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1장. 인연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02 >
‘이건 불공평해···.’
당소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마어마했던 격차가 단 하루 만에 한 뼘도 안 되게 좁혀졌다.
물론 무경이라는 게 단순히 내공만으로 우열을 가릴 수는 없었다.
내공이 적더라도 얼마든지 승패를 뒤집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공이 많으면 많을수록 대결에 있어 유리하다는 점이었다.
“하앗! 합!”
벽우진이 직접 사사한 옥심정양의귀일검법(玉心正兩儀歸一劍法)의 전반부를 펼치며 서예지가 기합을 넣었다.
이제 막 첫 발을 뗀 수준이라 아직은 성취도가 극악할 정도로 낮았지만 그럼에도 서예지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무공에 갓 입문한 자신이 처음부터 잘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예지는 꾸준히, 끊임없이 수련하는 것만 떠올랐다.
‘열심히 노력하면 강해질 수 있어.’
낮은 수준의 검공도 아니고 곤륜파의 절학이라 할 수 있는 무공이 바로 옥심정양의귀일검법(玉心正兩儀歸一劍法)이었다.
더구나 옥심정양의귀일검법(玉心正兩儀歸一劍法)과 짝을 이루는 옥심귀일공(玉心歸一功)을 익힌 상태였기에 서예지는 온 정신을 검과 육신에만 집중했다.
당소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꾸욱!
그런데 그 모습이 당소윤에게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더불어 난생처음으로 자격지심을 느꼈다.
사천당가의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무엇 하나 부러워하거나 질투해본 적이 없지만 지금은 달랐다.
“많이 부러운 모양이구나.”
“···할아버지.”
“허허허.”
당민호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수련에 매진하는 서예지를 지그시 바라봤다.
검형(劍形)만 가까스로 따라가는 투박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이었으나 두 눈에 서린 굳은 의지는 그녀가 지금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말해주었다.
또한 자질 역시 나쁘지 않았기에 빠른 시일에 성취를 보일 터였다.
‘그래서 조급증을 느끼는 것이겠지.’
당민호는 손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없이 아래라고 봤었던, 경쟁자라고 생각도 하지 않은 이가 빠르게 자신을 쫓아오는 게 어떤 두려움을 주는지 그 역시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하지만 무인인 이상 그 부담을 견뎌내야 했다.
자신이 따라잡으려는 자 역시 이와 같은 부담감을 느끼면서 수련에 매진할 테니까.
“많이는 아니에요. 전 사천당가의 여식이니까요.”
“부럽기는 한 모양이구나.”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요. 분하기도 하고요. 제가 그동안 했던 노력이 헛된 것처럼 느껴져서요.”
“다른 후기지수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군소세가들의 자제들 말이다.”
당민호가 냉정하게 말했다.
한 번 정도는 이런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었기에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깨달음이 손녀에게 좋은 거름이 될 거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물론 당사자에게는 더없이 아픈 말이겠지만.
“···그렇겠죠.”
태어나자마자 벌모세수를 받고 군소방파나 무가들과는 비교도 하기 힘든 절학을 배운다.
단지 사천당가의 직계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말이다.
이렇게 따지면 사실 당소윤은 남을 부러워할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은 늘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자를 보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너에게는 내가 있지. 그리고 가문이 있고.”
“할아버지?”
“기다리거라. 내가 어떻게든 담판을 지을 터이니.”
“쉽지 않아 보이던데요?”
당소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가 본 벽우진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수십 년을 보내서 그런지 좀 많이 괴짜스러웠다.
“원래 살아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저 아이를 부러워하는 것에만 맞추면 안 된다.”
“죄송해요. 열심히 노력할게요.”
“그래. 그거면 되었다. 네가 무공을 익히기로 마음먹은 때를 잊지만 않으면 된다.”
“네.”
당소윤이 초심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더 이상 그녀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조부가 하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당소윤은 믿었다.
“흐으음.”
옆에서 떨어져 한 연무장의 한 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고서 몸을 풀기 시작하는 손녀를 일별한 당민호가 무아지경에 빠진 듯 오로지 검 끝만 바라보면서 무공수련에 매진하는 서예지를 조금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손녀에게는 호기롭게 말했지만 사실 조금 막막한 게 사실이었다.
그 정도로 벽우진이 내건 조건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분명 천금에 가까운 가치가 있는 게 영단이었지만 가주인 아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었으니까.
“일단 해보는 데까지는 해봐야겠지.”
당민호가 묘한 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에 벽우진은 뒷짐을 지고서 산책에 나섰다.
오랜만에 쏟아지는 빗줄기에 묘한 감상에 빠져 곤륜파 곳곳을 돌아다녔던 것이다.
“비도 참 오랜만이네. 동굴 속에서는 눈비는커녕 계절감도 느낄 수 없었으니까.”
촉촉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벽우진이 미소를 지었다.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었던 시공간의 진과 달리 곤륜산은 너무나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는데 확실히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지 벽우진은 하루하루가 너무나 새롭고 소중했다.
