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1화 (31/325)

< 제 11장. 인연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01 >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으나 정작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다탁 위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가 내려놓기만을 반복했다.

“흠.”

시원한 냉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당민호가 벽우진을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도 벽우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끄응!’

그 모습에 당민호의 속이 타들어갔다.

자신이 독대를 청한 만큼 넌지시 운이라도 띄워 좋으면 좋으련만 정작 벽우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마도 그 가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뜸을 들이는 것이리라.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 거리기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서로 편하겠지?”

“에둘러 말할 필요가 있나. 네가 원하는 게 딱 보이는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약발?”

벽우진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농담은 절대 아니었다.

약발이란 표현이 틀린 건 아니었으니까.

“영약이 그렇게 쉽게 발견될 리가 없잖아?”

“여기는 중원에서도 영험하다고 소문난 곤륜산인데? 중원도맥의 발상지이자 한 때는 최고봉의 자리에 있던 산이야.”

“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상고무림 때부터 영초와 영물을 찾아 중원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게 바로 무인들이다. 그런데 서예지를 환골탈태 시켜줄 정도의 영약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물론 하늘이 내려주는 인연이 닿는다면 구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 절묘한 시기에 그 인연이 닿는다고?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게 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

“안 될 것도 없지. 이 세상에 절대적이라는 건 없잖아? 우연에 우연이 겹칠 수도 있지. 혹시 알아? 하늘이 날 불쌍히 여겨 이런 은혜를 내려주셨을지? 원시천존께서 날 너무나 아껴서 도움을 주려는 것일 수도 있고.”

당민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거였으면 굳이 곤륜파에 멸문지화라는 시련을 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너 혼자 써서 너 혼자 봐라.”

“믿기 싫으면 믿지 말던가. 난 너보고 믿으라고 한 적 없다.”

“정말 이럴 거냐?”

“너야말로 양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니냐? 남의 집에 와서 밑천을 달라고 하는 건 도둑놈 심보야.”

당민호가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그가 강하게 요구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이가 자신에게 당가의 진신절기를 가르쳐달라고 하면 그는 하독부터 할 터였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저자세로 눈치 보며 묻고 있는 거잖아? 다 늙은 노구를 이끌고서.”

“노구는 무슨. 지금도 마두들 몇 백은 그냥 때려잡을 것 같은데. 그리고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너나 나나 같은 나이야.”

“신체 나이가 다르잖아!”

“그럼 너도 반로환동 해. 지금부터 노력하면 그래도 10년 안에는 가능하지 않겠어?”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남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보다 스스로 이루려고 노력하는 게 골백번은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렇다고 당민호에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고.

“후우!”

“한숨 쉬지 마라. 복 달아난다. 정 한숨 쉴 거면 네 집에 가서 해. 이제 막 일어서는 본파에서 하지 말고.”

벽우진이 진심을 담아서 손을 크게 휘저었다.

겨우겨우 들어오고 있는 복이 혹시라도 당민호의 한숨에 놀라 도망칠까봐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당민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 서로 솔직해지자. 하나씩 주고받는 걸로. 어때?”

“난 받고 싶은 게 딱히 없는데?”

“···당가에 원하는 게 그렇게 없어?”

당민호가 살짝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봉문을 했다지만 그래도 강호에서 명망 높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가문이 바로 사천당가였다.

그런데 벽우진의 지금 모습을 보면 딱히 그런 위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독이나 암기가 있어 봤자 뭐해? 우리는 쓸 사람이 없는데.”

“그러니까 더 효과적이지 않겠어? 수적 열세를 뒤집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패가 독이랑 암기인데.”

“그 정체성은 너희 가문에게 양보할게.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싸워나갈 거야. 바로 나처럼.”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데.”

이번에는 당민호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정정당당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벽우진하고는 어울리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두들겨 패는 쪽이라면 모를까.

“그럼 말고.”

“호법이라는 그 사람하고 연관이 있는 거지?”

“그 분에게 물어보던가.”

“끄응!”

당민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진즉에 찾아가서 물어봤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비현이라 밝힌 호법은 절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문내기밀이라면서 말이다.

“너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잖아? 근데 왜 그렇게 알아내려고 해? 알아낸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데.”

“거래하자.”

“내가 왜?”

어느 정도, 진짜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말해주었던 벽우진이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팠다.

안달복달하는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굳이 사천당가와 거래를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민호야 그의 친우이고 생각보다 많이 변하지 않았다고 하나 그건 그 혼자 만이었다.

사천당가의 입장은 엄연히 다를 게 분명했다.

최소한 적은 아닐지 모르나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우군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퍼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진짜 원하는 거 없어?”

“흐음. 하나 있기는 한데. 내가 너무 손해 보는 장사라. 넌 두 개를 원하는데 난 하나만 받는 거잖아. 가뜩이나 내 물건의 가치가 훨씬 더 높은데.”

벽우진이 장난스럽게 빈손에 무언가를 쥔 것처럼 손을 오므리고서는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그런데 그 모습에 당민호의 동공도 흔들렸다.

왜냐하면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나도 두 개를 저울 위에 올려놓지!”

“남아일언?”

“중천금!”

당민호가 과감하게 내질렀다.

