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4화 (34/325)

< 제 11장. 인연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04 >

염탐하듯 청하상단의 장원을 기웃거리는 이들은 시간이 흘러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호방이 백운산장과의 경쟁에서 이긴 후 더욱 심해진 느낌이 들었다.

대호방이 청해성 최고의 문파로 올라서면서 혼란스러웠던 정세가 조금씩 안정이 되자 관심이 서서히 청하상단으로 쏠렸던 것이다.

“내가 활약한 것도 있고. 쯧!”

불평불만을 쏟아냈지만 그럼에도 진구는 벽우진의 지시를 잘 따르고 있었다.

괜히 청하상단의 일에 트집을 잡거나 무력시위를 하는 것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처리했다.

그가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다 보니 어느새 청하상단의 상행에 방해하는 이들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하아암.”

동시에 할 일이 없어진 진구는 매일 이렇게 늘어져 있었다.

대거리를 하는 것들을 짓밟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기웃거리는 놈들이 어서 선을 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눈치가 빠른 건지 조심하는 건지 좀처럼 들어오지를 않았다.

“진 호법님.”

“청범이구나.”

곳곳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시선에 진구가 지겹다는 듯이 하품만 연거푸 할 때 나무 아래로 서진후가 다가왔다.

그러자 진구는 고개만 살짝 숙여 아래를 쳐다봤다.

“본산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장문인한테서? 혹시 복귀하라는 서신이냐?”

“아닙니다. 장문인께서 이쪽으로 오신답니다.”

“그럼 난?”

진구가 대놓고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술도 많고 음식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래도 여기는 남의 집이었다.

아무리 호사스러운 생활을 해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기에 진구는 하루라도 빨리 곤륜산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여기에서 보자고 하셨습니다.”

“허어. 계속 있어야 하는 건가.”

“불편하신 게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냥 곤륜산에 돌아가고 싶어서. 재미있기는 한데 좀 그래. 불편하기보다는 집이 그리운 느낌이랄까. 게다가 거슬리는 것도 많고.”

진구의 시선이 여기저기에서 자신을 힐끔 거리는 무사들에게로 향했다.

대놓고 부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는 시선에 진구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벽우진이 따로 지시한 것을 그는 잊지 않고 기억했지만 그렇다고 재목이 아닌 이들을 데려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확실히 집이 편하기는 하죠.”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여기가 불편하다는 게 아니라.”

“눈에 들어오시는 아이는 없으십니까? 장문인께서도 궁금해 하십니다.”

“아직은.”

진구가 딱 잘라 말했다.

가뜩이나 억지로 이곳에 처박혀 있는데 무재가 뛰어난 아이들까지 찾으라니.

아무리 장문인이라지만 원하는 게 너무 많다고 진구는 생각했다.

패배해서 억지로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말이다.

“그래도 곧 오신다니 이번에는 함께 복귀하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랬으면 좋겠는데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 그렇게 될지 모르겠네. 다른 형님들은 이미 진즉에 복귀했다고 했는데.”

진구가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투덜거리기는 해도, 벽우진을 욕하고 씹기는 해도 자기 할 일은 잊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서진후는 남몰래 미소 지었다.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시겠습니까? 제가 질 좋은 소홍주를 구했는데.”

“오호?”

“딱 한 병뿐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가치 있지 않겠습니까?”

“역시 날 가장 잘 알고 챙겨주는 건 청범 밖에 없어. 장문인이 청범의 딱 반만 닮았어도 내가 이렇게 투덜거리지는 않았을 텐데.”

언제 늘어졌냐는 듯이 진구가 두 눈을 희번덕이며 나뭇가지에서 내려왔다.

이윽고 두 사람이 내원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청해성의 성도인 서녕을 코앞에 두고서 벽우진은 서예지, 비현과 함께 객잔을 잡았다.

어느새 해가 넘어갔기에 무리해서 이동하기보다는 객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려는 것이었다.

“서녕이 가까워서 그런가. 시끌벅적 하네요.”

“낭인들도 많고, 표국들도 자주 왕래하는 마을이니까.”

떠들썩한 객잔 1층의 분위기에 비현이 오랜만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릴 적부터 곤륜산에서 수행을 해온 그에게 이런 소란스러운 광경은 그리 익숙하지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 시끄러운 분위기가 싫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사람 사는 냄새라고도 할 수 있어서였다.

“어서 오십시오!”

“자리는?”

“이쪽으로 오시죠.”

객잔을 둘러보고 있을 때 점소이로 보이는 소년이 다가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눈이 벽안이었다.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놀라기보다는 익숙하게 자리를 묻고는 소년이 안내해주는 자리로 이동했다.

“혼혈인 것 같아요, 사부님.”

“그러게. 저 여아하고 남매지간인 것 같은데.”

범상치 않은 미모 때문에 면사를 쓰고 있던 서예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음식을 나르고 있는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를 힐끔거렸다.

얼굴은 어려 보이는데 혼혈이라서 그런지 키도 크고 성장도 남달랐다.

그리고 그건 곧 남자들의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이야~! 죽이는구만!”

“저 애가 이제 열여섯 살이라고?”

“몸만 보면 스무 살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어후.”

여기저기에서 은밀하게 흘러나오는 음담패설에 서예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자신하고 나이 차이가 얼마 남지 않는 소녀를 가지고 음담패설을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그녀 역시 자주 겪었던 일이었기에 더더욱 남일 같지 않았다.

“어멋!”

“흐흐! 너 나한테 시집오지 않을래? 이런 일 하지 않고 편하게 집에서 살림만 하면 되는데.”

“그, 그만 하세요.”

