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장. 사천성에서 온 손님. -02 >
진구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한 마디로 헛짓거리 하지 말고 얌전히 청하상단을 지키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소.”
“지내시다가 자질이 괜찮은 아이가 있으면 여기로 보내주시고요. 물론 강요도, 강제로 보내는 건 안 됩니다.”
“그리 하리다.”
곤륜파에 현재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인원이었다.
그리고 그 인원을 채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제자들을 들이는 것이었고.
때문에 진구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5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갈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고요.”
“이미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고 있소이다.”
“하하하.”
벽우진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하는 말이 자신을 저격하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적임자는 진구였다.
도인답지 않은 도인이 필요한 시점에서 그는 정말 딱 맞는 존재였으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장문인을 때려눕히고 당당히 나갈 것이오.”
“그리 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킁!”
진구가 콧김을 내뿜으며 처소를 나갔다.
할 말을 다 했으니 머뭇거리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벽우진은 피식 웃었다.
의외로 구제불능 같으면서고 규율이나 규범을 잘 지키는 게 바로 진구였기 때문이다.
“일단 한 가지 일은 해결이 된 건가.”
다루기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일을 맡기면 자신의 소임을 확실하게 하는 게 진구였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진구에 대한 생각을 놓으며 산적들을 토벌하고 있는 다른 호법들을 떠올렸다.
“자금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고.”
벽우진이 산적들을 토벌하는 데에는 네 가지 이유가 있었다.
민초들이 받는 고통을 덜어주고, 곤륜파가 건재하다는 것을 널리 알리며, 부족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벽우진은 호법들을 청해성 곳곳으로 보냈다.
겸사겸사 자질이 괜찮은 아이도 찾을 겸 해서 말이다.
당장 급한 인력이야 호법들로 채웠다지만 먼 미래를 위해서는 뛰어난 자질을 가진 제자들이 필수였다.
“얼마나 데려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대륙은 넓고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그 중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이들은 소수였기에 벽우진은 내심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눈에 괜찮아 보인다면 다른 무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수완이 좋단 말이지.”
산적을 토벌하면서 회수한 재물들의 절반을 벽우진은 일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독식을 하는 건 여러 모로 좋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 일을 비롯해서 곤륜파를 운영하는 일을 서예지가 정말로 잘해주고 있었다.
상계 출신이라서 그런지 정말 깔끔하게 곤륜파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벽우진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생각지도 못한 서예지의 능력 덕분에 그는 오로지 무공서 작업에만 매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운영을 맡기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서예지는 곤륜파의 소중한, 그것도 첫 번째 제자였으니까.
“우선 청민이부터 해결해야지. 그런 다음에 청범과 예지를 하면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춰지겠지.”
벽우진의 시선이 비현이 남기고 간 양피지로 향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든 듯한 경장을 입은 두 사람이 곤륜산 아래 자리 잡은 마을에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보더라도 조손지간으로 보이는 둘이었는데 손녀로 보이는 여인이 장엄하게 솟아 있는 곤륜산을 보며 묘하게 불만어린 표정을 지었다.
“청해성의 영산이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는데요?”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지.”
“제가 부족하다는 말씀이시죠?”
“한 명의 어엿한 무인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부족하지. 물론 동년배 중에서는 쓸 만하다만.”
마의만 입혀 놓으면 촌로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푸근한 인상의 노인에 생긴 것 답지 않게 지극히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심지어 다른 이도 아니고 손녀인데 말이다.
“경험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것도 있고. 하지만 그건 내 기준에서고. 다른 이들에게는 뛰어난 후기지수로 보이겠지.”
“얼른 경험을 쌓아야겠네요.”
“어떤 경험이든 경험은 많을수록 좋지. 무인을 더욱 농익게 만들어 주니.”
당소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틀린 말이 아니어서였다.
그리고 지금껏 조부의 말에 따라서 나빴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가 그래서 할아버지를 따라온 거예요.”
“안타깝겠구나.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산적들은 보이지가 않으니.”
“그러니까요. 안 그래도 내심 기대했는데.”
투지를 감추지 않는 손녀의 모습에 당민호가 실소를 흘렸다.
확실히 요조숙녀와는 거리가 멀어서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싫지 만은 않았다.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집으로 돌아갈 때는 만날 수 있겠죠?”
“아마도? 더구나 청해성과 사천성은 세외에 가까운 지역이니까. 산적이나 수적들이야 백도가 득세했을 때도 늘 사방팔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사실일까요? 곤륜파가 다시 일어섰다는 말이요.”
당소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부에게 있어 곤륜파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성격답지 않게 눈치를 살폈던 것이다.
“뭘 그렇게 힘들게 물어보느냐. 그냥 물어보면 될 것을.”
“히히.”
“다시 활동을 시작했으니 재건하는 중이지 않겠느냐. 청민도 있다고 하니 겸사겸사 얼굴 볼 겸 해서 가는 거지. 더 나이 먹어서는 이렇게 먼 여정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정정하신데 그런 말씀 마세요.”
당소윤이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부가 죽는다는 걸 그녀는 아직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나이가 적지 않다고 하나 건강관리만 잘 한다면 적어도 십 년은 끄떡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우리 소윤이 시집가는 건 보고 죽어야지. 허허허.”
“증손주도 보셔야죠. 저 시집가는 것만 보고 가는 건 제가 허락 못해요.”
“그래도 시집 갈 마음은 있나 보구나?”
