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장. 만천독황(滿天毒皇). -01 >
“넌 좀 어때?”
“보이는 대로 건물만 지은 상태야.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무공도 없지. 그나마 가진 건 무한한 가능성뿐이라고나 할까.”
“막막하군.”
당민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진짜 멸문지화라는 네 글자 밖에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작은 했으니까.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일단 이 몸이 있으니까.”
“말 나온 김에 얘기 좀 해봐. 어떻게 된 거야?”
“간단하게? 길게?”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당민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58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벽우진은 여전한 것 같아서 말이다.
폭급하다 못해 난폭했던 자신이 유순해진 것과 달리 벽우진은 여전히 개구쟁이 같은 면모를 보였다.
외견과 딱 맞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이해할 수가 없을 텐데. 직접 겪은 나도 여전히 이해가 안 가거든. 그게 어떻게 되지? 라는 의문이 아직도 풀리지 않거든.”
“사설이 길구먼.”
“알았으, 알았어.”
은근히 재촉하는 당민호의 말에 벽우진이 실소를 흘리며 58년 동안 갇혀 있던 일을 나름 깔끔하게 정리해서 설명했다.
그러자 당민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벽우진의 말마따나 너무나 신비해서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내가 이 모습으로 있는 거겠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흐른 것 같다.”
“흐음. 아무리 우화등선을 하셨다는 전설을 가지신 분이라지만 그럼에도 믿기가 힘들군.”
“두 눈으로 보고 있잖아. 난 직접 겪기도 했고. 그리고 믿는 건 자유지.”
“춘향이를 알고 있는 걸 보면 진짜 벽우진이 맞는 거 같기는 한데. 목소리도, 행동거지도 완벽하고.”
당민호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직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를 흉내 내서 뭐해? 망해버린 곤륜파에서 얻을 게 없는데. 차라리 사천성의 청성파를 노리는 게 훨씬 낫지. 청성파는 여전히 명문대파로서의 성세를 누리고 있는데.”
“하긴.”
“그보다 춘향이는 어떻게 됐어? 너 기적에도 오르지 못한 얘가 그렇게 좋다고 따라다녔잖아. 뭐랬더라. 특별한 향기가 있다고 했던가?”
“아직도 그걸 기억하냐?”
당민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까마득한 과거의 일을 벽우진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꺼내서였다.
“특이했거든. 사천당가의 소가주가, 미녀들을 골라서 만날 수 있는 녀석이 이상하게 기루만 가면 미색이 떨어지는 애들 옆에 앉혀놓으니.”
“그렇게 따지면 너도 만만치 않지. 넌 도사인데도 기루에 갔잖아. 그건 정상적인 거냐?”
“우리 문파는 혼례를 굳이 금지하지 않는데?”
“어? 정말?”
“응. 다만 혼인을 하신 분들이 안 계신 것뿐이지.”
몰랐던 사실이었기에 당민호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사라면 당연히 혼례를 치르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신기하네.”
“속세를 떠나는 게 일반적이니까. 근데 말이 안 되는 거지.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데 혼자 도를 닦는다고, 수행을 쌓는다고 뭘 알겠어? 그렇게 수십 년을 수행해 봤자 자기 자신도 제대로 모르는데.”
“명언이로군. 근데 네가 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어울리지가 않아.”
“내가 좀 도사답지 않기는 하지. 그래서 고민도 많이 했었고.”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그는 자신이 곤륜파라는 도가문파의 장문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를 장문인으로 몰아갔다.
그 말고도 다시 사문의 영광을 재현할 능력을 가진 이가 없어서였다.
‘역대 장문인들과 모두 비교해 봐도 내가 한 손에 꼽힐 테니까.’
2대 장문인 정도만이 자신과 엇비슷할 정도라고 벽우진은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같은 사부에게서 무공을 사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니까. 그 벽우진이 곤륜파의 장문인이라니. 난 지금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프고, 힘들고, 고달프니까 너까지 나 괴롭게 만들지 마라.”
“자신은 있냐?”
“없어도 해야지. 그게 현재 곤륜파의 사정이기도 하고. 하지만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구대문파에 다시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거야. 곤륜파를 대신해서 들어간 황산파에 대해서는 들어봤지?”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황산파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청해성을 유람할 때 제법 많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벽우진의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그는 구대문파라는 이름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았다.
“통찰력은 있어 보이더군.”
“꽤나 힘겨울 거야. 참, 청하상단과 천검문의 일로 인해 말들이 많던데. 혹시 그거 네가 한 일이냐?”
“글쎄.”
벽우진이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굳이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어서였다.
과거에야 둘도 없는 친우가 당민호였지만 세월이 너무 많이 변했다.
그렇기에 반가워는 하되 벽우진은 당민호를 과거처럼 순수하게 믿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장문인이 되기도 했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 뛸 때에야 평범한 삼대제자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곤륜파의 재건이라는 의무가 어깨 위에 있었기에 섣불리 누군가를 믿을 수도, 행동할 수도 없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곤륜파의 이름이 걸려 있었으니까.
“나에게도 비밀이라 이거냐?”
“태상가주인 너라면 이해하겠지.”
“예전과는 많은 게 달라졌지. 시간도 변했고.”
“근데 여긴 왜 온 거냐?”
벽우진이 화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천검문에 대해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안 그래도 하오문도로 보이는 이가 곤륜파를 찾아오기도 했었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려고 찾아왔다. 솔직히 봉문한 이후 찾아오지 못하기도 했고. 더구나 청민도 있다고 해서.”
