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장. 그 아들에 그 아버지. -04 >
파아아앗!
삼백여 명이 넘는 숫자가 일제히 달려들자 청하상단에 소속되어 있는 무사들은 물론이고 하인들도 검을 꼬나 쥐었다.
비록 실력은 삼류무사도 되지 못했지만 이곳은 그들에게 있어 집이며 고향이었다.
그렇기에 성세가 기울어 감에도 하인들은 청하상단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형편이 힘들다고 집을 떠나는 가족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만히 있는 그들을 핍박하고 공격한 건 천검문이었다.
‘절대 물러나지 않아!’
‘단주님과 아가씨는 반드시 지키겠어!’
무사들이며 하인이며 할 거 없이 오직 한 가지 목표로 똘똘 뭉친 그들은 천검문의 천류검대가 짓쳐듦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각오한 얼굴로 칼을 들었다.
“미안하지만 네놈들은 그 사람들의 털 끝 하나 건드릴 수 없어.”
쑤아아앙!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가 향하는 곳에서는 피분수가 솟구쳤다.
득달같이 달려들던 천류검대의 대원들이 느닷없이 날아오는 한줄기 지강(指罡)에 속수무책으로 꿰뚫리며 절명했던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저, 저런!”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삼 장로와 공휘준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던 장로들조차 멈칫거렸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어어!”
“우, 우와!”
그리고 그건 청하상단 측도 다르지 않았다.
강할 거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눈에 보이는 경지는 보여준 적이 없었다.
삼 장로조차 발길질 한 방에 제압한 게 벽우진이었기에 다들 생각지도 못한 지강에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전쟁이 끝난 지 확실히 오래되긴 한 모양이야. 놀랐다고 움직이는 걸 멈춘 걸 보면.”
우우우웅!
묵직한 공명음이 장내를 짓눌렀다.
동시에 새하얀 장인(掌印)이 허공에 떠올랐다.
벽우진의 손짓에 따라 거대한 장인이 천류검대의 머리 위에 생성되었던 것이다.
“도, 도망쳐!”
“으아아악!”
느닷없이 나타난 거대한 장인에 천류검대가 아연실색하며 몸을 내뺐다.
한 명 한 명이 일류에서 초일류에 닿아 있는 검객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장강(掌罡)을 감당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때문에 천류검대는 일제히 몸을 돌렸다.
아무리 명령이 중요해도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흥.”
하지만 그건 그들의 바람일 뿐이었다.
벽우진은 그들을 절대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무림에서 칼을 뽑은 이상, 살기를 드러낸 이상 남는 건 생존과 죽음 밖에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괜히 무인을 검 위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으허어억!”
장인에서 흘러나온 인력에 천류검대원들이 멈칫거렸다.
무지막지한 인력에 수십 명의 천류검대원들이 빨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놈!”
물론 그 광경을 장로들이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어차피 삼 장로와 공휘준도 구해야 했기에 장로들이 재차 벽우진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퍼엉!
그런데 그때 벽우진이 들고 있던 천류검대주의 검이 폭발했다.
정확하게는 장로들을 향해 뻗어 있던 검이 뜬금없이 터졌던 것이다.
그리고 조각난 검편(劍片)들은 정확히 쇄도하던 장로들을 덮쳤다.
주르륵.
전광석화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벼락처럼 뿌려졌던 검편에 장로들이 멈춰 섰다.
정확하게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진기를 가득 머금은 검편들이 그들의 육신을 관통했기에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꿰뚫린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니미럴.”
막을 새도 없이 몸을 꿰뚫고 지나간 검편에 장로들이 허물어졌다.
한두 개가 아니고 몸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리자 버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쿠웅! 쿵!
다섯 명의 장로들이 차례대로 쓰러지는 광경에 서진후와 청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왜 그렇게 벽우진이 자신만만해 했는지 지금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청하상단 사람들 역시 완전히 달라진 눈으로 벽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콰아아앙!
