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30화 (30/325)

< 제 10장. 초단기육성계획. -04 >

‘나도 강해질 수 있어.’

서예지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당민호와 당소윤과 달리 그녀는 오늘 아침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청민이 멀쩡히 앉아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는 건 한 가지를 뜻했다.

아니, 저 변화를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바보였다.

‘다음은 나야.’

서예지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역시나 그를 따르기로 한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빠인 서현기는 너무 모험적이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시작하는 단계인 만큼 힘들기는 하겠지만 그렇기에 얻을 수 있는 것들 역시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도 강해질 거야.’

서예지의 눈빛이 굳건해졌다.

천검문주를 가볍게 제압하고 만천독황 당민호에게서도 승리를 따낸 고수가 그의 사부였다.

그렇기에 서예지는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그녀만 잘하면 되었으니까.

“흐으음.”

한데 그런 그녀를 당소윤이 묘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들뜬 기색이 엿보여서였다.

특히 무언가 알고 있는 듯했기에 당소윤은 고양이 눈을 하고서 히죽 웃었다.

나이는 비슷할지 모르나 사람을 다루는 기술은 자신이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당소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서예지는 자신을 대하는데 있어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었다.

그런데 벽우진과 당민호의 비무 이후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자신을 더 이상 어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치잇!”영리한 그녀가 그 이유를 모를 수가 없었기에 당소윤은 자기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정작 그녀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부인 당민호는 벽우진과 청민을 달달 볶느라 정신이 없었고, 서예지는 딴 생각에 빠져 있었으니까.

‘다 마음에 안 들어.’

곤륜산에 온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한 건 또 아니었다.

일단 이곳에서는 그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떠나자고 조를 수도 없는 게 현재의 상황이었다.

신비롭고 흥미로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가주전에 앉은 당문경이 손가락을 두드렸다.

하나뿐인 딸이 보내온 전서구에는 정말 충격적인 소식이 담겨 있어서였다.

그렇기에 그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당소윤이 보낸 서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버지께서, 패배하셨다고? 만천독황이라 불리는 아버지께서?”

몇 번이고 강조하는 사실에도 당문경은 선뜻 믿기지가 않았다.

천년마교의 그 어떤 공세에도 의연히 최전방을 맡았던 이가 당민호였다.

또한 지금의 사천당가를 만든 인물이 그의 부친이었고.

때문에 당문경은 딸이 직접 작성한 서신을 봤음에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곤륜파 장문인이라.”

그렇기에 그는 부친의 패배에 대해서는 생각을 멈추고 새로운 인물에 집중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친을 쓰러뜨렸다는 존재에 궁금증이 생기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곤륜파가 있는 청해성과 사천성은 인접해 있었다.

“아버지와 친구사이란 말이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진에 갇혀 겉모습은 약관 정도라.”

당문경이 턱을 쓰다듬었다.

곤륜파는 여러모로 사천당가와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천년마교의 침공 때 가장 앞장서서 싸운 것도 같았고, 큰 피해를 입은 점도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흐으음.”

멸문지화를 입었다가 이제 막 재건을 시작하는 곤륜파와 달리 사천당가는 정마대전 전의 전력을 대부분 복구한 상태였다.

그런 만큼 두 곳을 같은 선상에 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사실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곤륜파의 장문인이 부친보다 고강하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고민되는군.”

당문경이 진심으로 고민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시선에는 제갈세가에서 보내온 서신이 놓여 있었다.

물론 괘씸죄가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가주로서 감정만 앞세울 수도 없기에 당문경은 어느 정도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굳이 어느 한 쪽을 택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정말 의외이긴 하군. 아버지 말씀으로는 기재이기는 해도 천재는 절대 아니라고 했었는데.”

당문경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붓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새하얀 종이 위로 먹물을 가득 머금은 붓이 노닐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서예지는 목욕재계를 하고서 무복을 곱게 차려 입은 다음에 옥청궁으로 향했다.

바로 오늘 그녀가 청민에 이어 영단을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예지는 평소와 달리 사뭇 긴장한 얼굴로 옥청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스윽.

한데 옥청궁으로 걸어가던 서예지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제 하루 종일 시달렸던 걸 생각하면 당소윤이 몰래 자신의 뒤를 밟아도 이상하지가 않아서였다.

‘물론 내 실력으로 당 소저의 기척을 잡아내는 건 불가능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비현이 제조한 영단은 어떻게 보면 천고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아주 중요한 내부기밀이기도 했고.

아마 알려지면 비현을 노리는 자들이 한둘이 아닐 터였다.

때문에 서예지는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면서도 주변을 살펴보는 걸 잊지 않았다.

“왔느냐.”

“예. 사부님.”

“너무 걱정할 거 없다. 따라오는 이는 없으니까. 둘 다 처소에 있어. 잠을 자는 건 아니지만. 아마 내 눈치를 보는 것이겠지.”

조심스럽게 장문인 전용연공실로 들어오는 서예지를 바라보며 벽우진이 씨익 웃었다.

그 말에 서예지가 안도했다.

다행히 꼬리를 밟히지는 않은 것 같아서였다.

“다행이에요.”

“녀석.”

혹시라도 자신으로 인해 난처한 상황이 생길까 걱정하는 서예지의 모습에 벽우진이 피식 웃고는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여주는 것이었다.

그러자 서예지의 표정 역시 한결 편해졌다.

“예지 왔구나.”

“안녕하세요.”