지금은 득실을 따질 때가 아니라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원하는 걸 얻어야 할 때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칼자루를 벽우진이 쥐고 있는 만큼 그로서는 어쩔 수 없이 저자세로 나가야만 했다.

“알고 싶은 거 물어봐.”

“첫 번째는 두 사람을 어떻게 한 거야?”

“직접 제조한 영단의 약력으로. 물론 단순히 영단만으로 그런 성과를 거둔 건 아니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지.”

“역시.”

시원스럽게 터져 나오는 대답에 당민호가 이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특히 당민호는 영단이라는 두 글자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내가 요구할 차례인가.”

“그래.”

“당가의 비전 요상약을 줘.”

“흠!”

“참고로 들은 이상 거절할 명분은 없다는 거 알지?”

당민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단순히 요상약을 원하는 것이라면 몇 개 정도는 친우로서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곤륜파에 영단(靈丹)을 제조할 정도의 실력 있는 연단가가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요상약과 영단의 제조방식은 엄연히 다르지만 그래도 연단가인 만큼 어느 정도 의술에 대한 조예가 있을 게 분명했다.

“조율할 수도 있지 않나?”

“특급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래도 중간 정도는 줘. 하급은 좀 그렇잖아? 내 체면도 있는데.”

벽우진이 이 정도는 양보해 주겠다는 듯이 말했다.

괜한 욕심은 부리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당민호는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적당하네.”

“장난질은 치지 말고. 다 아는 사이에 말이지. 만약 장난질 치면 손모가지 날아갈 각오해야 할 거야. 내가 직접 사천당가에 갈 거니까.”

“네 마음대로 하기 힘들 걸?”

“글쎄. 과연 그럴까?”

벽우진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별 거 아닌 말일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불안감이 엄습해와서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머리를 흔들어 그 불안감을 털어냈다.

“두 번째는 우리 소윤이도 해줄 수 있냐? 아니면 영단을 주던가.”

“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감당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내가 찾은 방식은 강제로 환골탈태를 이루는 거라. 그리고 영단의 값어치에 대해서는 알고 말하는 거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면 되잖아.”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지. 당가의 기술력으로 기관진식 하나를 만들어 줬으면 해. 천혜의 요새처럼. 여기 곤륜산에.”

“으음!”

당민호가 침음을 흘렸다.

보통의 제안을 하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도 일은 아무리 그가 태상가주라도 함부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기술을 빼먹겠다는 뜻이 아냐. 만들어달라는 거지. 더불어 관리하는 방법도 좀 알려주고. 그래야 고치든지 아니면 보수하든지 할 거 아냐?”

“······.”

“이 정도는 힘든가?”

“가주하고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

“뭐, 나는 이쯤에서 끝내도 상관없어.”

벽우진이 아쉬울 거 없다는 듯이 말했다.

영단에 들어가는 약초와 노력을 생각하면, 그것도 외인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임을 생각하면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어서였다.

물론 당민호의 입장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차라리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결과를 봤기에 당민호로서는 영단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짜로 줄 수는 없지. 내가 어떻게 모셔온 호법인데.’

사문의 보물이자 곤륜산의 신물인, 어쩌면 인세에 존재하는 것조차 의문이라 할 수 있는 일월쌍환의 권위를 이용해 곤륜파로 데려온 인물이 바로 비현이었다.

비록 실질적인 무력은 형편없을지 모르나 그가 지니고 있는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그런 인물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든 것이 바로 영단이었다.

벽우진은 그렇게 힘들게 만든 영단을 결코 헐값에 넘겨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조금만 시간을 줘.”

“결정을 최대한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나나 호법이 언제까지 곤륜산에 있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재료도 무한하지는 않다고. 무슨 뜻인지 알지?”

“잘 알지.”

당민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은 주인이 없지만 곧 생길 거라는 말을 그가 알아듣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벽우진이라도 외인이라 할 수 있는 사천당가보다는 사문의 제자들 먼저 챙겼을 테니까.

“그럼 됐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게야.”

당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서 결정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전서구로 보낼 서신을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당민호가 빠르게 옥청궁을 벗어났다.

과거에는 곤륜파의 일대제자들이 수련 장소로 사용했던 연무장에 도착한 당소윤이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먼저 와서 몸을 풀고 있는 서예지를 쳐다봤다.

원래부터 백옥처럼 새하얗던 피부는 더욱 고와져서 빛이 나고 몸매는 더욱 두드러진 모습에 질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무공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당소윤 역시 여자였다.

하지만 외모적인 부분보다 당소윤을 더 질투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서예지의 눈부신 발전속도였다.

‘말도 안 된다고.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서예지는 내공이 제법 탄탄한 삼류무사의 수준이었다.

실전이었다면 삼류무사 한 명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할.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움직임은 물론이고 휘두르는 검초의 격이 달라졌다.

몸이 달라진 만큼 그녀의 무공수준 역시 일취월장했던 것이다.

츠츠츠츠!

거기다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날카로운 검기는 당소윤이 지금까지 수련한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영단의 힘으로 삼류에서 순식간에 절정에 오른 모습에 그녀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노력하고 노력해서 얻은 경지를, 디딘 경지를 서예지는 영단과 벽우진이라는 둘의 힘으로 너무나 쉽게 올랐다.

< 제 11장. 인연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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