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장. 곤륜산의 종주(宗主). -02 >
보는 것만으로도 영험함을 느낄 수 있는 곤륜산에 돌아온 벽우진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서녕과는 확연히 다른 상쾌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서녕도 좋지만 역시 저는 여기가 제 집인 것 같습니다.”
“난 곤륜산도 좋고 서녕도 좋아. 역시 난 아직 청춘인가 봐.”
“외견만 보면 충분히 약관으로 보이시기는 하죠.”
“육신뿐만 아니라 정신도 청춘인 것 같은데?”
청민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행동거지를 보면 약관의 젊은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서였다.
누가 봐도 일흔이 넘은 나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언행이 가벼웠으니까.
“부럽습니다.”
“너도 될 수 있어. 환골탈태 하면 된다니까?”
“그게 그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잖습니까. 절정도 못 넘었는데 환골탈태라니요.”
“그럼 반로환동은?”
“말처럼 쉬웠으면 누구나 다 했게요? 제 기억에도 환골탈태는커녕 반로환동도 하신 분이 없었습니다.”
청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벽우진이야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해당사항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었나?”
“예. 사형과 함께 있던 시절의 장문인과 장로들께서도 반로환동하신 분이 안 계셨는데요.”
“일부러 안 한 걸 수도 있지. 도사는 아무래도 나이가 좀 있어야 도사다운 느낌이 사니까.”
벽우진이 예의 색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 말에 청민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차라리 필요하지 않아서라는 이유가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할 수 있다면 할 거지?”
“반로환동이요?”
“그거든 환골탈태든.”
청민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그러면서 그는 벽우진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어떤 저의로 묻는 것인지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하는 게 좋겠죠. 사실 지금의 저는 사형에게도 사문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니까요. 과거 장로님들과 비교하면 저는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의 수준이니···.”
“너무 자책하지 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사문에 대한 애정만은 네가 더 넓고 깊지 않더냐. 너는 충분히 장로직에 앉을 자격이 있다. 어쩌면 나보다 더 장문인에 어울리는 사람이 너이고. 무려 58년 동안 이곳을 지키고 있던 게 너이지 않느냐.”
벽우진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나 청민은 그 말에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자격을 떠나서 곤륜파의 장문인에 어울리는 사람은 벽우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의 곤륜을 생각한다면 벽우진이 아니면 안 되었다.
“아닙니다. 사형이 있는데 제가 어찌. 그리고 곤륜파에는 사형 같은 고수가 필요합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더더욱요.”
“그 말도 틀린 건 아닌데 그래도 널 너무 비하하지 마라. 나에게는 네가 필요하니까.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하지?”
“예. 사형과 제가 곤륜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 말 절대 잊지 마라. 우리가 있는 한 곤륜파는 절대 사라지지 않으니.”
벽우진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지금 이 순간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 한 명이 더 늘지 않았습니까? 예지요.”
“속가제자잖아. 그렇게 따지면 청범도 있고, 일국이도 있고. 그리고 예지는 엄밀히 따지면 무기명제자지. 진산제자는 아니니까.”
“그래도 어느새 다섯 명이나 되었네요. 허허.”
“한참 멀었지.”
말은 시큰둥하게 했지만 벽우진도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이고 금자탑도 결국엔 작은 벽돌로 시작하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자신이 있고 청민이 있다면 시간이 좀 걸릴 뿐 언젠가는 과거의 곤륜파를 재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지. 그보다 더 크고 강대한 곤륜을 만들어야지.’
애초에 시작을 안했다면 모를까 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벽우진은 절대 대충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사문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사부를 볼 낯이 없었다.
게다가 사조가 남긴 안배 역시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것일지도 몰랐기에 벽우진은 문파 재건에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다.
“그래도 시작한다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사조 역시 처음에는 혼자서 시작하셨을 텐데요.”
“글쎄다. 무공구결 말고는 따로 남긴 게 없어서. 사실 편지라도 남기셨으면 아예 고민은 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될지 알고 계셨던 게 아닐까요? 천기를 보셔서요.”
“도대체 천기는 어떻게 해야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내 눈에는 그런 게 전혀 안 보이는데. 무공이 아니라 다른 걸 공부해야 하나? 천문 같은 거.”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청민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역시 자세히 알지는 못해서였다.
오래 살기는 했지만 인간관계가 딱히 넓은 편도 아니었고.
“만류귀종이라는데 왜 난 그 말이 자꾸만 틀린 거 같지?”
“무공에 한해서만 그런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흠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청민이 짐짓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막상 시작하기는 했는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해서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은 감이 잡히지도 않았고.
“일단은 터부터 다시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싹 다 밀어버리고 전각부터 다시 세워야지.”
“···돈이 엄청 들겠는데요.”
“그래도 해야지.”
“혹시 시조께서 보물이라도 남겨 놓으신 겁니까?”
청민이 살짝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공간의 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적을 일으킨 분이니 미래에 대비해 자금도 준비해 놓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었어. 시공간의 진에 있었던 건 우물과 벽곡단이 다야. 그마저도 나중에는 물만 먹었고.”
