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0장. 초단기육성계획. -02 >
앞으로 머물 숙소에 도착한 당민호는 곧바로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미약하긴 하지만 대련으로 인해 입은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당소윤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안전한 지역이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후우.”
“괜찮으세요?”
“허허. 가벼운 내상이라니까. 이 정도야 내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
“다행이에요.”
“그보다 표정이 많이 놀란 것 같구나?”
운기행공을 하는 동안 호법을 서준 손녀에게 미소로 고마움을 전하며 당민호가 다탁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자 당소윤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예. 설마 하니 그 정도 고수일 줄은 몰랐거든요.”
“나도 놀랐다. 반박귀진이야 보는 순간 알았지만 그렇게 영악하게 자신을 숨길 줄은 몰랐거든.”
“속여요?”
“응. 나보다 딱 반 수 아래 정도로 가늠하게 기도를 조절했더구나. 그래서 내가 바로 넘어간 게지. 여전히 음흉한 녀석이라니까. 하지만 그 역시도 심리전의 일종이니 나로서는 할 말이 없지.”
패배했음에도 당민호는 의외로 분개하지 않았다.
친구사이기도 했고 무인에게 있어 패배는 병가지상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생사투에서 이기는 거지 대련의 승패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이겼다면 두고두고 벽우진을 놀려먹을 수는 있었겠지만.
“만만치 않은 사람이네요.”
“가벼운 듯하면서도 잔머리가 비상한 녀석이지.”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무위였어요.”
“나도. 그 정도로 강해졌을 줄이야. 이거 전쟁 운운했던 내가 민망해 지게시리.”
당민호가 혀를 찼다.
호기가 아닌 오만을 부렸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그 기색은 이내 사라졌다.
곤륜파는 물론이고 친구를 걱정했었는데 이제는 안 그래도 될 것 같아서였다.
“생사투였으면 달랐을 거라 생각해요.”
“나도 자신은 있는데, 이상하게 느낌이 그 녀석도 3푼은 감춘 것 같아서 말이지.”
“그랬을까요?”
“워낙에 음흉한 녀석이라.”
비무였던 만큼 둘 다 전력을 다한 건 절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실력으로 전력을 다한다면 둘 중 하나는 크게 다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적당히 손속에 사정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실력을 엿보기에는 충분했다.
“청해성에 새로운 바람이 불 것 같아요.”
“다행스러운 일이지. 천검문 따위가 득세하는 것보다는 일반 양민들에게도 곤륜파가 패권을 쥐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 다만 장문인의 자질이 조금 걸리기는 하는데 그래도 정도를 지키기는 하니까.”
당민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현재 곤륜파로서는 벽우진 말고는 따로 대안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무력만 따지자면 충분히 자격이 있었고.
다만 도인답지 않은 성미가 걸릴 뿐이었다.
“알아보니 지저분한 일을 많이 저질렀더라고요.”
“누가 일부러 공개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말이지.”
“그래도 밝혀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역사도, 근본도 없는 천검문 같은 문파보다야 곤륜파가 훨씬 낫다고 당소윤은 생각했다.
원래 청해성의 패자가 곤륜파이기도 했고 말이다.
“암. 잘된 일이지.”
“곤륜파에는 얼마 정도 머무실 거예요?”
“글쎄다. 시간을 딱히 정해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며칠은 있고 싶구나. 너는 좀 답답하겠지만.”
“오늘의 비무를 곱씹어 보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아주 이득인데요?”
당소윤이 평소대로 돌아와 히죽 웃었다.
고수들의 대결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결코 흔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여인이라기보다는 무인에 더 가까웠다.
뜨거운 대결을 보면 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말이다.
“다행이구나. 너에게 헛된 일정은 아닌 거 같아서.”
“저도 대련해볼 수 있을까요?”
“우진이와 말이냐?”
“예.”
당소윤이 호승심 가득한 눈빛을 뿌리며 말했다.
실력 차가 있으니 당연히 패배하겠지만 그럼에도 비무를 함으로써 얻는 게 적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부와의 인연도 있으니 마냥 거절하지만은 못할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일단 물어는 보마.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아마 엄청 바쁠 테니까.”
“그래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면 한 번 정도는 해주지 않을까요?”
“글쎄다.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 그러니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아.”
당민호의 말에도 당소윤은 기대를 접지 않았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거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한편 당소윤이 열의를 불태울 때 당민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본가와 곤륜파를 떠올리며 무언가를 계속 생각했던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비현이 옥청궁을 찾았다.
정확하게는 옥청궁 안에 마련된 장문인 전용연공실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벽우진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안녕하세요, 비현 호법님.”
“오랜만입니다, 장로님.”
비현의 등장에 청민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인사했다.
오늘 진행할 비술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이가 바로 비현이었기 때문이다.
“많이 긴장하셨네요.”
“그럴 수밖에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이론상으로는 완벽합니다. 그리고 장문인이 계시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멀쩡하게 실패해도 문제이지 않습니까. 영단에 들어간 재료값만 하더라도 엄청날 텐데요.”
청민이 자신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슬쩍 벽우진을 쳐다봤다.
자신을 아껴주고 신경 써주는 것은 고맙지만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실제로 만드는데 돈은 얼마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약초들을 직접 채집했거든요. 핵심 약초들은 장문인께서, 그 외 자잘한 약초들은 제가 가지고 있거나 곤륜산에서 새로 구했습니다.”
“으음.”