“허허허.”

깍듯한 서예지의 아침인사에 청민이 손녀를 바라보는 듯한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건 곁에서 함께 인사를 받던 비현도 마찬가지였다.

“준비는 다 되었지?”

“예. 각오하고 왔어요.”

“너무 긴장하지는 말고. 청민이 멀쩡한 거 보이지? 조금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죽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고수가 될 수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감내할 자신이 있어요, 사부님.”

서예지가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힘이 없는 약자의 삶이란 게 어떤 것인지 너무나 처절하게 느꼈었기에 그녀는 설사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있더라도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야. 역시 내 제자답다.”

“아직은 부족합니다.”

“의지가 중요한 거야. 실력은 부가적인 문제지.”

스윽.

벽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현이 다가와 목궤를 내밀었다.

바로 어제 청민이 받았던 목궤와 똑같은 크기였다.

다만 향이 조금 달랐다.

“진맥부터 하시죠.”

“예.”

청민과 마찬가지로 목궤를 벽우진에게 건네고서 비현이 손을 내밀었다.

영단을 먹기 전 몸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서예지 역시 망설이지 않고 팔을 내밀었다.

“어떤가요?”

“아주 좋구나.”

“후우!”

살짝 긴장했던 서예지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비현은 부드럽게 웃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작하자.”

“네.”

비현이 건넨 목궤가 드디어 서예지의 손으로 건너갔다.

분명 작은 크기이건만 왠지 모르게 무겁게 느껴지는 목궤를 두 손으로 잡고서 서예지가 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결의의 찬 눈으로 목궤를 열었다.

달칵.

이윽고 굳게 닫힌 목궤가 열렸다.

그리고 서예지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작은 목궤가 열리는 순간 상쾌하면서도 그윽한 향이 순식간에 석실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향이 좋지?”

“네. 향만 맡아도 몸이 맑아지는 느낌이에요.”

“하지만 진국은 먹었을 때 드러나지. 이제 그만 삼켜.”

벽우진의 말에 서예지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영단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러자 향긋한 풍미가 입 안 가득 차올랐다.

“읍!”

하나 그 상쾌함은 잠시뿐이었다.

청민이 느꼈던 그 지독한 쓴맛이 이내 그녀의 혓바닥을 강타했다.

“시작했네요.”

“맛이 그렇게 심각합니까?”

“완전요.”

청민이 정색하듯 말했다.

앞에 있는 비현이나 벽우진은 절대 모르겠지만 그는 불과 하루 전에 먹었기에 아직도 뇌리에 생생했다.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 맛이 말이다.

스윽.

그런 청민의 모습에 벽우진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이제부터는 두 사람이 굳이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민이야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지만 내공의 토대가 탄탄하고 어린 서예지는 비술로 인해 환골탈태를 이룰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호법을 서줄 사람은 한 명이면 충분했다.

-조심하십시오, 사형.

-걱정마라. 첫 번째도 아닌데. 나가서 기대나 하고 있어. 어쩌면 너보다 더 강해질지도 모르니까.

-아직은 따라잡힐 생각이 없습니다.

청민이 웃으며 말했다.

새로운 곤륜파의 첫 번째 제자라 할 수 있는 서예지가 강해지는 건 그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따라잡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그는 곤륜파의 하나뿐인 장로였기 때문이다.

-더 분발하도록. 이제는 삭신이 쑤신다는 변명도 할 수 없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모든 환경이 갖춰졌다. 강해지지 않으면 네가 게으른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을 끝으로 청민과 비현이 연공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서예지의 전신에서 약력이 폭발했다.

드디어 영단의 기운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턱!

동시에 벽우진의 신형이 서예지의 등 뒤로 날아가 명문혈에 양손을 포갰다.

‘시작해볼까.’

팔딱팔딱 날 뛰는 영단의 약력을 느끼며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그래도 어제 한 번 해봤다고 영단의 기운이 날뛰었음에도 크게 긴장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만약 서예지가 잘못되면 서진후와 서일국을 볼 낯이 없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부르르르!

절대 입을 열거나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주의를 들었기에 서예지는 벽우진의 전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제의 청민과 마찬가지로 이를 악물었다.

왜 고통스럽다고 했는지 그녀는 지금 처절하게 느낄 수 있어서였다.

‘참는다! 참아낸다!’

백옥처럼 하얗고 주름 하나 없던 서예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며 일그러졌다.

지독한 맛들의 향연에 이어 온몸이 찢어지고 활활 불타오르는 듯한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서예지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이 순간을 견뎌내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꾸욱!

서예지는 강해질 수 있다면 이깟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 하나만 했다.

오직 강해지는 것 하나만을 생각하며 그녀는 고통을 견뎌냈다.

우드득! 우득!

그리고 그때 뼈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환골의 단계에 들어갔던 것이다.

뒤이어 머리카락과 눈썹, 그 외의 털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음!’

그 모든 변화를 누구보다 가장 확실하게 느끼고 있던 서예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마지막 탈태의 과정만 남겨두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였다.

잠시 후 몸에서 발산된 열로 인해 재로 변한 의복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 그녀의 피부 역시 하얗게 뜨기 시작했다.

허물을 벗듯이 피부가 한 꺼풀 벗겨졌던 것이다.

“축하한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나지막하게 말하며 미리 준비해 두었던 모포를 그녀에 몸에 덮어주었다.

< 제 10장. 초단기육성계획.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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