“허어.”
“그렇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계획이 있으시군요?”
“응. 우리한테만 없을 뿐이지 세상에는 돈이 많으니까.”
순간 청민이 흠칫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호, 혹시 훔치시려는 겁니까?”
“설마. 정도(正道)를 걷는 우리가 도둑질을 하면 쓰나. 절대 그럴 수는 없지.”
“그럼 어떻게요?”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거다. 일단은 터부터 정리하자. 체력도 제법 올라왔으니 예전보다는 청소하기가 수월할 거야.”
벽우진이 솔선수범하듯 움직였다.
과거 구파일방의 일좌를 차지했던 대문파였던 만큼 곤륜파 부지는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물론 그동안 청민이 나름 무너진 전각들을 치우고 정리하기는 했지만 아직 반의 반도 끝나지 않은 상태였기에 깔끔하게 청소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리가 초석부터 다지는 거라고 생각하자.”
“예.”
청민이 노안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사문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노구가 부서지더라도 움직일 생각이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건강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이를 생각해야지. 다치지 않은 선에서 해. 너 뻗으면 내가 더 힘들어진다.”
“명심하겠습니다.”
“자, 시작하자.”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폐허로 변해 있던 곤륜파의 터가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곤륜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한 남자가 있었다.
서른 남짓해 보이는 장한이었는데 약초꾼인 듯 옷 곳곳에 흙먼지와 잡초들이 어지럽게 묻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선은 곤륜파에 향해 있었다.
“저 둘이 연관되어 있는 게 분명한데···.”
장한이 입맛을 다셨다.
상부에서는 물론이고 그 역시 천검문의 알 수 없는 몰락에는, 정확하게 천환검 공추의 죽음에 저 둘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문제는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청하상단의 인부들 역시 입을 꾹 다물고 있기에 알아낸 것이 극히 적었다.
“핵심은 저 젊은 남자다.”
장한이 눈을 빛냈다.
지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천검문 사태의 중심에 젊은 남자가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반전의 시작이 바로 청민과 젊은 남자가 청하상단을 찾아온 것에서부터였으니까.
다만 문제는 청민에 대해서는 파악이 끝났지만 젊은 남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진짜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뜬금없이 나타났으니.”
청민과 청하상단이 대하는 태도를 보면 분명 범상치 않는 신분인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공손하게 대할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강호의 배분은 가끔 이상하게 꼬일 때도 있었기에 저런 광경이 흔하지 않을 뿐이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훔쳐보려고 왔느냐?”
“히엑!”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장한이 엉덩방아를 찍었다.
기척도 없이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재빨리 심호흡을 했다.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나올 수 있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전 단지 산에 있는 약초를 캐러 왔습니다요.”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장한이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그는 절대 벽우진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지금은 완벽한 촌부이자 약초꾼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근데 왜 그렇게 곤륜파를 뚫어져라 내려다봤을까?”
“오래 전부터 이 근방에 살고 있던 터라 궁금해서 봤을 뿐입니다요.”
장한이 격렬하게 손사래를 쳤다.
절대 아니라고 부인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완벽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벽우진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약초꾼이라고 하기에는 오늘 수확이 너무 없는 거 아냐?”
“오, 오늘은 산신님께서 양질의 약초를 허락하지 않으셔서요.”
자신의 채집망을 유심히 쳐다보는 눈길에 장한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흙먼지를 묻히고 잡초들을 어지럽게 붙였지만 그의 말마따나 채집망에는 약초 하나 없어서였다.
“그런가.”
“예에. 그럼 소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요.”
“하오문이 확실히 발이 넓긴 넓은 모양이야.”
“예? 하오문이라니요?”
“뭐, 가 봐.”
벽우진이 손을 휘저었다.
그 모습에 장한은 속으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벽우진을 올려다보고는 이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뛰는 중이었다.
‘독심술이라도 익힌 건가?’
떠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장한은 왠지 모르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벽우진이 정말로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일부러 그냥 보내준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선은 상부에 보고가 먼저다. 절대 평범한 인물이 아냐.’
장한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기에 장한은 마음이 급했다.
어서 빨리 보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오문이라.”
한편 장한이 약초를 찾으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려가는 모습을 주시하며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대호방과 백운산장으로 인해 자신이나 곤륜파에 대한 관심이 가려질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하다는 생각도 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청해성의 패권을 쥐고 있던 천검문주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는데 의문을 가지지 않을 리는 없었다.
비록 대놓고 뒷조사를 하지는 않더라도 알게 모르게 인력을 푼 곳들이 있을 터였다.
특히나 정보를 다루는 곳들일수록 더더욱 말이다.
“언젠가는 밝혀지겠지만 당분간은 힘들 거야.”
멀어지는 장한을 일별하며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라고 비밀이 영원히 지켜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은 벌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나도 슬슬 움직여볼까.”
벽우진이 묘한 눈빛으로 구름에 뒤덮인 곤륜산을 올려다봤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개구쟁이와도 같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 제 7장. 곤륜산의 종주(宗主).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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