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6화 (36/325)

< 제 12장. 말했던 대로. -02 >

“겉보기와 달리 연세가 꽤 있으십니다. 물론 나이답지 않게 정정하시기도 하고요.”

“한 번 뵐 수 있겠소? 어떻게 보면 앞으로 자주 봐야 하는데 온 김에 인사라도 나누면 서로 좋지 않겠소.”

“배분이 제가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서요.”

“그래도 내가 온 것을 알면 오지 않겠소? 나름 청해성에서 무명이 있는 이 몸인데.”

대호방주가 넌지시 물었다.

은근슬쩍 자리를 주선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일단 물어는 보겠습니다. 하지만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당사자가 싫다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온 김에 한 번 꼭 보고 싶구려.”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서일국이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시비가 서일국의 말을 전하기 위해 접객당을 나서는 기척이 느껴지자 대호방주가 속으로 침을 삼켰다.

바쁜 일정을 다 미뤄두고 여기까지 온 김에 이왕이면 곤륜파의 호법이라는 노도사를 꼭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것 때문에 직접 찾아온 것이기도 했고.

사실 청하상단은 그에게 있어 딱히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거슬리는 건 곤륜파지.’

청해성을 대표하는 무문이 되었지만 냉정하게 말해 지금의 자리는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더구나 곤륜파는 비록 멸문지화를 입었으나 수백 년 동안 청해성을 지배한 대문파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권세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청해성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곤륜파는 최고이자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대호방주는 아무리 곤륜파가 현재 세력이 작다고 하나 무시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문파가 곤륜파였으니까.

똑똑.

그런 생각을 하며 서일국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시비가 말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문을 열었던 것이다.

“진구 호법님.”

“저 놈이냐? 날 보자고 한 게?”

“그렇습니다.”

다짜고짜 저 놈이라 내뱉는 진구의 말에 등을 지고 있던 대호방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하니 초면부터 놈놈 거릴 줄은 몰라서였다.

나이는 비록 그가 어릴지 모르나 그래도 한 방파의 수장이 바로 자신인데 말이다.

그렇기에 대호방주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초면에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아니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대호방주보다 먼저 몸을 돌렸던 설규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아무리 강호에서 배분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대우를 해주는 게 예의였다.

더구나 그의 형님은 한 방파의 수장이지 않던가.

그런데 설규의 일갈에 진구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이런 싸가지 없는 녀석들을 봤나.”

“호, 호법님!”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흘러가는 모양새에 서일국이 당황해서 진구를 불렀다.

진구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분위기가 좋지만은 않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아니, 사실은 귀찮다고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가 부탁해도 올까 말까인 게 진구인데 물어본다고 해서 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의 예상과 달리 진구는 시비를 보내기 무섭게 접객당을 찾았고, 분위기를 대번에 싸늘하게 만들었다.

“나이 좀 먹었다고 맞먹으려고 드네? 너네 부모님이 널 그리 가르쳤더냐?”

“이···! 이···!”

“왜? 한 대 치려고? 그럼 쳐 봐.”

말 몇 마디에 극도로 흥분하는 설규의 모습에 진구가 실실 웃었다.

벽우진에 가려서 그렇지 그 역시 한 도발 하는 인물이었다.

물론 말보다는 주먹을 더 많이 썼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는 막 나가기는 해도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말이 너무 심한 것 같소만.”

“늙은이를 오라 가라 하는 건 안 심하고? 내가 보고 싶었으면 네놈들이 알아서 찾아와야 하는 거 아냐? 아니면 여기까지 왔으니 나머지는 나보고 오라는 소리였나?”

“···상당히 무례한 성격이시구려.”

대호방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아무리 연배가 높다고 하나 그렇다고 자신을 모욕할 수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이었고 대호방주는 내심 기꺼운 상태였다.

안 그래도 어떻게 찔러 보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판을 깔아주어서였다.

“무례하기는. 내가 안 했으면 지가 했을 거면서.”

흠칫!

대호방주가 순간 흠칫거렸다.

마치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본 듯한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 생각을 털어냈다.

대신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구를 샅샅이 훑어봤다.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른 건 확실하고.’

무복이나 도복이 아닌 평범한 경장 차림인 진구는 언뜻 보면 기골이 장대한 오십대 후반의 노인으로 보였다.

젊었을 적 한가락 했던 노인의 모습이랄까.

거기다 태양혈 역시 밋밋했기에 결코 높은 경지의 무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다 반박귀진의 경지에 올라서 평범해 보이는 것뿐이었다.

“음흉하게 눈치 보지 말고 그냥 말해. 간보러 여기까지 왔다고 말이야.”

“말이 심하시오.”

“거 봐. 아니라고는 말 안 하잖아?”

“이렇게 무례하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대호방주가 언짢은 심사를 역력히 드러내며 말했다.

그러나 그 모습에도 진구는 되레 웃었다.

“따라 와. 안 그래도 요즘 시끄러운 대호방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는데. 너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당신의 상대는 나요.”

“뭐, 상관없어.”

냉큼 입을 여는 설규의 모습에도 진구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방주건 부방주건 그에게는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전자는 그냥 깔아뭉개버리면 되니까.

그리고 이건 벽우진도 허락한 일이었다.

‘분명 어느 정도 선까지는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진구가 히죽 웃었다.

안 그래도 적적하던 차에 재미난 일이 벌어져서였다.