당민호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이기에 내심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 혼례를 올릴 마음은 있는 것 같아서였다.
“있죠. 물론 아무에게나 갈 마음은 전혀 없어요. 제 성에 차는, 저와 어울리는 남자하고 혼인할 거예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빠하고도 담판을 지었어요. 정략결혼을 시키지 않겠다고요.”
“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딸을 팔아? 자식을 팔아야 할 정도면 진즉에 망하는 게 맞지. 차라리 우리 쪽에서 혼사를 주도하면 모를까.”
“맞아요.”
누가 조손지간 아니랄까봐 손발이 착착 맞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당민호의 시선은 시종일관 곤륜산에 향해 있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벌써 몇 십 년 째 소식이 없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친우를 떠올리며 당민호는 속으로 씁쓸히 중얼거렸다.
이번 곤륜산행도 죽기 전에 친우가 머물렀던 곳을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기에 당민호는 무거운 마음으로 마을을 지나 곤륜파의 산문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기 산문이 보여요.”
“제법 비슷하게 다시 만들었구나.”
“저런 모습이었어요?”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지. 온갖 풍파가 흉터처럼 남아있던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지금은 완전 새 것이지 않느냐.”
당소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너무 새 것처럼 보여서였다.
아마 가까이 다가가면 막 깎은 나무 냄새가 물씬 풍길 것만 같았다.
“그래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곤륜파는 어떻게 보면 우리 가문이랑 많은 게 비슷하니까요.”
“어리석게도 희생만 했지. 똑같이 버림도 받았고.”
“그 빚은 반드시 받아낼 거예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은 평화로워졌지만 당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평화를 느낀 적이 없으니까.”
당소윤이 시퍼런 기광을 뿌렸다.
천년마교도 싫지만 그녀는 정작 힘들 때 나 몰라라 한 구파일방도 만만치 않게 싫었다.
“은혜는 열 배, 원한은 백 배로 갚는 게 당가니까요.”
“그렇지.”
“응? 당춘향?”
손녀와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며 산문을 향해 올라가던 당민호가 순간 멈칫거렸다.
기억의 저편에 있는, 너무나 오래된 자신의 별명이 난데없이 들려와서였다.
그래서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어?!”
낡은 도복에 심마니처럼 망태기 하나를 어깨에 걸친 청년의 모습에 당민호의 두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왜냐하면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친우가 조금도 늙지 않은 모습으로, 마치 성년이 된 모습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민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청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당신 뭐야? 누군데 어른한테 반말을 찍찍해?”
“호오. 손녀인가? 닮은 기색이 눈곱만큼은 있는데?”
“지, 진짜 벽우진이냐?”
“너도 세월은 어쩔 수 없었나 보구나. 세월을 직격으로 맞았네. 그보다 춘향이는 결국 집으로 들였냐?”
“허허허!”
명확한 대답이 아니었지만 눈앞의 청년이 벽우진이라는 걸 증명하기에는 충분했다.
이제 그와 춘향이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아서였다.
그렇기에 당민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청년이 진짜 친우라는 사실을 말이다.
“할아버지. 아는 사람이에요?”
“아무래도, 내 친구인 것 같구나.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예에?!”
당소윤이 괴성을 질렀다.
자신과 별 차이도 나지 않아 보이는 청년을 친구라고 하자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당민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얼굴로 벽우진을 바라보며 옅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할 이야기가 많은 것 싶은데.”
“따라 와.”
처음만 놀랐을 뿐 의외로 빠르게 신색을 회복하는 당민호의 모습에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그러나 당소윤은 따라오라는 벽우진의 손짓에도 선뜻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여전히 조부가 내뱉은 말이 뇌리에 깊게 남아서였다.
“어서 오너라.”
“예, 예!”
멍한 얼굴로 서 있던 당소윤이 당민호의 부름에 뒤늦게 달려갔다.
하지만 벽우진에게 향해 있는 두 눈에는 여전히 의문이 짙게 서려 있었다.
또르륵.
얼마 전 완공된 장문인의 집무실인 옥청궁으로 벽우진은 당민호를 데려왔다.
그리고는 직접 말린 찻잎을 이용해 차를 내렸다.
“예전의 옥청궁이랑 똑같네.”
“청민이가 직접 설계하고 감독했거든. 당연히 똑같을 수밖에 없지.”
“아, 청민이가 남아 있었지.”
“당가에 대해서는 얼추 이야기를 들었다. 천년마교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고.”
벽우진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어찌 보면 사천당가 역시 곤륜파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다만 멸문지화를 피하지 못한 곤륜파와 달리 당가는 그래도 가까스로 가문을 존속할 수 있었다.
물론 피해가 엄청났기에 봉문을 해야 했지만.
“곤륜파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꽤 피해가 컸어. 그래서 한동안 봉문을 해야만 했었고. 사실 봉문을 푼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이제 막 중원에 서서히 알려지는 중이랄까.”
“그래도 많이 회복한 모양이네.”
“얼추 전쟁 전의 8할 정도는 복구한 거 같아. 아무래도 우리는 전력을 그래도 어느 정도는 보존했으니까.”
“천만다행이네.”
벽우진이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곤륜파만큼이나 사천당가 역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명문정파였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세인들은 독한 사천당가의 심성 때문에 정사중간으로 보기도 했으나 적어도 벽우진이 알기로 당가는 명문이라는 이름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저 손속이 좀 과한 것뿐.
< 제 8장. 사천성에서 온 손님.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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