하지만 장로들은 끝이 아니었다.
시작일 뿐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백색의 장인은 무시무시한 인력으로 천류검대를 빨아들이며 바닥에 깊숙한 흔적을 남겼다.
“미, 미친!”
“어디서 저런 무인이 나타난 거야?”
“이런 말은 없었잖아!”
가까스로 장인의 권역에서 빠져나온 천류검대원들이 부르짖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자신들 역시 동료들처럼 죽었을 게 분명했기에 겁에 질려 소리쳤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그들의 말에 일일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손잡이만 남은 검을 바닥에 버리며 공추만 주시했다.
“넌 누구냐.”
공추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더불어 눈빛 역시 변했다.
경시하던 태도를 버리고 진지한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방금 전에 벽우진이 펼친 장인을 떠올렸다.
‘본 적이 없는 무공이다. 그렇다고 포달랍궁의 대수인은 아닌데···.’
공추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하지만 강호에서 수십 년을 굴렀음에도 저런 장공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들은 적도 없었다.
그나마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무공은 소림사의 칠십이종절예 중 몇 가지였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누구지?’
공추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겁대가리를 상실한 애송이였다.
나이에 비해 실력이 조금 뛰어난.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믿기지 않게도 애송이는 그의 안목마저 가릴 줄 알았다.
“네가 물으면 내가 예! 하고 대답해 줘야 하나?”
“······.”
“그리고 알아서 뭐해? 어차피 이곳에서 죽을 텐데.”
벽우진은 처음 공추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그러자 공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빈말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서였다.
“역시 아들이 미끼였군.”
“태세전환보소. 이봐, 쳐들어 온 건 네놈이라고. 난 널 초대한 적 없어. 야밤에 담 넘어와서 공격한 건 네놈들이라고. 그것도 이번이 무려 두 번째.”
벽우진이 손가락을 두 개 폈다.
친절하게도 처음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능글맞은 모습에도 천류검대는 웃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정도를 표방한다는 문파의 수장이 말이지.”
말을 잇던 벽우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청하상단은 오늘 살인멸구를 면치 못했을 터였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단 한 놈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살초를 거침없이 사용했던 것이고.
“청하상단이 너 같은 고수와 연은 없을 테니. 어디서 보냈지?”
“마음대로 생각해. 어차피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혹시 모르지. 염라대왕이 말해줄 수도.”
파아앗!
벽우진이 땅을 박찼다.
지금껏 제자리에 가만히 있던 그가 처음으로 다리를 움직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향하는 곳에는 공추가 있었다.
천류검대가 반 가까이 남아 있다고 하나 그래도 청하상단보다는 전력이 위였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단숨에 공추에게로 날아갔다.
쌔애액!
그 모습에 공추 역시 반응했다.
벽우진이 짓쳐드는 것을 보기 무섭게 검을 뽑았던 것이다.
그러자 맹렬한 기세를 머금은 쾌검이 벽우진의 미간을 정확히 노리고서 쇄도했다.
스슥!
하나 눈부신 쾌검이 꿰뚫은 건 벽우진의 잔영이었다.
육안으로 보기도 힘든 공추의 쾌검을 벽우진은 달려드는 상태에서 너무나 가볍게 회피해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 되리라는 걸 공추 역시 내심 짐작하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천환검(千幻劍)이라는 별호를 얻게 해준 성명절기 천파만천검결(千波滿天劍結)을 극성으로 펼쳤다.
파파파팟!
이윽고 그의 검에서 수많은 검영들이 솟구쳤다.
분명 검은 하나인데 허공에 수백 개의 검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아압!”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일천 개에 달하는 검영에서 짙푸른 빛의 검기가 솟구쳤다.
놀랍게도 검영들 전부에 검기를 담았던 것이다.
“허어···.”
