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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26화 (26/325)

< 제 9장. 만천독황(滿天毒皇). -02 >

서예지가 옆에서 걷고 있는 당소윤을 슬쩍 바라봤다.

이제 막 정식으로 무공에 입문한 그녀와 달리 당소윤은 누가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기도를 뿌렸다.

지금의 그녀로서는 가늠되지 않는 강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더구나 사천당가는 봉문을 했음에도 여전히 오대세가 중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모두 다 건재한 만천독황 당민호 덕분이었다.

천년마교로부터 사천당가를 지켜온 그는 여전히 살아 있는 전설이자 사천의 당가를 지탱하고 있는 굳건한 기둥이었다.

‘그런 분과 친구 사이시라니.’

서예지는 다시 전방을 바라보며 벽우진을 떠올렸다.

그러자 처음 그를 봤을 때가 생각났다.

도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가벼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왠지 모를 현기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한없이 가벼운데 이상하게 범상치 않은 느낌을 뿌린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이유를 벽우진은 당당히 드러냈다.

‘그 날의 대결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지.’

모두가 결사항전을 각오했을 때 오직 벽우진만이 여유로웠다.

청민조차도 최후를 생각할 때 오로지 그만이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벽우진은 자신의 실력으로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신위를 선보이며 장로들과 천류검대, 마지막으로 천검문주까지 쓰러뜨렸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지만 이건 좀 무모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게 생각하느냐?”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당소윤이 콧대를 세우며 말했다.

망해버린 곤륜파의 장문인과 만천독황이라 불리는 조부.

누가 봐도 당민호의 승리를 점칠 것이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전 할아버지를 응원할 거예요.”

“그야 당연한 거고. 다만 태상가주께서 널 부른 이유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이에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당소윤이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세 사람은 옥청궁 뒤쪽에 위치한 연무장에 도착했다.

넓고 거대한 곤륜산처럼 홀로 사용하기에는 제법 넓은 공간이었다.

“왔구나.”

“예, 할아버지!”

“구경은 잘 했느냐?”

“나름요?”

당소윤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알면서 왜 묻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에도 벽우진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입에 발린 말보다는 차라리 솔직한 게 나아서였다.

게다가 그에게 비하면 한참 어린 애기의 의견이기도 했고.

“젊었을 적 민호의 성격을 고스란히 닮았네.”

“흠흠!”

“그때의 민호도 눈치가 참 없었지. 고집은 완전 똥고집에. 쇠고집 저리 가라 할 정도였으니까.”

“과거 얘기는 하지 말지.”

“불리해서 그렇지?”

벽우진이 키득거렸다.

원래 잃을 게 많은 쪽이 불리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손녀도 있는데···.”

“난 장문인인데?”

“너야 철면피잖아. 원래부터 체면에 신경도 안 쓰는 녀석이.”

“그래도 이제부터는 좀 달라져야지. 나도 위치가 있는데.”

벽우진이 짐짓 헛기침을 하며 무게를 잡았다.

하지만 얼굴이 워낙에 젊어 보였기에 청년이 노인네 행세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는 제발 그 말 좀 머리에 담아두고 살았으면 좋겠다.”

“애들도 왔으니 슬슬 시작하자. 몸 풀 시간은 주는 게 좋겠지? 아무래도 몸뚱이가 나와는 완전히 다르니까.”

“검은?”

당민호가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몸을 풀고 말고 할 수준은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몸을 풀 시간을 주는 상대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그 기회를 노리면 노렸지.

“필요 없다.”

“너무 호기를 부리는 거 아냐?”

당민호가 눈매를 좁혔다.

그가 알기로 벽우진은 검공을 주로 익힌 검사였기 때문이다.

한데 검을 들지 않겠다고 하자 당민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정한 고수는 병장기의 유무에 구애받지 않는 법이거든. 그러니 넌 걱정하지 말고 네 실력을 전부 발휘하면 돼.”

“피독주는?”

당민후가 진지하게 걱정해줬다.

그의 진신절기가 독공이니만큼 자칫 잘못하면 중독되어 위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혈수가 되어 녹아내릴 수도 있었고.

“독황이라 불리더니. 자신감이 대단한데?”

“독은 그만큼 위험하니까. 해독약을 늘 가지고 다니기는 하지만 찰나에도 죽을 수 있는 게 독이잖아.”

“많이 컸어, 우리 민호. 예전에는 정말 이 형 따라오기도 벅찼었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지. 걸어온 삶도 많이 다르고.”

당민호가 도발에 도발로 응수했다.

더 이상 과거의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벽우진 역시 빙그레 웃었다.

“시작하자고.”

“그래.”

서로에게 웃어 보인 두 사람이 적당한 거리를 벌리고 섰다.

그리고는 비슷하게 두 팔을 늘어뜨리고서 상대방을 응시했다.

꿀꺽!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멀찍이 떨어져서 관전하던 청민이 침을 삼켰다.

천검문주를 상대할 때도 뒷짐을 풀지 않았던 이가 벽우진이었다.

한데 지금은 두 손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러게요.”

“응?”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말에 서예지가 대답하자 당소윤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녀의 두 눈에는 의문이 서려 있었다.

비슷한 말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달라서였다.

“저희 장문인께서도 만만치 않거든요.”

파아아앗!

서예지의 자신만만한 말이 끝나는 순간 벽우진이 움직였다.

늘 그렇듯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당민호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스윽.