쟁반을 든 채로 정신없이 손님들 사이를 뛰어다니던 벽안의 소녀가 붉게 변한 얼굴로 장한의 손을 밀었다.

하지만 그녀의 분명한 거절에도 엉덩이를 움켜잡고 있는 장한은 능글맞게 웃기만 할뿐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소녀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뭘 그만해? 응? 제대로 말을 해야 내가 알아들을 거 아냐?”

“푸하하하!”

거나하게 취한 모양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장한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같은 원탁에 앉아 있던 일행들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누구도 소녀의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만 하시죠.”

“뭐야, 넌?”

“남동생입니다.”

“어? 그럼 내 처남이잖아? 근데 넌 매형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 도끼눈 뜨는 거 아니냐? 싸가지 없게 시리.”

짜아악!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장한이 정색을 하며 뺨을 때렸다.

그런데 체격 차이 때문인지 소년이 휘청이다 못해 바닥으로 엎어졌다.

“대현아!”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어? 나에게 잘 보이지는 못할망정.”

“아직 어려서 그렇지, 뭐.”

“어린 게 대수야? 어리면 어른을 공경해야지.”

얼굴에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생긴 남동생의 모습에 소녀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지만 뚱뚱한 객잔 주인은 그 광경을 보고도 모른 척 했다.

이런 일이야 객잔에서 비일비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얼른 주방으로 가.”

“어딜 가? 못 다한 이야기를 마저 해야지.”

일단 누이부터 보내려고 심대현이 다급히 말했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무공을 익힌 것인지 장한이 벼락같이 손을 뻗어 심대혜의 팔뚝을 잡았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세게 잡은 모양인지 심대혜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손···.”

“다 큰 어른이 아이한테 무슨 짓이냐.”

“뭐야?”

고통스러워하는 누나를 떼어내기 위해 나섰던 심대현이 다른 자리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방금 전에 자리를 안내한 면사 쓴 여인이 서릿발 같은 눈빛을 뿌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걸 볼 수 있었다.

“네년은 또 뭐야? 응?”

“년?”

갑작스러운 방해에 짜증이 치솟은 듯 장한이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면사를 쓴 서예지를 보고는 눈을 빛냈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면사를 쓰고 있었음에도, 콧잔등 위와 눈매, 그리고 이마만 봐도 보기 드문 미녀임을 알아차릴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 들뜬 기색은 얼마가지 않았다.

츠츠츠츠!

서릿발 같은 눈빛과 함께 흩뿌려지는 싸늘한 기세에 장한을 비롯한 일행은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삼류가 불과한 그들과는 격이 다른 고수라는 걸 기도만으로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베일 것 같은 서늘한 살기에 장한은 소녀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꺼져. 어깨 위에 있는 돌덩어리를 조금이라도 더 건사하고 싶으면.”

“예, 옙!”

“괜히 다른데 가서 분풀이 하지 말고. 만약 그런 말 들리면···.”

푸스스스···.

장한의 양쪽 어깨에 구멍이 났다.

정확히 원형의 구멍이 어깨에 생겼던 것이다.

보이지도 느끼지도 못했지만 장한을 비롯한 그의 일행들은 확실하게 느꼈다.

이 경고가 결코 장난이 아님을 말이다.

“가,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죄송합니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지풍에 장한과 일행이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그러면서도 계산은 잊지 않는 모습에 벽우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도 없이 나서서 죄송해요, 사부님.”

“괜찮아. 나도 거슬렸으니까. 모든 이를 도와줄 수는 없지만, 눈에 보이는 것까지 좌시할 생각은 없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벽우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할 때 남매가 다가와 인사했다.

만약 서예지가 나서지 않았다면 희롱에서 끝나지 않았을 게 분명해서였다.

그런데 두 남매가 다가오자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손목은 어때?”

“괜찮아요.”

“치료비를 받았어야 했는데.”

“저보다는 대현이가 더 크게 다쳤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 누나. 이틀이면 낫는 상처야.”

걱정이 가득한 누나의 눈빛에 심대현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한쪽 볼이 퉁퉁 부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는 사이 벽우진은 심유한 눈동자로 남매를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이른 새벽 벽우진은 잠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안정적인 수입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돈이 궁핍한 건 아니었기에 벽우진은 통 크게 각방을 잡았다.

1인실 하나 2인실을 잡아도 되지만 이왕 머무는 거 편히 머물 겸 아예 방을 따로 잡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새벽에 홀로 눈을 뜬 벽우진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쓰으윽! 쓰윽!

해가 막 떠오르는 시간임에도 객잔 마당에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어른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작은 인영들이었다.

“부지런하네.”

어제 방에 들어오기 전 조막한 손으로 청소를 하고 침상을 정리하던 두 아이 중 한 명이 형을 따라 빗자루질을 하는 것을 보며 벽우진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열두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의젓하게 형을 도와 일을 하는 걸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시선을 두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진짜 무골(武骨)들이란 말이지. 혈통이 좋아서 그런 건가.”

보기 드문 근골에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그의 심정은 마치 길을 가다가 원석의 금강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색목인의 피가 섞인 혼혈이었지만 벽우진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동자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피부색이 다르다고 같은 사람이 아닌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투욱.

4층이나 되는 높이였지만 곤륜산을 제집처럼 날아다니면 벽우진에게는 별 거 아닌 높이였다.

그렇기에 그는 가볍게 뛰어내려 두 형제의 앞에 내려섰다.

“어?”

“당신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열심히 마당을 쓸던 두 형제가 고개를 돌리며 벽우진을 쳐다봤다.

그 두 쌍의 시선에 벽우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 내 제자 할래?”

< 제 11장. 인연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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