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5화 (35/325)

< 제 12장. 말했던 대로. -01 >

백운산장과의 경쟁을 이기고 청해성의 패권을 잡은 대호방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동안 천검문이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이권들을 속속들이 집어삼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호방주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분명 곤륜파의 제자는 한 명뿐이었데. 그마저도 일류에 오르지도 못하고 부상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놈이었잖아.”

“안 그래도 알아봤는데 진짜 알려진 게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오문에서는 뭐라 그래?”

대호방주가 얼굴을 사선으로 길게 가로지른 흉터를 꿈틀거리며 물었다.

무력이나 세력은 보잘 것 없는 문파가 하오문이었지만 정보 하나만큼은 쓸 만했다.

어떻게 보면 개방보다도 더 뛰어날 정도로 말이다.

“따로 조사는 하고 있는 모양인데 딱히 알아낸 것은 없는 모양입니다.”

“호오. 그래?”

“아무래도 냄새가 많이 나니까요. 천검문주와 천류검대가 아무 이유 없이 사라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섣불리 건드리기도 애매해.”

천검문이 차지하고 있던 청해일패의 자리를 빼앗았지만 대호방주는 아직도 천검문주를 일대일로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더욱이 천류검대와 장로들까지 포함해서는.

그렇기에 대호방주는 너무나 궁금하지만 섣불리 청하상단과 곤륜파를 파지 않았다.

만약 천검문주를 죽인 게 곤륜파의 인물이라면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청해제일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천검문주이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장로들과 천류검대까지. 천검문의 전력 8할이 한 번에 움직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적으로 판단하면 그렇지. 하지만 무림은 말도 안 되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세계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도 빈번하게 있기도 하고.”

의동생이자 부방주인 설규에게 대호방주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 역시 객관적으로는 부방주와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단정 짓지는 않았다.

강호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금 가장 이득을 보는 곳은 청하상단입니다. 몰락하던 게 마치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무섭게 청해성의 상계를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곤륜파를 등에 업고 있으니. 사실 다들 확신을 못해서 그렇지 짐작은 하고 있잖아. 천검문주가 왜 행방불명된 것인지에 대해서. 게다가 지금 청하상단에 눌러 붙어 있는 노인네가 제법이라며?”

“예. 확실하게 무위를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최소 절정고수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정도 실력자가 아니라면 지금까지 청하상단의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최소 절정이라.”

대호방주가 부방주의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초일류와 절정이 고작 한 단계 차이지만 실력 차는 천양지차인 것처럼 절정과 최절정은 또 달랐다.

게다가 현재 태풍의 핵이라 할 수 있는 곤륜파에 속해 있는 무인이었기에 대호방주는 선뜻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 다들 궁금해 할 것입니다. 의문의 늙은이도, 곤륜파도요.”

“가장 큰 의문은 천검문주와 천류검대, 그리고 장로들의 실종이겠지. 잘 죽은 놈들이긴 하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했으니까.”

대호방주가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백운산장을 누르고 청해일패의 권좌에 앉았지만 그렇다고 천검문주처럼 확고하게 입지를 다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확실하게 입지를 다졌던 천검문주도 하루아침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렇기에 대호방주는 청하상단에 자리 잡은 늙은이와 곤륜파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적아를 구분하는 건 수장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그 소문도 청하상단이 흘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천검문의 적은 많았어. 다만 그들의 힘에 짓눌려 있었을 뿐이지. 그리고 천검문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아. 이미 각자도생하려고 뿔뿔이 흩어진 상태니까. 어쨌든 현재 청하상단을 기웃거리는 건 우리와 하오문, 백운산장 정도인가?”

“다들 관심은 가지고 있을 겁니다. 다만 실질적으로 움직이지 않아서 그렇지요.”

“흐으음.”

“한 번 찔러볼까요?”

부방주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 역시 청하상단에 자리 잡은 노도사인지 망나니인지가 껄끄러운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있을 대호방의 행보에 눈엣가시가 될 가능성도 컸고.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단 지금까지는 거슬리는 게 사실이었다.

“어떻게?”

“굳이 저희들이 나설 필요가 있겠습니까? 돈으로는 귀신도 부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흑상(黑商)도 있고 살수들도 있지 않습니까. 살문(殺門)은 힘들겠지만 그쪽에서 두 번째라 할 수 있는 산월곡(散月谷)까지는 가능할 겁니다.”

“호오.”

대호방주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수하들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다른 곳의 손을 빌리는 게 훨씬 깔끔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손을 썼다는 걸 들킬 가능성도 희박했고.

“개인적으로 살수들보다는 흑상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돈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파는 놈들이 흑상이지 않습니까.”

“돈이 많이 들기는 하겠지만 절정급도 움직일 수 있겠지.”

“맞습니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아예 없지는 않아. 괜히 들쑤시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 가장 좋은 건 백운산장이나 하오문이 움직이는 건데···.”

대호방주가 입맛을 다셨다.

둘 다 자금력이 딸리는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먼저 움직일 것 같지도 않아서였다.

일종의 눈치싸움 중이라고나 할까.

두 곳은 아마 자신이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확실하지는 않은데 하오문은 한 번 데인 것 같습니다. 출처가 불분명하기는 한데 이런 소문이 있습니다.”

“그 놈들이야 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니까. 쯧! 그럼 백운산장만 남았나.”

한 번 데였다면 다시는 움직이기 힘들 터였다.

