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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22화 (22/325)

< 제 7장. 곤륜산의 종주(宗主). -04 >

작게 중얼거린 말을 들은 모양인지 귀찮음이 가득했던 목소리로 소리쳤던 이가 동혈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데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인영을 본 벽우진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수행하는 도인이라기보다는 산적 같은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같이 수행하는 입장이니 선배님이시지 않겠습니까.”

“퍽이나. 언제 얼굴을 봤다고.”

“그래도 곤륜산에 함께 있지 않습니까.”

희끗희끗한 백발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벽우진은 노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8척이 넘어가는 키에 터질 듯한 근육을 보면, 몸만 보면 절대 노인이라고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염 역시 힘없이 늘어진 게 아니라 산적처럼 덥수룩하게 났기에 더더욱 노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해가 동도라는 그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칠 셈이냐?”

“못할 것도 없죠.”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괜히 가만히 있는 사람 건들지 말고.”

“근데 진짜 수행하는 것 맞습니까?”

노인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말투가 왠지 비꼬는 것 같아서였다.

“그럼 심심풀이로 이런 곳에 이렇게 처박혀 살겠느냐?”

“딱히 수행에 매달리는 것 같지 않아서요.”

“네 알 바 아니다.”

“물론 그렇긴 하죠. 근데 제가 선배님을 찾아온 데에는 다 사정이 있어서요.”

“내가 알 바 아니지.”

노인이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에게 있어 벽우진은 주거침입자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다를 겁니다.”

“죽고 싶으냐?”

말꼬리를 붙잡는 벽우진의 행동에 노인이 고개만 살짝 돌리고는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 모습에 벽우진은 오히려 웃었다.

“아직은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게 많거든요. 제가 좀 허송세월을 보낸 게 있어서. 그리고 그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선배님을 데려가는 겁니다.”

“미친놈이었군.”

“혹시 속세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곳보다 속세가 더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벽우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누가 보더라도 노인은 도인이라기보다는 산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말투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일없다.”

“곤륜파가 어찌 되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멸문했더군.”

“도와주시죠.”

“뭐?”

여전히 뒤돌아 있던 노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뜬금없어도 그렇게 뜬금없을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되레 당당했다.

“선배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내가 왜?”

“곤륜산에 적을 두고 계시니까요.”

“그거와 이건 상관이 없다.”

“있습니다. 제가 바로 곤륜산의 종주(宗主)니까요.”

우우웅!

벽우진의 양쪽 손목에 얌전히 채워져 있던 일월쌍륜이 다시 한 번 진동했다.

그리고는 이내 두 자루의 검으로 화했다.

“그건···.”

“선대로부터 이어 내려온 맹약을 알고 계시겠지요.”

“신물의 주인이었나.”

“예. 그렇기에 종주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벽우진의 표정이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장난기 넘치던 기색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변화에도 노인의 태도는 일관적이었다.

“맹약을 이행하기 싫다면?”

“그럼 떠나셔야죠. 곤륜산에서 얻은 모든 것을 다시 돌려놓고서.”

“그것도 싫다면?”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고 하시면 저로서도 강제로 이행할 수밖에요. 끌고 가던지, 아니면 토해내게 하던지.”

노인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에게는 벽우진의 호언장담이 가소롭게 들려서였다.

“신물을 너무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럼 어쩔 수 없죠. 뚜드려 패서라도 현실을 깨닫게 할 수밖에.”

“크하하하!”

노인이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차서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그런 그의 모습에 말없이 일월쌍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푸우욱.

그러자 마치 두부를 가르듯이 일월쌍검이 너무나 부드럽게 손잡이까지 바닥에 박혀들었다.

“원래는 정중하게 모시고 싶었는데, 그게 싫으시다니 저로서도 안타깝네요. 가급적이면 좋게 좋게 말로 끝내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한데.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나대는 건지.”

“무인이 믿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자기 몸뚱이 밖에 없죠.”

“신물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저걸 쓰면 너무 불공평하니까요. 가뜩이나 공평하지 않은데.”

“크큭!”

노인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

헛소리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벽우진의 기도가 달라졌다.

잔잔하던 기도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변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자업자득입니다.”

“어?”

노인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기도가 달라진 순간 벽우진의 신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감쪽같이 사라진 모습에 노인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천기신보(天驥神步)!’

한순간에 증발하듯 사라지는 벽우진의 모습에 노인의 뇌리에 한 가지 무공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신형처럼 감쪽같이 사라진 기척 대신에 무지막지한 풍압이 옆에서 그를 덮쳐왔기 때문이다.

“흡!”

우악스럽게 쥐어진 주먹이 벼락처럼 쇄도하는 모습에 노인 역시 두 손을 움켜쥐었다.

피하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기에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것이었다.

콰아아앙!

이윽고 두 사람의 주먹이 허공에서 맹렬히 충돌했다.

그러자 무지막지한 돌풍이 공터를 휘감았다.

두 사람의 충돌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솟구쳤던 것이다.

부우우웅!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했다.

벽우진과 노인은 서로 조금도 밀려나지 않자 그대로 다음 공격을 펼쳤다.

각자 좌권을 찔러 넣었던 것이다.