“오오. 아직 의리가 남아 있는데?”
“···날 어떻게 본 거냐?”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늙은이? 세월과 위치는 사람을 변하게 만드니까.”
“이럴 때 보면 제 나이 같기는 한데···.”
당민호가 복잡한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 눈빛에도 벽우진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만 머금었다.
“젊게 살아야지. 그래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지. 더구나 나는 사문을 재건해야 하는 사명도 이제는 갖고 있는데. 너나 청민처럼 골골 대면 쓰나.”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말이지.”
“근데 무슨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찾아와? 내가 보기에 앞으로 10년은 거뜬히 살 것 같은데.”
“모르지, 그건. 강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사실 지금의 해후도 난 꿈만 같기도 하고.”
“영광으로 알도록 해. 앞으로 이 몸의 이름이 전 강호에 떨쳐 울릴 테니까.”
벽우진이 호기롭게 말했다.
과거 소년이던 시절처럼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흐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네 안목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거겠지.”
“어때? 오랜만에 한판 붙어보는 게. 참고로 예전의 나를 생각하면 큰 코 다칠 거야. 내 별호는 들어봤지?”
“당가를 마지막까지 지켜내며 만천독황이라는 별호를 얻었다며? 하늘을 가득 채우는 독의 황제라. 어후.”
벽우진이 몸을 떨었다.
자신이 말하고도 너무나 민망해서였다.
그러면서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당민호를 쳐다봤다.
이런 별호를 당당하게 가지고 다니는 게 신기해서였다.
“독황이라는 별호가 뭐 어때서? 오히려 이런 별호를 가진 사람이 누가 있다고. 괜히 황(皇)자가 붙는 게 아니다. 강호무림에서 황(皇)이라는 글자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냐?”
“아는데···.”
벽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차마 이제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아니면 내 별호가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눈치가 많이 늘었는데?”
“너무 자신감 넘치는 거 같은데.”
당민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친우를 다시 만나게 된 건 너무나 기쁘고 좋은 일이지만 이건 다른 문제였다.
그의 자존심과도 연관되어 있었기에 당민호도 웃으며 넘기지 못했다.
‘갇혀 있어서 그런가. 너무 현실을 모르는 것 같은데.’
비무를 하자고 한 건 솔직히 벽우진의 무위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선대의 안배에 갇혀 있어 홀로 무공수련을 한 그와 달리 자신은 그야말로 수많은 전장을 구른 역전의 노장이었다.
무인으로서 살아온 경험 자체가 벽우진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물론 천검문주가 어쩌면 청해성에서 제일 강한 무인이었을지도 모르나 그래 봤자 변방의 고수였다.
중원 전체에서 보면 백도백대고수 근처에도 가지 못할 무인이 천검문주였다.
정사마(正邪魔) 전체로 보면 삼백 명 안에도 포함되지 못할 터였고.
때문에 당민호는 앞으로의 곤륜파를 위해서라도 벽우진이 한 번 정도는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림은 절대 만만하지가 않으니까. 또한 백도무림이 과거의 전력을 거의 복구한 것처럼 천년마교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까.’
단일 세력으로는 중원무림의 그 어떤 곳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곳이 천년마교였다.
오죽 했으면 천년마교의 발호에 전 무림이 나서서 막았을까.
그런 천년마교가 아직도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자신감뿐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좋아. 대련할 장소가 있나?”
“옥청궁 뒤쪽에 장문인 전용 연무장이 있지. 근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네 손녀랑 우리 애들도 부르는 게 어때?”
“흐음. 나쁘지 않지.”
당민호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공개로 해도 되지만 꼭 그렇게 할 이유는 없어서였다.
게다가 당소윤에게도 도움이 될 터였기에 당민호는 벽우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부른다. 나중에 두 말하지 마라?”
“대장부의 입은 무거운 법이지. 그런데 넌 괜찮겠냐? 못난 꼴을 보일 수도 있는데.”
“퍽이나.”
벽우진이 코웃음을 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난 너와 다르단다.’
벽우진은 당민호의 속을 모조리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눈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소윤은 옆에서 자신과 나란히 걷고 있는 여인을 힐끔거렸다.
현재 신분은 곤륜파의 제자이지만 그 이전에는 청해성을 대표하는 미녀로 이름을 날린 이가 바로 옆에 있는 서예지였다.
그리고 직접 본 결과 당소윤은 그 소문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같은 여자가 봐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잇!’
나름 미모에 자신도 있고, 사천성에서는 꽃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자신이었지만 서예지와 나란히 서자 당소윤은 알 수 있었다.
자신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미모를 가지고 있지만 서예지에게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게다가 드세다 못해 표독스러운 인상의 자신과는 다르게 서예지는 뭇 남자들이 좋아할 법한 외모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남자들이 선호할 수밖에 없는 단아하고 청순하며 깨끗한 느낌이랄까.
‘기분 나빠.’
승부욕이 대단한 그녀는 무공이며 미모며 뒤지는 걸 싫어 했다.
그렇기에 무공수련에도 매진하지만 그 못지않게 신경 쓰는 게 외모를 가꾸고 관리하는 것이었다.
한데 그 자부심이 서예지를 만난 순간 산산히 부서졌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아니.”
인사하면서 나이 역시 밝혔기에 당소윤이 삐딱하게 대답했다.
미모도 미모지만 저 목소리도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당소윤은 몰랐다.
서예지도 내심 그녀를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강하고 아름다워.’
< 제 9장. 만천독황(滿天毒皇). -01 > 끝
ⓒ 윤신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