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1장. 인연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03 >
“저희 아이들이 재능이 있을까요? 제가 촌무지렁이라 잘은 모르지만 무공을 익히는 데에도 시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첫 째가 몇 살이죠?”
“올해 열여덟입니다. 둘째가 열다섯이고요.”
“확실히 늦은 편이긴 하네요. 보통 무가에서는 세 살, 네 살부터 내공심법을 익히기 시작하니까요. 하지만 늦은 거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무재 역시 상당한 편이고요. 특히 몸이 좋습니다. 아마도 아버님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 것이겠지요.”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떡 벌어진 어깨하며 탄탄한 몸은 외공을 수련한 무인 못지않았다.
그리고 그 장점은 두 형제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고.
물론 나이가 많다는 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벽우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해당사항이 없었다.
“정말입니까?”
“이런 말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의사겠지요. 또한 아버님의 생각도 그 못지않게 중요할 테고요. 아무래도 무인이라는 게 칼 위에 사는 삶이나 마찬가지니. 도사라도 무공을 익힌 순간 이 숙명은 피할 수 없습니다.”
“으음!”
중년인이 침음을 흘렸다.
어느 직업이든 장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철없는 아이들이야 무인이 되어 명성을 떨치는 협객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일부분에 불과했다.
현실은 어디인지 모를 객지에서 죽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저는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재능이 있어 보이기에 아버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선택지를 하나 더 내드리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안정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면 가업을 잇는 게 맞지요.”
“이 문제는 아이들에게 물어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제 자식들이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언제까지 제가 함께 있을 줄도 모르고요. 게다가 땅꾼이라고 해서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요.”
“그렇죠.”
수많은 독사들을 다뤄야 하는 땅꾼이 위험하지 않을 리가 없다.
게다가 곤륜산처럼 험하고 영험한 산에는 영물에 가까운 녀석들도 많았기에 자만하고 달려들었다가 죽는 땅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때문에 중년인은 위험도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운명은 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남을 죽일 수 있는 의지.’
도사라고 다 똑같은 도사가 아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신선이 되려고 하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한때 명문대파라 불리던 곤륜파의 제자는 달랐다.
도사이되 무인인 만큼 제자가 되려면 그만한 각오가 있어야 했다.
나를 지키고 남을 죽일 수 있는 각오가.
스윽.
중년인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빛으로 두 아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두 소년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덩달아 긴장한 것이었다.
“너희들의 생각을 듣고 싶구나. 특히 일우는 이제 다 컸다고도 볼 수 있으니.”
“저는··· 되고 싶어요. 장남인 만큼 가업을 잇는 게 맞겠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신다면 곤륜파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저, 저도요.”
형의 말에 양이추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그 결정은 결코 생각 없이 한 게 아니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가난이 대물림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였다.
물론 무인이 된다고 해서 형편이 확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있었다.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희박하게라도 가능성이 있는 쪽을 양이추는 고를 생각이었다.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다. 무공을 익히면 남을 죽여야 하는 때가 올 지도 모른다. 정마대전 때처럼. 반대로 죽을 수도 있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반대로 기회이기도 하죠.”
중년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기회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 다 같은 생각이다?”
“예.”
“네.”
양일우와 양이추 형제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 모습에 중년인은 고개를 돌려 벽우진을 바라봤다.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밤은 쉬시면서 아들들과 대화를 나누시지요.”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만.”
“지금은 이렇지만 나중에는 또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더구나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결정인데요. 그러니 신중하게 고민하고 결정을 내렸으면 합니다.”
벽우진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야심한 시각이 되었기에 피해주려는 것이었다.
잠시 후 벽우진이 방을 나섰지만 세 부자가 함께 머무는 방의 등불은 좀처럼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민호가 본가에서 온 서신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아들이 보낸 답장이었는데 역시나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아들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사람의 심보가 상대방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이득을 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흐으음.”
게다가 성과를 직접 본 그와 달리 가주는 설명을 들은 게 다였기에 더더욱 체감되지 않을 터였다.
아니, 가치는 알더라도 사천당가의 기술을 전해주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차라리 깔끔하게 돈으로 사면 모를까.
“문제는 그걸 나도 알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점이지.”
영단의 가치는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도 알고 있고 벽우진도 알고 있으며 당소윤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간극을 좁히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목도했기에 당민호는 영단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막막하군.”
친구라는 이유로 부탁하기에는 영단의 가치가 너무나 컸다.
그리고 벽우진이나 되는 강자와의 인연을 영단으로 맞바꾸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고.
때문에 당민호는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도 일단은 부딪쳐 봐야지. 시간이 없으니.”
당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틀 뒤에 벽우진이 서예지, 비현을 이끌고 서녕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당민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 역시 언제까지 곤륜파에 머물 수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똑똑똑.
“어, 들어와.”
“안 바쁘냐?”
“늘 바쁘지. 다만 시간을 쪼개서 청민이랑 예지, 그리고 새로 들어온 애들 봐주는 거지.”
“나도 애들 봤다. 근골이 나쁘지 않던데? 나이가 좀 걸리긴 하지만 너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고.”
자연스럽게 옥청궁을 찾아와 자리에 앉는 당민호를 벽우진은 지그시 쳐다봤다.
물론 쓰던 무공서를 덮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른 무공도 아니고 곤륜파의 절학인 만큼 외인에게는 절대 보여줄 수 없었다.
