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장. 말했던 대로. -03 >
“조용할 날이 없는 거 아냐?”
“아닙니다. 평소에는 조용히 지내십니다.”
“있는 듯 없는 듯 늘어져서?”
“헙!”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던 위사가 입을 다물었다.
진구보다 벽우진이 당연히 상급자였지만 그렇다고 아예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어서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그런 위사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는 듯이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가시게요?”
“구경 안 할 거야?”
“어···.”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서예지가 일순 말을 잃었다.
반면에 사 남매는 눈을 반짝였다.
곤륜파의 제자가 되었지만 아직은 무공을 제대로 견식해 본 적이 없기에 다들 궁금해 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싸우고 있는 이들 중 한 명이 곤륜파의 사람이라고 하자 넷은 더더욱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에 가면 청민이든 단주든 둘 중 한 명은 있겠지.”
“그럴 가능성이 크죠.”
“너도 궁금하지 않아? 진 호법이 어떻게 싸우는지.”
“사실 궁금해요.”
“그럼 말 다 했네.”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심소혜의 손을 붙잡은 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말없이 비현이 뒤따랐고 서예지도 두 눈을 끔뻑이다가 삼 남매를 데리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콰앙! 쾅!
꽤 오랫동안 머물렀기에 굉음이 들려오는 곳을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어가면 되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연무장에 다다른 벽우진은 오랜만에 진구와 전신이 너덜너덜해진 중년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장문인!”
“여어. 오랜만.”
흉터로 인해 더욱 흉악하게 보이는 중년인과 함께 서서 비무를 지켜보던, 아니 일방적인 구타를 구경하던 서일국이 벽우진을 발견하고는 한걸음에 다가왔다.
하지만 옆에 서 있던 중년인은 두드려 맞고 있는 장한에 온 신경을 집중했는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건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아빠!”
“예지도 왔구나. 어?”
한달음에 벽우진 일행에게 다가온 서일국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깐 사이에 딸이 너무나 몰라보게 달라져서였다.
물론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이 말이다.
자신보다도 못했던 내공수준이 감히 그가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높아진 것 같자 서일국이 멍한 눈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제자로 받아들였을 것 같아?”
“무, 무슨 도술을 부린 겁니까?”
“미안하지만 난 도술은 몰라. 내가 전승받은 건 무공이 전부다.”
“이게··· 가능한 겁니까?”
보고도 믿겨지지 않는 현실에 서일국이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좋은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급격한 변화여서였다.
“가능하지. 영약만 구해도 가능한 일이고.”
“구하신 겁니까?”
“아니. 구할 수는 있는데 효율이 너무 많이 떨어져. 그래서 나만의 비법을 찾았지. 도와준 사람도 있고.”
벽우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서일국이 마른침을 삼켰다.
딸을 위해 사용해준 건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굳이 서예지가 먹었어야 했나 싶어서였다.
물론 첫 번째 제자이고 마지막까지 신의를 지킨 청하상단의 혈육이었기에 자격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과했다.
“그래도 너무···.”
“네 차례도 있으니까 너무 실망하지는 말고.”
“예?”
“내가 설마 돈 몇 푼 쥐어주고 입 싹 닦겠어? 넌 청민 다음이니까 기다리고 있어.”
서일국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말인지 그는 도통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에 서예지가 남모르게 웃었다.
오직 그녀만이 서일국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커헉!”
벽우진이 서일국과 해후 아닌 해후를 나누고 있을 때 연무대 위에서 격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걸쭉한 피가 연무대 위를 적시기 시작했다.
“뭐야? 너 대호방 부방주라며? 그런데 왜 이렇게 허약해?”
“니미···!”
걸레짝이 되어버린 무복을 움켜잡으며 설규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전신 곳곳에서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다.
단순히 때린 게 아니라 내공의 잔해가 남아 있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이 배가 되었던 것이다.
“아니면 방주 말고는 별 볼 일 없는 건가?”
으드득!
진구의 도발에 대호방주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분하고 짜증나지만 확실한 건 진구가 그보다 윗줄의 고수라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높게 쳐줘야 동수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너무나 큰 착각이었다.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늙은이가 나온 거야?’
부방주이자 동생인 설규는 그와 반 수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것도 평범한 절정고수가 아닌 최절정고수였다.
한데 그런 설규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두들겨 맞자 대호방주는 화도 났지만 어이가 없었다.
설규 정도 되는 고수쯤 되면 어디 가서 저렇게 처 맞고 다니지는 않아서였다.
“누구야?”
“대호방주입니다.”
“아, 천검문 다음?”
“예에.”
벽우진의 물음에 서일국이 작게 대답했다.
혹시나 대호방주가 들을까봐 조심하는 것이었다.
“간 보러 온 모양이네? 우리의 저력이 어느 정도인지?”
“맞습니다. 아무래도 거슬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희가 무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림과 아예 연관이 없다고도 할 수 없으니. 근데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습니다.”
“뭐 어때? 죽이는 것도 아니고 비무인데.”
“그게, 도발은 진 호법이 먼저 했습니다.”
“괜찮아.”
벽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청하상단으로 파견을 보낼 때 웬만한 일은 스스로 판단해서 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호방 정도면 진구가 알아서 할 정도는 되었다.
“괜한 명분을 주게 되는 건 아닐까요?”
