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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8장. 사천성에서 온 손님. -01 >
서진후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곤륜파는 혼인을 금지하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다. 화산파도 마찬가지고. 다만 진산제자 중에 혼례를 올린 경우가 거의 없었지.”
까마득한 기억을 꺼내며 서진후가 말했다.
그가 곤륜산에서 수련했을 당시 혼례를 올린 진산제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의외네요.”
“그런데 그건 왜 묻느냐? 설마···.”
서진후의 동공이 흔들렸다.
뜬금없이 혼례에 대해 묻자 한 가지 가정이 뇌리를 관통했던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저는 사부님께 여인들이 적지 않게 꼬일 것 같아서요. 강한 무인에게는 늘 여인들이 모이잖아요. 더구나 사부님의 외견은 약관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
“흐음. 확실히 그렇긴 하겠구나.”
서진후가 턱을 쓰다듬었다.
나이를 밝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벽우진이 일흔다섯의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게 분명해서였다.
그리고 벽우진의 평소 행실을 떠올려보면 어느 날 갑자기 장가를 가겠다고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지.’
58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벽우진은 절대 일흔다섯 살의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보이는 모습과 똑같은 나이 같았다.
“해서 그에 따른 대비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낭중지추라는 말처럼 언젠가는 청해성을 넘어 중원까지 이름이 알려질 테니까요.”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지금은 단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하오문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정보를 파는 단체이지 않더냐. 당연히 의문과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지금이야 대호방과 백운산장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결판이 나겠지.”
“그 틈에 제자리를 찾아야 해요.”
서예지가 다부진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이 최적의 기회라고 생각해서였다.
“허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거라. 단주가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 게다가 이번에 장문인께서 호법 한 분을 함께 보내주신다고 했으니 넌 너 하나만 신경 쓰면 된다.”
“호법님이요?”
“그래. 실력이 대단하다고 그러더구나.”
“잘 되었네요.”
서예지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안 그래도 청하상단에 가장 부족한 부분이 무력이었다.
그런데 벽우진이 호언장담할 정도라면 분명 청하상단에 큰 힘이 될 터였다.
“그나저나 요즘 무엇에 그리 열중하시는 건지 모르겠구나.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저도 궁금해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처소에서만 보내시는 거 같아요. 식사도 거의 하지 않으시고요.”
서예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벽우진의 처소를 바라봤다.
하지만 굳게 닫혀 있는 창문으로 인해 벽우진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여명이 밝아오는 이른 새벽에 벽우진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일어나자마자 운기조식으로 잠기운과 피로를 날려버리고는 그대로 책상에 앉아 무공서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게 근래 벽우진의 하루 일과였다.
붓을 잡는 것으로 시작해서 붓을 내려놓는 것으로 끝이 나는.
“끝이 없네, 진짜.”
벽우진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년마교와의 결사항전으로 인해 무공서고 역시 전소되었기에 현재 곤륜파에는 무공비급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었다.
때문에 곤륜파의 모든 무공을 알고 있는 벽우진이 직접 손으로 쓰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쯤 끝낼 수 있을까.”
정신없이 무공서를 작성하다보면 하루가 어느새 다 흘러가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들어올 제자를 위해서라도 무공서를 만들어두어야만 했다.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벽우진이 어느 날 갑자기 비명횡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다시 시공간의 진으로 들어가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고.
“아마 다시는 열리지 않겠지. 오직 한 명만을 위한 공간이었으니까.”
58년의 세월 동안 갇혀 있던 시공간의 진을 떠올리며 벽우진이 진저리를 쳤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곳이 있었기에 지금의 벽우진도 있었다.
만약 벽우진이 거기에 끌려가지 않았다면 곤륜파의 맥은 정말 끊어졌을 터였다.
“천기로 이걸 보고 안배하신 거면 좋겠는데. 괜히 나보고 중원무림을, 세상을 구하라고 준비하신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벽우진이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싫어서였다.
“그래도 얼추 자리는 잡아가는 것 같으니.”
벽우진이 잠시 창문 밖을 바라봤다.
폐허였던 곤륜파가 어느새 과거의 모습을 대부분 찾은 게 눈에 들어오자 벽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흘러가는 시간만큼이나 많은 게 빠르게 변해가고 있어서였다.
똑똑똑.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상쾌한 아침 바람을 쐬고 있는데 누군가가 찾아왔다.
그 소리에 벽우진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접니다, 장문인.”
“들어오세요.”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왜소한 체구의 노인, 이번에 곤륜파의 호법이 된 비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러운 인상만큼이나 조용조용한 성격의 그는 벽우진의 처소 겸 집무실로 사용되는 방에 들어오자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아침잠이 없는 편인데요. 더구나 요즘은 반 강제로 일찍 일어나야 하는 상태인지라.”
“진척은 좀 있으신가요?”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저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 부지런히 쓸 수밖에요.”
벽우진이 옅게 웃었다.
말은 힘들다 했지만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손으로 곤륜파의 무공서고를 다시 만드는 셈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비록 곤륜파의 무공서뿐이지만 나중에는 점차 늘어날 터였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장문인의 업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소실된 무공을 복구하려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만약 그랬으면···.”