그럼 남게 되는 곳이 백운산장뿐인데 그 영악한 장주가 먼저 움직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백운산장 성격상 먼저 움직일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군. 직접 움직일 수밖에.”

“방주님께서요?”

“정식으로 약속을 잡고 만나는 거지. 어떻게 보면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으니 가장 확실하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안전하기도 하겠네요.”

싸우려고 찾아가는 게 아니라 인사와 친목도모를 위한 자리라면 확실히 안전하기는 했다.

애초에 문파가 아닌 상단이기에 다짜고짜 살수를 뿌릴 가능성도 없었고.

게다가 방문할 명문은 찾아보면 넘치고 넘쳤다.

“인편을 보내 봐. 약속을 잡게.”

“알겠습니다.”

“가급적이면 빨리 보자고 해.”

“예.”

부방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호방주의 지시대로 최대한 빨리 청하상단주와 약속을 잡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부방주가 집무실을 나서자 대호방주가 묘한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접객당에 먼저 자리를 잡은 서일국이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

손님을 기다리며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긴장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현재 청해성의 패권을 잡은 대호방주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서일국은 여유로웠다.

“애가 많이 타겠지. 아무리 파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으니.”

다른 때였다면 갑작스러운 약속에 당황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혼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신감의 근원은 바로 그의 사백조와 사문이었다.

든든하게 등 뒤를 지켜주니 적어도 청해성 내에서는 무서울 게 없었다.

똑똑똑.

사형이자 이제는 장문인이 된 벽우진의 그 특유의 잔망스러운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때 시비가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서일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주님.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뫼시거라.”

“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는 순간 접객당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비가 열어준 문을 지나 대호방주와 부방주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왔던 것이다.

“오랜만에 뵙소이다, 단주.”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방주님.”

“나야 뭐,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소이다. 단주도 잘 알고 있겠지만 말이오.”

“듣기는 많이 들었지요. 일단 앉으시죠.”

부방주에게도 목례를 한 서일국이 자리를 권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제 집 안방인 마냥 편안한 얼굴로 서일국이 앉아 있던 자리 앞쪽에 앉았다.

“늦었지만 축하도 드릴 겸 또 너무 오랫동안 관계가 소원해진 것 같아 단주와 차 한 잔 하려고 연락을 했소이다.”

“감사합니다.”

“얼마 전에는 안 좋은 일도 있었고 말이야. 그래도 잘 해결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오.”

“운이 좋았지요.”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넘어가는 말에도 서일국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친분이 깊지는 않지만 그래도 청해성에서 살면서 오다가다 마주친 적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지금과 같은 위세가 없었지만 말이다.

“강호에서는 운 역시 실력이지 않소이까. 상계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오. 더구나 단주에게는 운이 연속으로 따르고 있으니 앞으로 더욱 번창하지 않을까 생각하오.”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웃고는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떤 검보다 날카로웠다.

미소 속에 칼을 감추고서 서로를 파악하기 위해 연신 눈알을 굴렸던 것이다.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서일국은 여유로웠다는 점이었고, 대호방주는 조금 조급해 보인다는 게 달랐다.

“혹 내 도움이 필요하며 기탄없이 말하시구려. 어떻게 보면 앞으로 청해성의 미래는 우리 두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겠소.”

“허허. 그건 좀 위험한 발언 같습니다.”

“뭐 어떻소. 누가 보더라도 그리 볼 것을.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듣는 것도 아니고.”

대호방주가 호탕하게 웃으며 일부러 보라는 듯이 주변을 훑었다.

이 자리에 세 사람 말고 누가 있느냐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저희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멀기는. 내가 보기에는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소만. 이미 무서울 정도로 성장하고 있지 않소이까. 든든한 지원군도 있고.”

“지원군까지는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사문은 이제 막 일어서는 단계라서요. 제자도 별로 없다기보다는 한 명뿐인 상태이지요.”

“청해일미가 곤륜산에 올랐다는 얘기는 들었소. 장문인의 제자가 되었다고.”

“장문인께서 좋게 봐주신 덕분이지요.”

긴장감이 순간 느슨해졌다.

아무래도 딸 이야기에는 풀어질 수밖에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긴장의 끈을 놓은 건 아니었다.

천검문주가 했던 짓을 대호방주가 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내 듣기로는 막 일어서는 단계는 아니던데. 곤륜파 무인들의 활약이 대단하지 않소. 산적들을 거의 대부분 소탕하기도 했고. 그래서 다들 궁금해 하고 있소이다. 대체 어디서 그런 고수들이 나왔는지 말이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섣불리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시지요.”

“당연히 이해하오. 외부인이 선뜻 물어봐서도 안 되는 문제이기도 하고. 근데 궁금하기는 하오. 청하상단에도 한 분이 계시다고 들어서 말이오.”

대호방주가 드디어 진짜 본론을 꺼냈다.

진구를 직접 봄으로써 곤륜파의 전력을 조금이나마 엿보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진심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대호방주이기도 하지만 한 명의 무인이기도 했으니까.

“제가 모자라서 도움을 주고자 장문인께서 호법님 중 한 분을 보내주셨지요.”

“호오. 호법님이란 말이오? 하긴. 연세가 좀 있다고 듣긴 했소.”

대호방주는 물론이고 부방주도 눈을 빛냈다.

두 사람이 바쁜 와중에 청하상단까지 직접 찾아온 이유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서일국 역시 잘 알고 있었다.

< 제 12장. 말했던 대로.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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