“쪽팔리다고 덤비면 그에 따른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허허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쓸어버리겠다는 말을 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서일국은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 말이 빈말로 들리지는 않았다.
이미 한 차례 저지른 일이 있어서였다.
“···내가 졌소이다.”
“쯧쯧! 아까의 패기가 아깝다.”
“······.”
벽우진이 서일국과 대화하는 사이 비무 역시 마무리 되었다.
무경의 격차를 절절히 느꼈기에 설규가 패배를 시인했던 것이다.
“그럼 다음은 너냐? 문 지키기는 멍멍이를 때려 잡았으니 이제는 집주인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거절하겠소이다.”
“크크!”
진구가 대놓고 도발했지만 대호방주는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대호방주는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하고는 도망치듯 청하상단을 나섰다.
더 있어 봤자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그는 서일국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대호방으로 돌아갔다.
“에잉! 몸 좀 제대로 풀어보나 했더니.”
“부족하면 내가 좀 도와줄까요?”
“크흠! 괜찮소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익숙한 목소리에 진구가 단칼에 거절했다.
아무리 몸이 찌뿌둥해도 벽우진과 비무를 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그는 패는 게 좋았지 맞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자, 그럼 안으로 들어가지. 우리 애들 밥 먹을 시간 되었는데.”
“그러고 보니 누구입니까?”
“내 새 제자들. 앞으로 곤륜파의 대들보가 되어줄 아이들이랄까.”
“이 아이들이요?”
안 그래도 벽우진과 서예지에게 착 달라붙어 있는 아이들이 궁금했었던 서일국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이라고 하자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머리는 검은색이었지만 눈동자는 넷 모두 벽안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청해성이 세외에 인접해 있어 색목인들을 흔치 않게 볼 수 있다고 하나 그렇다고 제자로 받아들인 적은 과거에도 없었기에 서일국이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응. 인연이 닿았어.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거두었지.”
“일단 별채로 가시지요. 호법님은···.”
“난 내가 알아서 가겠다.”
“예.”
벽우진과 함께 있는 게 여전히 부담스러운지 진구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땅을 박차자마자 순식간에 담을 넘어 사라졌던 것이다.
그 모습에 사 남매가 신기한 듯 초롱초롱한 눈을 빛냈다.
“가시죠.”
“그래.”
지난번에 머물렀던 별채에 도착한 벽우진은 익숙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의 앞에 앉은 건 서일국과 서진후, 비현뿐이었다.
함께 온 서예지는 식사를 하기 전에 사 남매부터 씻긴다고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예지를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본 대로야.”
“진짜 영초를 구하신 겁니까?”
서일국만큼이나 놀란 서진후가 앉기 무섭게 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구하고 싶어도 인연이 닿지 않으면 구할 수가 없는 영약을 자신의 손녀에게 사용했다는 게 미안해서였다.
“영초도 들어가기는 했는데, 딱히 구하기 힘든 것들은 아니었어. 가장 오래 묵은 게 백년 정도니까.”
“예?”
“간단하게 설명해주마.”
벽우진이 청민과 서예지에게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두 부자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서예지를 직접 봤음에도 불구하고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둘은 비현을 마치 신선 보듯이 쳐다봤다.
“놀랍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했다니.”
“엄청난 일이지. 물론 이 모든 걸 계획한 건 나였지만. 예전의 명성을 빠른 시간 안에 되찾는 방법은 고수가 빠르게 늘어나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절정고수인 것은 아냐. 다만 출발선 자체가 달라진 것뿐이지.”
“그게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지 않습니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말은 벽우진에게 했으나 서진후의 시선은 비현에게 향해 있었다.
계획이라는 큰 그림을 그린 건 벽우진이지만 그것을 실현시킨 것은 비현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력 있는 연단가는 모시고 싶다고 해서 모셔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희귀하기도 했지만 사기꾼들도 많아서였다.
“저 혼자만 만든 게 아닙니다. 장문인이 아니었다면 비천단은 탄생하지도 못했을 테고 이렇게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지도 못했을 겁니다.”
“내 역할이 반 정도는 된다는 말이지. 후후!”
벽우진이 거들먹거렸다.
그런데 그 모습이 서진후나 서일국은 절대 거만해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말 그대로 기적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벽우진은 비천단이라는 영단을 자신들에게도 준다고 했기에 둘은 은연중에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사형이십니다.”
“말했잖아. 사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거라고. 지금은 단지 다른 곳에 맡겨둔 것뿐이야. 아직 제대로 된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에 따른 준비도 착착 진행되고 있고요.”
“표국을 인수한다고?”
“예. 지금까지는 상행을 나설 때 따로 표국과 거래를 했으나 자체적으로 표국을 가지고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게 됩니다. 또한 청해성을 너머 다른 성까지 거래처를 늘릴 생각이기에 표국을 인수하는 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서진후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무력이 부족한 청하상단인 만큼 표국을 인수하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에는 청해성을 넘어 인근의 사천성과 감숙성까지 상행을 나갔던 게 청하상단이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이자 늘 문제가 되는 건 돈이지. 자금 상황은?”
“일단은 작은 규모의 표국을 인수하려고 합니다. 당장 일을 크게 벌이는 건 시기상조이니까요. 게다가 새롭게 얻은 무공도 있으니 빠른 시일에 표사들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기는 했지.”
< 제 12장. 말했던 대로.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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