“다 이 몸이 잘난 덕분이지. 성정과 자질만 있다면 나머지는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
“흠흠! 그래서 말인데 영단 있잖아. 비천단(飛天丹)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이름을 붙였지.”
“내 얼굴을 봐서 하나만 팔면 안 되냐?”
“소윤이한테 주려고?”
벽우진의 말에 당민호가 살짝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게 보면 체면을 구기며 부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맞아.”
“하나만이라. 당가주하고 얘기가 잘 안 된 모양이구만.”
“···그렇게 됐다. 아무래도 믿기 힘든 이야기니까.”
“그게 아니라 당가의 기술이 외부에 알려지는 게 싫은 거겠지. 비천단의 효능은 놀랍지만 당가의 기술력에 비하면 부족하다 여긴 것이겠지.”
쟁점을 정확히 짚는 말에 당민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문제는 벽우진 역시 비천단을 그리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맞아. 그래서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나도 나름 성의를 준비했다.
스윽.
당민호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다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백색의 종이를 벽우진 쪽을 향해 밀었다.
“뭐야?”
“내 비상금이자 전 재산.”
“금와전장 전표네?”
“두 개 달라고는 말하지 않으마. 딱 하나만. 한 개만 부탁한다.”
당민호는 자질구레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내밀 수 있는 가장 큰 패를 내밀었다.
산적들을 털고 있기는 하지만 안정적인 수입원이 아직은 딱히 없는 곤륜파이니만큼 큰돈이 아무래도 필요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앞으로는 제자들이 늘어나기도 할 테고 말이다.
“돈 먹고 떨어져라?”
“말을 해도 왜 그렇게 말해? 사람 민망하게.”
“뜻이 그렇잖아.”
“그럼 폭우이화침(暴雨梨花針)은 어때? 천뢰구(天雷球)나. 당가의 비전암기들인데.”
당민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두 가지 암기 모두 외부유출을 극히 조심하는 비전암기들이었지만 맞바꾸는 물건이 비천단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더구나 이 두 가지 암기들의 경우 그 혼자만의 판단으로 결정할 수 있기에 당민호로서는 오히려 더 좋았다.
“둘 다 어차피 1회용이잖아. 별로 관심 없어.”
“으음. 만약이긴 하지만 소윤이가 환골탈태를 하면 가주도 생각이 달라질 수 있어.”
“본보기로 쓸 수도 있다?”
“글로 설명 듣는 거랑 직접 보는 것은 아무래도 다르니까. 표본이 늘어나는 것이기도 하고. 솔직히 성공한 건 한 명뿐이잖아.”
“그렇게 말하니까 장사꾼 같은데?”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지금 모습에서 당민호가 얼마나 간절해하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게다가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는 또 아니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턱을 쓰다듬었다.
“너는 모를 거다. 손녀가 어떤 의미인지를.”
“나야 모르지. 삼처사첩을 거느렸던 너와 달리 난 지금도 동정인데.”
“혹시 동자공이냐?”
“그건 아니고. 참고로 곤륜파 무공 중에 동자공은 없다.”
벽우진이 정색하듯 말했다.
소림사라면 모를까 곤륜파에 동자공 같은 끔찍한 무공은 없었기 때문이다.
“뭘 그리 정색해. 아니면 아닌 거지. 혹시 금액이 부족하면 더 마련할 수 있다.”
“엄청 지르네.”
“그만큼 해주고 싶어서 그렇다.”
당민호가 체면도 잊고서 말했다.
사천당가의 태상가주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한 명의 할아버지였다.
손녀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흐으음.”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갔기에 벽우진이 살짝 흔들리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당민호가 내민 전표에 마음이 흔들렸다.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벽우진조차 깜짝 놀랄 만한 금액이 적혀 있어서였다.
역시 오대세가의 한 곳다운 배포라고나 할까.
“진짜 어떻게 안 되겠냐? 딱 하나만.”
“하나 정도는 어렵지 않지만, 좀 아쉽네. 내가 원한 건 돈이 아니었는데.”
“따로 원하는 건 없고?”
“생각 좀 해보고.”
벽우진이 뜸을 들였다.
어쨌거나 칼자루는 자기가 쥐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기관진식까지 굴러 들어올지 몰랐다.
“으하아암!”
해가 중천에 떠 있건만 여전히 잠이 깨지 않은 얼굴로 진구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런데 그가 있는 위치가 범상치 않았다.
크게 자란 나뭇가지 위에 옆으로 누워 있었던 것이다.
“차합! 합!”
“기합소리가 작다! 더 크게!”
손을 베개 삼아 늘어지게 누워 있던 진구의 시선이 근처에 있는 연무대로 향했다.
모여 있는 인원만 백여 명이 넘어서 그런지 터져 나오는 박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열의 넘치는 무사들의 연공에도 불구하고 진구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지겹네.”
벽우진의 지시로 청하상단에 온 진구의 하루 일과는 단순했다.
밥 먹고 술 마시며 자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물론 무공수련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곤륜산에서 수행할 때처럼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술이라도 있으니 버티지 술마저도 없었으면.”
진구가 입맛을 다셨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났지만 벌써부터 술이 당겨서였다.
한데 귀찮은 기색이 다분한 표정과 달리 진구의 눈동자는 몇 번씩 날카롭게 번뜩였다.
‘쥐새끼들이 더 늘어난 것 같단 말이지.’
< 제 11장. 인연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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