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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27화 (27/325)

< 제 10장. 초단기육성계획. -01 >

“말했잖아. 58년 동안 시공간의 진에 갇혀 있었다고.”

“분명히 혼자 갇혔다고···.”

“맞아. 혼자 갇혀서 무공수련만 죽어라 했지. 그런데 단순히 무공만 수련한 건 아니다. 네가 말했지? 넌 전장에서 수도 없이 많은 사선을 넘어 왔다고. 하지만 난 나 자신과 수도 없이 싸워왔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고 말이지.”

“흐읍!”

당민호가 이를 악물었다.

놀라기는 했지만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조금 과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더구나 박투술은 그의 전문이 아니기도 했고.

우우우웅!

달라진 마음가짐만큼이나 기세 역시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벽우진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한 대련이었다면 지금은 필승의 각오를 마음에 품었다.

벽우진이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상대할 수 없는 무인임을 이제야 인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하나 승부는 승부였다.

그렇기에 당민호는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 수준이라는 게 기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역시 나도 아직 무인이었어. 이렇게나 지고 싶지 않은 걸 보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당민호가 단전의 기운을 가일층 끌어 올렸다.

이제부터는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싸울 생각이었다.

“진즉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지금부터는 나도 장담 못한다. 죽어도 불평하지 마.”

“그래서 말하는 틈에 하독부터 하는 거냐?”

치이익!

벽우진의 주위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남몰래 하독한 독들이 벽우진의 진기에 의해 증발하는 것이었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니까. 그리고 당한 놈이 멍청한 거지.”

“그럼 나도 마음이 편해지는데. 아무래도 노구이다 보니까 손속에 사정을 두게 되더라고. 나야 팔팔하지만 넌 칠십 넘은 노인네니까.”

“흥!”

언제 지쳤냐는 듯이 당민호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가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서 심상치 않은 소성이 울려 퍼졌다.

지독한 독기에 주변의 공기가 녹아내리는 것이었다.

쒜애애액!

이윽고 극성에 달한 만독수가 허공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건 당민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지독한 독기였다.

만천(滿天)이라는 별호처럼 당민호의 독기는 순식간에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치이익.

그로 인해 벽우진의 도복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연무장을 잠식한 독기들이 벽우진의 목을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조여왔던 것이다.

‘확실히 까다롭다니까.’

당민호의 공격을 회피하며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사람인 이상 숨을 안 쉴 수는 없었고, 그건 곧 중독으로 이어졌다.

그 뒤야 뻔했고 말이다.

물론 만독불침을 이루면 독에 크게 조심하지 않아도 되지만 안타깝게도 벽우진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닿지 않게 할 수밖에.’

당민호가 하독할 때부터 호흡을 멈춘 벽우진이 진기를 끌어올렸다.

이윽고 청명한 빛깔의 강기가 두 손에서 시작되어 팔 전체를 지나 전신을 휘감았다.

“호신강기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미안한데 난 막을 생각이 없는데?”

쩌어어엉!

벽우진의 주먹이 당민호의 독기를 갈랐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의 기운이 물씬 담겨 있던 새카만 만독수마저 깨부쉈다.

“큭!”

단 일격에 독기는 물론이고 만독수마저 박살나자 당민호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충격을 수습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반대쪽 손을 크게 휘둘렀다.

벽우진이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었다.

뻐어엉!

하지만 벽우진은 그마저도 산산조각 냈다.

가로막는 당민호의 독강(毒罡)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박살냈던 것이다.

그러자 당민호의 입에서 비틀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스스슥!

하나 벽우진은 그렇다고 해서 당민호를 봐주지 않았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했고, 지금의 승기가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기에 벽우진은 대결에 충실했다.

튕겨져 나가는 당민호를 향해 잡아먹을 듯이 쇄도했던 것이다.

쑤아아앙!

그러나 당민호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벽우진을 향해 날아가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조금이라도 자세와 호흡을 수습할 시간을 벌고자 만독지(萬毒指)를 뿌렸던 것이다.

하지만 천하절독이라고 할 수 있는 극독이 담겨 있는 만독지도 벽우진의 호신강기를 녹이는 게 전부였다.

“젠장!”

푸른빛의 호신강기가 녹았다가 재생하듯 다시 솟구치는 모습에 당민호가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동안 교양 있고 품위 있던 모습을 내팽개친 채 짜증을 터트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대련 전에 파악하기로는 이 정도 실력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슬슬 끝을 보자고.”

“어림없는 소리!”

꽈아아앙!

무지막지한 내력을 이용해 압박하는 벽우진을 향해 당민호가 처절할 정도로 반격했다.

두 손은 물론이고 두 다리와 머리까지 이용하며 벽우진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 어떤 공격도 벽우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일단 독공이 원천적으로 막혀버리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쩌억! 쩍!

반면에 벽우진의 공격은 너무나 날카롭게 당민호를 위협했다.

두 주먹과 장인이 쉴 새 없이 그를 몰아붙이며 금방이라도 전신을 터트릴 듯 맹렬하게 쇄도했던 것이다.

뻐억!

그러던 중 벽우진의 발차기가 복부를 파고들었다.

두 팔이 활짝 열린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벽우진이 냅다 발을 내질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로 기세가 완전히 기울었다.

퍼퍼퍼퍽!

발바닥에 담은 진기가 당민호의 내부로 파고든 순간 승패가 완전히 결정 났던 것이다.

