를까 평범한 고수는 결코 세력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하지만 뛰어난 고수가 모여 있다면 얘기는 또 달라졌다.
“만만했으면 냉큼 잡아먹었을 텐데···.”
“냉정하게 따져봤을 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저희 편입니다. 지금 곤륜파의 고수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으니까요. 그리고 고수라는 게 단기간에 찍어내듯이 만들어 낼 수 없기도 하고요.”
“시간과 공을 들이자?”
“예. 막말로 저희와 곤륜파가 힘을 합치면 무력과 역사가 함께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지금의 위치를 훨씬 더 공고히 할 수 있을 겁니다.”
대호방주가 눈을 빛냈다.
확실히 일리가 있어서였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곤륜파를 집어삼키지 못한다는 것이었지만 그건 차근차근 진행해도 되는 문제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지도 모르니까.
“괜찮은 생각인데?”
“곤륜파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일 겁니다. 고수들이 있다고 하나 그게 언제까지 유지되는 건 아닐 테니까요. 게다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 금전적으로도 부족한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청하상단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청하상단이 곤륜파의 소유는 아니니까요.”
“맞는 말이기는 한데 문제는 첫 인상이야. 시작을 좋지 않게 끊었으니.”
“장문인인 만큼 공과 사는 구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해득실에 빠삭한 청하상단주도 있지 않습니까.”
설규가 청산유수처럼 말을 이었다.
싸워서 이길 수 없다면 같은 편이 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냥 엎드리는 것도 아니었다.
고수 층에서는 밀리지만 세력으로 본다면 곤륜파는 대호방과 감히 견줄 수 없었다.
“그가 과연 중재를 해줄까 모르겠군.”
“더구나 시비는 저쪽에서 먼저 걸었습니다.”
“그건 그렇지.”
“어느 쪽이든 결정은 빨리 내리는 게 좋습니다, 방주님.”
대호방주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척을 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생각했던 것보다 설규의 부상이 심각한 것도 아니었고.
창백한 안색을 보고 내상이 심한 줄 알았는데 멀쩡히 말하는 걸 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백운산장만 제압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쉽지 않아.”
“그래도 이번 방문으로 많은 걸 알아내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도 큰 소득입니다.”
“그렇긴 하지.”
대호방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상당히 씁쓸했다.
천검문주처럼 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때론 숙일 때도 필요한 법이었다.
천하제일인이 아닌 이상은.
청하상단에 도착했음에도 벽우진의 일과는 곤륜산에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틀 동안 서진후와 서일국이 비천단의 약력을 흡수하는 걸 도우고 나머지 시간에는 서예지와 사 남매를 가르쳤다.
아무래도 첫 기반을 다지는 것인 만큼 벽우진은 사 남매에게 큰 신경을 썼다.
자신이 데려온 것이기도 했기에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우으으!”
“힘내. 악착같이 버티는 거야.”
“네!”
조식 후 하체단련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기마자세를 다섯 명의 제자들이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섯 중에 표정변화가 없는 건 서예지뿐이었다.
이런 식의 단련이 처음인 사 남매는 하나같이 죽상을 하며 억지로 견디고 있었다.
“힘들어도 버텨!”
“무, 물론이지!”
< 제 13장. 예견된 손님.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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