하지만 갑작스러운 돌진에도 당민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수도 없이 겪어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육안으로 놓칠 정도의 속도도 아니었기에 당민호는 능숙하게 반응하며 암기를 뿌렸다.

독공이 주특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암기를 아예 다루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쉬이익!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법한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세 줄기의 배심정(背心釘)이 허공을 갈랐다.

정확히 벽우진의 머리와 심장, 그리고 단전을 노리며 직선으로 쇄도했던 것이다.

스스슥!

하지만 그 빠르고 강력한 공격을 벽우진은 너무나 여유롭게 피해냈다.

곤륜파의 자랑이자 경신술에 한해서는 천하일절로 꼽히는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으로 당민호의 암기를 피해냈던 것이다.

“호오.”

그 광경에 당민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손속에 사정을 둔 것도 아니었는데 저렇게 깔끔하게 피해낼 줄은 몰라서였다.

특히나 쓸데없는 움직임이 전혀 없는 모습에 당민호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런 움직임은 수도 없이 많은 실전을 겪어야지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혼자서 그 오랜 세월을 보냈다고 했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모습에 당민호가 미간을 좁힐 때 어느새 벽우진의 신형은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날 앞에 두고 딴 생각까지 하다니.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봐?”

“아직은?”

당민호가 씨익 웃었다.

지금까지는 딱 그가 본 정도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표정은 얼마 가지 않았다.

벽우진의 기세가 순식간에 달라졌던 것이다.

파파파팟!

아무렇게나 늘어뜨려져 있던 양손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솟구치며 사방을 짓눌렀다.

단순히 공력을 끌어올린 것만으로도 주변의 대기가 벌벌 떨었던 것이다.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정면에서 솟구쳤다.

‘육양수(六陽手)!’

마치 태양이 내려온 듯이 무시무시한 열기를 뿜어내는 벽우진의 손을 당민호가 황급히 피해냈다.

음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독공에게 있어 육양수와 같은 극양지력은 상극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벽우진 역시 그것을 알고서 처음부터 육양수를 펼쳤던 것일 테고.

‘하지만 상극이라고 해도 내 독공의 수준이 더 높다면 반대로 잡아먹을 수도 있지!’

당민호가 눈을 빛냈다.

상성적으로는 자신이 불리했지만 그렇다고 싸움이라는 게 꼭 상성만으로 결판이 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벽우진에게 없는 수많은 경험이 있었다.

때문에 당민호는 물러나지 않고 정면으로 벽우진에게 달려들었다.

“좋구나!”

자세를 가다듬고서 정면으로 덤벼드는 당민호의 모습에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확실히 독황이라 거들먹거릴 만큼 실력도 있고 판단도 빨라서였다.

특히 자신이 육양수를 펼쳤음에도 만독수(萬毒手)를 펼치며 정면으로 달려드는 배짱에 벽우진은 내심 박수를 쳤다.

콰아아앙!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당민호가 자신에게 냉혹한 현실을 가르치려는 것처럼 그 역시 친우에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이 강호에는 기인이사가 모래알처럼 많으며 자신이 이룩한 경지는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몸이 괜히 사문을 재건하니 마니 고민한 게 아니란 말이지!’

벽우진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무공에 대해서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자격은 없을지언정 실력이 부족하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치이이익!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의 사이에서 새카만 수증기가 치솟았다.

극양의 기운과 극음의 기운이 정면충돌하니 그로 인해 수증기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둘 다 이용했다.

새카만 수증기가 시야를 가렸지만 두 사람에게는 크게 상관이 없어서였다.

고만고만한 실력을 지닌 무인들이야 육안에 크게 의지하겠지만 둘은 아니었다.

콰앙! 쾅! 콰쾅!

이윽고 수증기 속에서 격렬한 충돌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처음의 굉음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묵직한 충돌음이 연신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단 한 번도 같은 위치에서 충돌음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속도가··· 가능한가?’

당소윤의 동공이 흔들렸다.

새카만 수증기로 인해 그녀는 안의 광경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내력을 아무리 끌어 올려도 그녀의 안력으로는 수증기를 꿰뚫어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충돌음만 들을 수밖에 없는데 그게 당소윤은 믿기지 않았다.

‘할아버지야 당연한 수준이지만, 어떻게?’

당소윤의 눈동자에 의문이 짙게 서렸다.

아직까지 충돌음이 나온다는 것은 벽우진이 어떻게든 당민호와 겨루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독황이라 불리는 그의 조부와 말이다.

후우우웅!

당소윤이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바람이 불었다.

연무장 중앙에서 흘러나온 강렬한 바람이 수증기를 순식간에 날려버렸던 것이다.

“보여주려고 불렀는데 이러면 보지를 못하잖아?”

“후욱! 훅!”

“이럴 수가···.”

여유롭게 도복의 소맷자락을 이용해 바람을 일으킨 벽우진과 달리 숨을 헐떡이는 당민호의 모습에 당소윤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광경에 경악한 것이었다.

반대로 청민과 서예지의 표정은 밝아졌다.

당연히 벽우진이 쉽게 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조금 걱정이 되었는데 괜한 기우였던 것 같아서였다.

‘역시 장문인이셔!’

특히 서예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믿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만천독황이라 불리는 이가 상대였기에 내심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에 벽우진이 패배하더라도 초연히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아무리 벽우진이라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세월이 야속하구나. 체력이 이리 차이 날 줄이야.”

“도대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가쁜 숨을 고르며 당민호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그 정도로 그는 큰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 제 9장. 만천독황(滿天毒皇).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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