하지만 뒤따라 나오는 세 사람은 그런 진구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에이취!”

“사부님 괜찮으세요?”

“아,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서. 지금은 귀도 간지럽네.”

사남매 중 막내인 심소혜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오자 벽우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무공을 익힌 그가 감기에 걸릴 가능성은 물고기가 익사할 가능성만큼이나 희박했기 때문이다.

“다행이에요.”

“힘들지는 않고?”

“헤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굶은 것도 아니고 밥도 든든하게 먹었으니까요!”

앙증맞은 손으로 벽우진의 한손을 붙잡은 채로 심소혜가 환하게 웃었다.

언니 오빠들 이후로 그녀를 이렇게 챙겨주고 신경 써주는 이는 벽우진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어른이 함께 한다는 든든함은 심소혜를 심적으로 더욱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금방 적응해서 다행이다. 나이가 어려서 내심 걱정했는데.”

“소혜도 그렇고 소천이도 그렇고 다들 철이 일찍 들었거든요. 그리고 사부님이 잘해 주시기도 하고요.”

“다정하지는 않으시지만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기는 하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좀 가벼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과묵한 것보다는 훨씬 나은 거 같아요. 말이 없으면 다가가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서예지와 나란히 걷던 심대혜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이 없는 어려운 사람보다는 차라리 벽우진 같은 성격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충분히 벽우진의 다정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과 동생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하지만 무공을 가르칠 때는 또 다르셔.”

“그런가요?”

“응. 아마 눈물을 쏙 뺄지도 몰라.”

서예지가 조금은 겁을 주듯이 말했다.

무공을 가르칠 때의 벽우진은 진짜 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실력이 빠르게 느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일단 먹고 자는 걱정은 덜 수 있잖아요. 더구나 때리는 사람도 없고요.”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어.”

“아니에요. 빈민촌에 사는 애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아요. 거기에는 부모답지 않은 부모들이 엄청 많거든요. 이상한 아이들도 많고.”

“누나가 고생을 진짜 많이 했어요.”

“맞아요.”

심대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째인 심대현과 셋째인 심소천이 입을 열었다.

나름 의젓해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서예지는 너무나 귀여웠다.

막내인 그녀는 부모님께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사실 동생을 갖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 양일우, 양이추 형제를 시작으로 사남매가 합류하자 그녀는 너무나 기뻤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제 역시 동생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많은 게 달라질 거야. 대신 각오도 단단히 해야 하고. 무공을 익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래도 저희는 행복해요. 일단 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까요.”

“눈치도 안 보고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서예지가 빙긋 웃으며 심대현과 심소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두 형제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서예지의 손길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던 것이다.

“아, 누가 내 욕하나. 귀가 왜 자꾸 간지럽지.”

“제가 파드릴까요, 사부님?”

“아냐. 더러운 건 만지는 거 아냐.”

“안 더러운데.”

벽우진의 손을 잡은 채로 걸음을 옮기던 심소혜가 입을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나이는 열셋 밖에 되지 않았지만 객잔에서 일하면서 온갖 더러운 꼴이란 꼴은 다 봤기에 귀지 정도는 심소혜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벽우진이 만류하자 심소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제 소혜는 객잔의 하인이 아니야. 곤륜파의 제자이자 나의 제자이지. 그것을 잊으면 안 돼.”

“네!”

“아이고 착하다.”

“헤헤헤!”

손녀는 없지만 만약 손녀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기에 벽우진은 인자하게 웃으며 심소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심소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차올랐다.

“우와아.”

“여기가 사저의 집이에요?”

“응.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지. 얼마 전까지 살기도 했고.”

집의 정문에 도착한 서예지는 장원의 규모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아이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놀란 반응마저도 너무나 귀여워서였다.

“사, 사저께서는 엄청난 부자셨군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우리 집도 얼마 전까지는 힘들었거든. 근데 사부님께서 도와주셨지. 어떻게 보면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나 할까.”

“정말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 지나간 일이니까. 얼른 들어가자. 점심 먹어야지?”

점심이라는 이야기에 세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못 먹어서 그런지 다들 하나같이 식탐이 있었는데 그게 서예지는 이상하기보다는 안쓰러웠다.

“설마 아가씨입니까?”

“저예요. 아버지는 계시죠?”

“예. 계시기는 한데···.”

잡인을 거르기 위해 문을 지키던 위사가 말끝을 흐렸다.

아까 전에 대호방주가 방문했기에 아무래도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라서였다.

“무슨 일 있어요?”

“한 식경(약 30분) 전에 대호방주가 찾아왔습니다.”

“대호방주가요? 무슨 일로요?”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위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서예지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모른다는데 더 추궁할 수도 없어서였다.

대신 서예지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자, 장문인!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어. 그러니까 문 열어.”

“옙!”

고민하는 서예지와 달리 벽우진은 늘 그렇듯이 심드렁한 얼굴로 짤막하게 지시했다.

그러자 위사들이 황급히 문을 열었다.

서예지가 복귀한 것에만 신경 썼지 뒤에 서 있는 벽우진을 보지는 못해서였다.

쿠아아앙!

그런데 그때 내원 쪽에서 묵직한 굉음이 들려왔다.

마치 화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소리가 들리며 땅이 미약하게 진동하자 서예지는 물론이고 위사들의 표정 역시 달라졌다.

< 제 12장. 말했던 대로.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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