쾅! 쾅! 쾅!

그렇게 시작된 난타전에 주변이 들썩였다.

무지막지한 충돌음에 공터가 쩌렁쩌렁 울렸던 것이다.

동시에 노인의 표정이 조금씩 변화를 일으켰다.

‘저 나이에 어떻게 이런 내공을···!’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주먹질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내강(內罡)이 담겨 있는 일격이었기에 하나하나의 위력이 상당했던 것이다.

한데 그런 공격을 벽우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고 있었다.

‘크흠!’

오히려 노인의 주먹이 조금씩이지만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내력을 가일층 끌어올렸음에도 그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뚝심과 집념이야말로 그의 삶을 지탱하는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크아앗!”

피하는 건 꼬리를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노인은 정면대결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기합을 터트리며 더욱더 강하게,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우득!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먼저 무너진 쪽은 노인이었다.

연이은 충돌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주먹에서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솟구쳤던 것이다.

동시에 벽우진의 우악스러운 주먹이 전광석화처럼 노인의 안면에 꽂혔다.

“커헉!”

주먹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볼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충격에 노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뒤로 밀려나면서도 노인은 벽우진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일단은 공간을 벌리기 위해서였다.

뻐엉!

그러나 그의 발길질을 벽우진은 똑같은 발차기로 튕겨냈다.

마치 수를 읽듯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리를 뻗었던 것이다.

동시에 벽우진의 왼손이 활짝 펼쳐지며 유려한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보는 순간 아름답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궤적을 말이다.

퍼퍼퍼퍽!

하지만 노인은 안타깝게도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벽우진의 손에서 펼쳐진 종학금룡수(縱鶴擒龍手)에 전신이 난타 당했기 때문이다.

“끄어어억!”

아까 전의 그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노인은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벽우진에게 두들겨 맞았다.

아니, 벽우진이 반항할 틈을 주지 않았다는 게 맞았다.

쿠웅!

허공에 뜬 채로 벽우진에게 뚜드려 맞은 노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주먹이며 얼굴이며 할 거 없이 전신을 골고루 맞은 노인은 바닥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으으···.”

“다시 한 번 선택할 기회를 드리죠. 곤륜산에서 얻은 걸 놓고 떠나던가, 아니면 맹약을 이행하던가. 선택지는 이 두 가지뿐입니다.”

“아, 아직이다···!”

노인이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속절없이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때문에 노인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그렇다면야.”

그 모습에 벽우진도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선택은 결국 본인이 하는 거니까.

그리고 벽우진의 선택은 다시 한 번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뻐어억!

크게 힘쓸 것도 없이 주먹질 한 방에 노인이 뻗었다.

악착같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그게 한계였던 것이다.

“흠.”

벽우진의 시선이 기절한 노인에게로 향했다.

애초에 반발이 아예 없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쉽지 않았다.

앞선 선배처럼 대화로 해결되면 정말 좋겠지만 모두가 다 그와 같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벽우진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꽤 많이 남았는데 이런 식이라면 진짜 힘들겠는데.”

벽우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라도 이런 식이라면 피곤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벽우진으로서는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장 빨리 곤륜파를 일으키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으니까.

“별 수 있나.”

입술을 삐죽 내민 벽우진이 기절한 거구의 노인을 둘러멨다.

그리고는 동혈 안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서예지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며칠 사이에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져서였다.

폐허였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고풍스러운 느낌이 전각들이 하나둘 세워지는 풍경을 보자 서예지는 새삼 곤륜파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보느냐?”

“새삼 돈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요.”

“금력 역시 세상을 지배하는 힘 중 하나이니까. 그리고 앞으로 네가 걸어가야 할 길이기도 하고.”

“오빠가 있잖아요.”

“현기는 청하상단을 맡고 넌 곤륜파를 맡으면 되지 않겠느냐.”

서진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말에 서예지가 살포시 웃었다.

“나쁘지 않네요.”

“그런데 진짜 혼자 남을 것이냐? 좀 더 체계가 잡힌 뒤에 남는 게 나는 더 나을 것 같다만.”

“아뇨. 아직 체계가 잡혀있지 않기에 더더욱 제가 필요해요. 앞으로 인원은 계속 늘어날 테니까요. 게다가 청해성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가 바로 여기잖아요.”

“그렇긴 하지.”

서진후가 수긍했다.

확실히 벽우진 곁보다 더 안전한 곳은 청해성에서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뜩이나 입문이 늦었는데 더 늦장을 부릴 수는 없죠.”

“흐음.”

서진후가 안타까운 눈빛을 흘렸다.

어째서 손녀가 이리 말하는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더불어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했다.

만약 그가 강했다면 손녀가 무공을 제대로 익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잘못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저는 할아버지의 손녀로 태어나서 기쁜 걸요.”

“녀석.”

“그리고 이건 제가 선택한 길이에요. 그러니 응원해주세요.”

“알겠다.”

어느새 소녀가 아닌 어른이 된 듯한 손녀의 모습에 서진후는 기쁘면서도 씁쓸한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웃으며 서예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할아버지. 저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 보거라.”

“도사도 혼인할 수 있나요?”

< 제 7장. 곤륜산의 종주(宗主).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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