벽우진이 말끝을 흐렸다.
무공을 새로 창안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게 소실된 무공구결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무공이야 그냥 만들면 되지만 복구는 끊임없이 확인하고 실험해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를 겪을 수도 있었고.
때문에 벽우진은 그렇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복구도 장문인이시라면 잘 하셨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해냈겠죠. 하지만 그런 일은 가급적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벽우진의 모습에 비현이 차분한 얼굴로 웃으며 품속에서 돌돌 말린 양피지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혹시 완성된 것입니까?”
“이론상으로 가능하지만 저도 만드는 것은 처음이라서요. 그래서 실험 삼아 몇 번은 만들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호오.”
“다만 위험부담이 큰 것만은 확실합니다. 보통은 무인 스스로가 깨달음을 얻으면서 이루게 되는 결과이니까요. 그걸 강제로 이루게 만드는 만큼 당사자도 당사자지만 장문인께서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비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혼자만 위험을 감당하는 것이면 모르겠지만 벽우진도 함께 하는 만큼 자칫 하면 그 역시 위험해질 수가 있어서였다.
물론 일월쌍환이 인정한 주인이니만큼 범상치 않은 존재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무공이 천의무봉의 경지에 다다라 있다고 하나 벽우진 역시 한 명의 인간이었다.
“원래 큰 것을 얻으려면 그에 따른 반대급부 역시 클 수밖에 없습니다.”
“무모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꼭 그렇게 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비현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연구에만 매진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말이다.
“투자 대비 효율이 낮다는 말이죠? 청민에게 노력을 쏟기에는요.”
“그렇습니다.”
벽우진이 청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비현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곤륜파에 있어 어떤 존재인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다고 비현은 생각했다.
“이해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게 맞죠. 어쩌면 시간 낭비, 인력 낭비, 돈 낭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3자가 봤을 때입니다. 저에게 청민은 남이 아닙니다. 또한 이런 노력을 아끼지 않을 자격이 있고요.”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다만 저로서도 이 부분은 양보할 수 없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청민이 잘 되면 그 다음 차례도 있으니까요.”
“더 안전하고 확실한 배합을 찾아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과거에도 볼 수 없었던 연단가가 바로 비현이었다.
그것도 어쩌면 천하제일의 실력자일지도 몰랐기에 벽우진은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비현을 배웅했다.
하지만 그가 떠나갔음에도 벽우진은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이가 그를 찾아와서였다.
쿵쿵!
“나요.”
문을 두드리는 건지 부수려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는 소리에 벽우진이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죠.”
“내 할 말이 있어 장문인을 찾아왔소이다.”
“앉으시죠.”
며칠 전 드잡이질을 했던 진구가 씩씩거리며 들어와 벽우진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퉁방울만 한 눈으로 벽우진을 노려봤다.
“왜 나요?”
“거두절미 하지 말고 자세히 말해주시죠.”
“왜 내가 청하상단으로 가야 하는 거요?”
“가기 싫으십니까?”
“나도 산적토벌이 하고 싶소이다.”
진구가 벽우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청하상단에 지원 나가기 싫다는 표현을 대놓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강력한 거절에도 벽우진은 오히려 웃었다.
“개인적으로는 산적토벌보다 청하상단에 지원을 나가는 게 더 제격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과는 많이 틀리구려.”
“제 생각으로는 청하상단에 진 호법이 가장 필요할 것 같아서요.”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 거요?”
진구가 도발적으로 물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청해성 곳곳에 뿌리내린 산적들을 토벌하는 게 가장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어떤 곳이든 풍비박산 낼 자신도 있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호법들 중에 진 호법님이 가장 막내라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진 호법님의 성격 때문입니다. 진 호법은 무슨 일이 생겨도 참지 않으실 것 같거든요.”
“···두 번째 이유가 심히 거슬리오만.”
진구가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가뜩이나 산적 같이 험악한 인상이 더욱 사납게 변했다.
“참고로 두 번째 이유는 다른 호법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이번 임무에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고요.”
“내가 말이오?”
“예. 스스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부르르르!
진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성질을 부리진 못했다.
눈앞에서 실실 웃고 있는 이는 나이는 어려도 곤륜파의 장문인이었으며 그를 단독으로 때려눕힌 강자였다.
그렇다고 다른 호법들에게 따질 수가 없는 게 나이는 물론이고 배분도 그가 한참 아래였다.
“청민이도 있지 않소!”
“안타깝게도 실력이 아직 되지 않아서요. 만약 청민이 진 호법 정도만 되었어도 고민하지 않고 청하상단에 보냈을 겁니다.”
“끄응!”
“청하상단에 간다고 해서 딱히 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냥 평소대로 지내시면 됩니다. 이상한 파리들이 꼬이면 정리만 좀 해주시면 됩니다. 단주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것 좀 해주시고요.”
벽우진이 간단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진구는 이상하게 꼴 보기 싫었다.
“정말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오?”
“정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요. 또한 곤륜파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끄응!”
< 제 8장. 사천성에서 온 손님.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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