그 광경에 천류검대는 물론이고 서진후를 비롯한 청하상단의 사람들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짙은 살기가 담겨 있는 검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아름다운 검예였기 때문이다.
반면 엄청난 검세를 눈앞에 둔 벽우진은 영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쌔애애액!
날카롭기 그지없는 수많은 검격들이 폭풍우처럼 벽우진의 주위에 쏟아져 내렸다.
마치 장마 때 쏟아지는 장대비처럼 무지막지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검기들 중에서 벽우진의 몸에 닿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가만히 보면 딱히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공추의 검기들은 벽우진을 맞추지 못했다.
‘이익!’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친 절초가 조금도 통하지 않는 모습에 공추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두 수만으로도 벽우진의 무위가 자신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는 더는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검을 뿌렸다.
그런데 그 공격이 통하지 않자 공추는 당혹스러웠다.
‘그렇다면!’
공추가 스산한 눈빛을 뿌렸다.
직접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다른 요인으로 벽우진을 흔들 생각이었다.
싸움은 실력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바로 심리였다.
주변 환경으로 흔들면 제아무리 뛰어난 평정심을 가지고 있는 이도 조금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청하상단을 공격해라! 모조리 죽여 버려!
벽우진이 우려하는 것을 공추 역시 알고 있었다.
객관적인 전력은 여전히 천류검대가 우세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추는 전열을 추스르고 있던 천류검대에게 전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확실히 노련하긴 해. 근데 하나만 보고 둘은 못 보는 것 같군. 내가 왜 피하기만 했을까?”
콰드드득!
허공을 빼곡히 채울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검기들을 응시하며 벽우진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 검세가 어그러졌다.
벽우진의 손짓에 허공을 가득 채웠던 검기들이 일제히 뭉개졌던 것이다.
“크흑!”
순식간에 박살나는 검세에 공추가 신음을 흘렸다.
그의 진기로 이루어진 검세였기에 뭉개지는 순간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신을 휩쓸어서였다.
하지만 청해제일인을 논하는 고수인 만큼 공추도 순순히 당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빼곡히 펼쳤던 검세를 일순 정리하며 하나의 검만 남겼던 것이다.
웅웅웅!
동시에 소성과 함께 검강이 치솟으며 벽우진에게 쇄도했다.
그런데 하나였던 검이 벽우진에가 닿기 직전 수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환검의 궁극을 추구하는 검법답게 변화무쌍한 모습을 선보였던 것이다.
스스스슥.
하나 그 변화막측한 검조차도 벽우진의 옷깃 하나 가르지 못했다.
벽우진은 말 그대로 완벽하게 공추의 검초를 피해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벽우진은 거침없이 공추와의 간격을 좁히며 손을 뻗었다.
텁!
순식간에 공추에게 접근한 벽우진은 너무나 가볍게 멱살을 쥐었다.
물론 공추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멱살이 잡힌 순간 벽우진의 목을 잘라 버리겠다는 듯이 매서운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검강이 목에 닿기 직전 공추의 손이 멈췄다.
으드득!
벽우진이 반대편 손으로 검을 든 공추의 손목을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대로 악력을 이용해 움켜쥐었다.
“끄아아악!”
순식간에 손목뼈가 바스러지는 고통에 공추가 체면도 잊고 비명을 질렀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고통에 반항은커녕 비명만 나왔다.
동시에 손아귀에서 흘러나온 상청무상신공(上淸無上神功)의 진기가 공추의 내부를 모조리 뒤집어버렸다.
성난 파도처럼 공추의 기맥과 혈맥을 모조리 헤집어 놓았던 것이다.
털썩.
한순간에 무력화된 공추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으나 아직 벽우진의 공격은 끝난 게 아니었다.
아니,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때문에 벽우진은 공추가 들고 있던 검을 빼앗아서는 그대로 천류검대를 가리켰다.
< 제 6장. 그 아들에 그 아버지. -04 > 끝
ⓒ 윤신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