“이것도 나름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겠지. 소소한 게 어쩌면 진짜 소중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뒷짐을 진 채로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 자신이 내뱉은 말에 만족한 듯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음?”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곤륜산의 웅장하면서도 음험한 모습을 음미하던 벽우진이 산문 쪽에서 느껴지는 세 개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호법들의 활약으로 곤륜파가 다시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사당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늦은 시각에 찾아오는 이는 없었기에 벽우진이 살짝 의아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안녕하십니까.”
“예.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신지요?”
형제로 보이는 두 아들과 함께 산문 쪽으로 걸어오던 중년인이 갑자기 나타난 벽우진의 모습에 살짝 놀라며 포권을 해왔다.
도복을 입고 있는 벽우진의 모습에 당연히 도사이겠거니 싶어 포권을 한 것이다.
그러자 십대 중반, 초반으로 보이는 두 아이 역시 어색하게 부친을 따라했다.
“그게,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요. 저 혼자면 그냥 내려가겠는데 아무래도 아이들이 있다 보니 잠시 비를 피하고자 염치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밤의 산은 정말 위험하니까요. 더구나 비도 오니.”
산문까지의 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고 하나 그래도 어둠이 내린 산길은 위험했다.
더구나 비까지 오는 상황이었기에 벽우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들어오라는 듯이 세 사람에게 손짓했다.
“잠시 비만 피하고 가겠습니다.”
“본파는 그렇게 야박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사람이 없어 좀 을씨년스럽기는 하지만 그렇기에 하룻밤 정도는 편안하게 머물 수 있죠.”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뱀을 자유롭게 풀어놓은 건 안 됩니다.”
벽우진의 시선이 중년인의 망태기로 향했다.
그 안에는 아직 살아있는 뱀들이 담겨 있어서였다.
땅꾼에게 잡혔기에 지금은 얌전히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몸에서 떨어진 순간 마음대로 날뛸 게 분명했다.
“놓아주겠습니다.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생계인데 그럴 수 있나요. 다만 빠져 나오지 못하게 조치만 취해주시죠.”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년인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천한 땅꾼이기에 문전박대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이렇게 따뜻하게 맞아주니 너무나 고마워서였다.
더구나 아들들까지 있었기에 그는 더욱더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사해는 동도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서로 돕고 살아야죠.”
벽우진의 시선이 중년인을 넘어 두 소년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눈이 묘하게 반짝였다.
또르륵.
세 부자가 따뜻한 물에 씻고 나오자 벽우진은 그 순간에 맞춰 차를 따랐다.
빗줄기가 제법 거센 만큼 아무리 따뜻한 물로 씻었다고 하나 몸속은 또 달랐기에 뜨끈한 차를 준비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별말씀을.”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복을 입고 있었기에 당연히 도사일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하니 장문인일 줄은 몰랐기에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그런데 그건 두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친절한 도사라고만 생각했는데 장문인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해서였다.
“가,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부친을 따라하듯 공손히 고개 숙여 말하는 두 형제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벽우진이 물었다.
그러자 중년인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비를 피하기 급급한 나머지 저녁을 제 때 먹지 못해서였다.
“육포가 있는데 그거라도 드릴까요?”
“그럼 아이들 것만이라도···.”
자신은 한 끼 정도야 굶어도 상관없지만 한창 성장기인 두 아들은 달랐다.
때문에 중년인이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양은 넉넉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은 저희도 인원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요.”
벽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리 언질을 받은 서예지가 육포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벽우진은 육포만 말했는데 서예지는 언제 준비한 것인지 계란탕도 하나 끓여서 가져왔다.
“우와···.”
“서, 선녀다···.”
밤중이기에 가벼운 경장차림으로 쟁반을 들고서 방 안으로 들어오는 서예지의 모습에 두 형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미녀를 본 적이 없어서였다.
그래서인지 두 형제는 좀처럼 서예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고마워.”
“지, 진짜 선녀세요?”
“안타깝게도 아니란다. 자, 얼른 먹어. 배 많이 고팠을 텐데.”
“늦은 시간에 미안해.”
두 형제들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서예지가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벽우진이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보면 쉬고 있을 때 일을 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청하상단의 금지옥엽을 말이다.
“아니에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지금은 제가 막내잖아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말해주세요.”
“오늘은 이 정도면 된 거 같아.”
벽우진의 말에 세 부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육포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뜨끈한 계란탕까지 있었다.
세 부자는 여기서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고생했어.”
벽우진의 손 인사에 서예지가 곱게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그러자 세 부자가 허겁지겁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흐음.’
그리고 그 모습을 벽우진이 조용히 지켜봤다.
정확하게는 두 형제를 말이다.
“아이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정확하게는 아버님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혹시 아이들을 무인으로 키우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무···인이요?”
“예.”
중년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진심으로 놀란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정신없이 육포를 뜯던 두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저기 곤륜파의 제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제가 장문인이니까요. 아, 그렇다고 무조건 도사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속가제자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다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은 아무래도 진산제자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본파는 진산제자라고 해서 혼례를 올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벽우진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이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그 생각이 맞은 모양인지 두 형제가 눈을 반짝였다.
< 제 11장. 인연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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