이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당민호가 주저앉자 벽우진은 작게 심호흡을 하며 공격을 멈췄다.

“후우.”

“하, 제길.”

“패배를 인정하지?”

“···도대체 그 내공은 어떻게 된 거냐?”

더러워진 옷을 털어내며 당민호가 물었다.

전신을 뒤덮는 호신강기도 강기지만 대련 내내 화수분처럼 샘솟던 내공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공력으로 따지자면 그 역시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는데 말이다.

“처절한 수련으로 얻은 성과라고나 할까. 그래도 제법이었어. 자칫 잘못했으면 중독이 될 뻔했으니까.”

“그래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네 무경이 이 정도이니.”

“말했잖아. 자신 있다고.”

오랜만에 치른 비무다운 비무에 벽우진 역시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탈출한 이래 그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이는 당민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근데 질투가 나네. 다 가졌어, 다. 젊음에 무공에, 이제는 지위까지. 명성만 회복하면 아쉬울 게 없겠어.”

“대신 친구는 너 밖에 안 남았지.”

벽우진이 씨익 웃으며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당민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당민호도 피식 웃고는 손을 마주잡았다.

“알면 잘해라.”

“살아남아 있는 게 어디야? 우리 나이에.”

“난 10년 밖에 못 살 거 같은데 넌 앞으로도 50년은 거뜬할 듯싶은데?”

“겨우?”

벽우진이 농담처럼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민호는 그게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승패가 정해졌음에도 여전히 친근하게 대화하는 둘과 달리 당소윤은 멍한 눈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그녀로서는 보고도 현재의 결과가 수긍이 되지 않아서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당민호가 패배했다는 사실이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때문에 당소윤은 흔들리는 눈으로 벽우진을 바라봤으나 정작 당사자는 그녀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대신 서예지가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노구를 이끌고 간만에 격렬한 비무를 치른 당민호를 앞으로 머물 숙소로 데려다주고서 벽우진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방금 전에 치른 비무를 복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벽우진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맺혀 있었다.

“역시 아직도 경험이 부족해. 나와의 대결이야 수도 없이 했지만, 독이나 암기, 진법 같은 특수한 경험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니.”

시공간의 진에서 벽우진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대련을 해야 했다.

자신과 똑같은 수준의 환영과 대결을 펼쳐서 이겨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무공을 사용했기에 다채로운 경험을 쌓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오늘 살짝 고전했던 것이기도 하고.

“다수와의 싸움도 아직은 부족한 편이고.”

당민호와의 비무를 복기하는 한편 벽우진은 천검문의 장로들과 천류검대를 몰살시켰을 때를 떠올렸다.

그들의 수준이야 보잘 것 없었지만 만약 한 명 한 명이 절정고수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한 명 한 명이야 별 거 아니지만 그들이 백 명, 천 명이 되면 제아무리 벽우진이라도 위험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게다가 벽우진의 상대는 단일 세력으로는 최고라 불리는 천년마교였다.

“어느 정도 기반은 다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갈 길이 머네.”

벽우진이 한숨과 함께 입맛을 다셨다.

나름 많이 온 것 같은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구만리는 남은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생각해두었던 방법의 실현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

비현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벽우진이 씨익 웃었다.

계획한 것이 성공한다면 그래도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호법으로 데려온 이들의 활약도 쏠쏠했고 말이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곤륜파를 찾는 사람들이 아주 조금씩 늘고 있었다.

“문제는 시기인데···.”

잠시 밝아졌던 벽우진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사천당가가 봉문을 풀은 건 그로서도 좋은 일이었지만 그건 달리 말하면 정마대전 때 입었던 피해를 모두 복구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천년마교 역시 전력을 복구할 시간이 충분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천년마교. 그리고 중원무림.”

벽우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정마대전을 직접 겪지는 못했지만 청민에게 들은 것과 폐허로 변한 사문을 본 것으로 그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유추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살벌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웅웅웅웅!

벽우진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소매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일월쌍환이 반응했다.

주인의 갑작스러운 살기에 깜짝 놀란 것이었다.

그것도 지금껏 보여 왔던 살기와는 밀도 자체가 다르자 더욱 격렬히 진동했다.

“워워. 별 일 아냐. 그러니 얌전히 있어.”

가끔 보면 어린아이와도 같은 구석이 있는 일월쌍환이었기에 벽우진이 어르고 달랬다.

그러자 일월쌍환의 진동이 서서히 옅어져 갔다.

“짜식들. 쓸데없이 예민해서는. 그나저나 호법들께서 잘 하고 있나 모르겠네.”

일월쌍환을 달랜 벽우진이 창밖으로 시선을 넘겼다.

하지만 그는 풍경 대신 청해성 곳곳을 누비고 있을 아홉 명의 호법들을 떠올렸다.

특히 청하상단에 있을 진구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좋게 보면 호쾌하고 나쁘게 보면 지랄 같은 성격이었기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고는 적당히만 쳤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뭐, 어디 가서 맞을 실력은 아니니까.”

나이로는 호법들 중에 막내이지만 실질적인 무력은 세 번째인 진구였다.

그런 만큼 사실 안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누구를 패면 팼지 맞고 다닐 실력은 아니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벽우진은 자연스레 서진후가 떠올랐다.

“청민, 예지. 그 다음은 청범이다.”

벽우진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히죽 웃었다.

이제 두 번째 도약을 할 때인 것 같아서였다.

< 제 10장. 초단기육성계획.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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