“그러니 청민 장로께서는 성공하는 것에만 집중하시죠.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기 전에 진맥부터 하겠습니다.”
비현이 정중히 말하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청민이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 만든 영단은 오직 그를 위해서 특별히 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흡입 전에 몸 상태를 확인하는 작업은 필수였다.
“어떻습니까?”
“딱 좋습니다. 지금 먹으면 될 것 같습니다.”
“들었지?”
벽우진이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아니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여유로운 모습에도 청민은 좀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각오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였다.
“사형.”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
“저는 실패해서 죽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사형은 안 됩니다. 그러니 만약 잘못되면 저를 포기해 주십시오.”
“시작하기도 전에 그 무슨 재수 없는 소리야? 말이 씨가 된다는 말 몰라?”
벽우진이 경직된 분위기를 풀 요량으로 농담을 했다.
하지만 청민의 표정은 단호했다.
자신이야 죽어도 곤륜파에 큰 영향이 없지만 벽우진은 아니었다.
유일한 희망이나 마찬가지인 게 그였기에 청민은 벽우진만큼은 무사하기를 바랐다.
“약속해 주십시오.”
약속하지 않으면 절대 비술을 받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한 눈빛을 뿌리는 청민의 모습에 벽우진이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씩 웃었다.
실패할 가능성은 말 그대로 가능성이었다.
성공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기에 벽우진은 평소대로 돌아와 히죽 웃었다.
“그래. 약속하마.”
“약속하신 겁니다.”
“남아일언 중천금은 나도 좋아하는 말이야.”
“후우.”
벽우진의 확답에 청민이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비현이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참으로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인데 희한하게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지극정성이었다.
만약 그에게 벽우진과 같은 능력이 있고, 청민과 같은 사제가 있었다면 과연 벽우진처럼 행동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비현이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절대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장문인인 건가.’
무게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벽우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없는 곤륜파는 떠올리기 힘들었다.
전각이나 건물들은 누구라도 다시 지을 수 있지만 자신을 비롯한 호법들을 설득하고 제압하는 건 그 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었다.
“시작하자고. 지금 시간이 시행하기에 딱 좋아.”
“알겠습니다.”
“앉으시죠.”
청민이 석실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그의 곁으로 차분히 걸어간 비현이 품속에 손을 넣어 작은 목궤 하나를 꺼내서 열었다.
“으음!”
“향이 좋죠?”
“예. 정말 상쾌하네요. 역시 영단이라서 그런가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 녀석이지요. 물론 완벽하다고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웬만한 변수는 장문인께서 해결해 주실 테니까요.”
비현이 옅게 웃으며 뚜껑을 연 목궤를 청민에게 건넸다.
하지만 청민은 목궤 안에 담긴 손가락 두 마디 만한 영단을 잠시 바라보고는 벽우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에 했던 말을 잊지 말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쓸데없는 걱정 말고 집중이나 해. 가장 중요한 사람이 너라는 걸 잊지는 않았지?”
“개인적으로는 반로환동만 이루어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이왕이면 더 크게 노려야 하지 않겠어? 자고로 꿈과 야망은 최대한 크게 잡아야 해.”
“시작하겠습니다.”
배포가 작다는 식으로 잔소리를 하는 벽우진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청민이 목궤 안에 있는 영단을 지그시 바라봤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영단을 잠시 동안 응시하던 청민이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망설임 없이 영단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우물우물.
책에서 본 대로라면 입에 넣자마자 물처럼 변해 목구멍을 지나간다고 하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그저 지독하게 쓰며 오묘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어릴 적 우연찮게 먹었던 소똥 맛과 이상하게 비슷한 느낌이 드는 맛에 청민이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하지만 지독하게 쓰고 질긴 영단이었음에도 청민은 소가 여물을 씹듯이 멈추지 않고 꼭꼭 씹어서 삼켰다.
‘크흐!’
물론 씹으면 씹을수록 쓴맛과 떫은맛은 배가 되었다.
그러나 청민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악착같이 씹었다.
비현이 가급적이면 꼭꼭 씹어 먹는 게 좋다고 말해서였다.
후우우욱!
그때 그의 위장에서부터 반응이 왔다.
갑자기 몸이 화끈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위장에서부터 시작된 뜨끈한 기운이 순식간에 혈맥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자 청민은 황급히 두 눈을 감고 태청신공(太淸神功)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단전에 본래 자리를 잡고 있던 태청진기가 서서히 몸 안의 흐름을 주도하며 영단이 뿜어대는 약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예상했던 대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도요. 다만 약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좀 미약한 것 같습니다. 역시 천년하수오를 구해왔어야 했나 싶습니다.
-아닙니다. 천년짜리는 너무 과합니다. 균형과 조화를 생각하면 백년하수로도 충분합니다.
전음으로 대답해오는 비현의 말에도 벽우진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천년하수오가 부르는 게 값이라지만 지금 마음먹고 찾으면 못 찾을 것도 없어서였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니고 곤륜파의 제자를 위해서인데 곤륜파가 매정하게 거절하지도 않을 테고 말이다.
-이제 막 시작한 것에 불과합니다. 영단의 약력도 마찬가지고요. 아마 슬슬 본색을 드러낼 겁니다.
부르르르!
비현의 담담한 전음이 끝나기 무섭게 청민이 몸을 떨었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역시 변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솟구쳤던 것이다.
< 제 10장. 초단기육성계획.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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