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장. 그 아들에 그 아버지. -03 >
시종일관 자신을 무시하는 공추의 모습에 서일국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건 옆에 서 있던 서진후와 서현기도 마찬가지였다.
공추가 청하상단을 어찌 생각하는지 너무나 적나라하게 알 수 있어서였다.
“만약 죽였다면?”
“어쩔 수 없지. 새로 낳을 수밖에. 그런데 이미 그렇게 말하는 것부터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지.”
“지금 사람을 보내 죽일 수도 있지.”
“해 봐. 어차피 뒤질 거 마지막 발악을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다만 쉽게 죽지는 못하겠지. 내 분노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테니까.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르고.”
공추의 시선이 서예지에게로 향했다.
그뿐만 아니라 장로들과 감율의 시선 역시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뒷말을 잇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명백한 그들의 눈빛에 서일국은 주먹이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이 금수만도 못한 놈들···!”
“그 금수만도 못한 놈들에게 당하는 버러지가 바로 너희들이야. 그러기에 애초에 좋게 말했을 때 들었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거 아냐? 아니, 내 그늘 아래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겠지.”
“딸을 팔아서 살고 싶은 마음 없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온 거지. 어리석게도 말이지. 그보다, 누구냐? 백면귀와 삼 장로를 제압한 놈이. 늙은이인가?”
공추의 시선이 청민에게 향했다.
서진후와 서현기는 오다가다 마주친 적이 있지만 청민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도복을 입고 있기에 가장 의심스러웠다.
다만 실력이 초일류에 턱걸이를 하는 수준이었기에 공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놈일세.”
“어차피 죽일 건데 예의를 차려서 뭐해? 그리고 강호는 약육강식의 세계지. 약한 건 그 자체로 죄악이다.”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도 할 말이 없겠군.”
“그럴 일은 없다.”
공추가 단호히 말했다.
백귀채를 몰살시킨 고수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더라도 전황을 뒤집는 건 불가능했다.
천검문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백귀채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대단해. 자식 농사를 잘못 지은 애비답게.”
“뭐라고?”
공추가 으르렁거렸다.
휘적휘적 걸어 나온 젊은 놈이 그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던 것이다.
동시에 천류검대가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었다.
애송이가 공추를 향해 반말을 찍찍 내뱉자 흥분한 것이었다.
“거기다 자신이 개라서 그런지 승냥이들도 잘 키웠고. 훈련을 제법 잘 시켜뒀는데?”
“어린놈의 새끼가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네놈만 할까.”
“저 놈이!”
끝까지 반말을 찍찍 내뱉는 모습에 감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노성에도 벽우진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아직 잘 들리니까 그렇게 소리 지를 것 없어. 아니면 그냥 덤비던가. 멍멍 짖지만 말고.”
“청하상단 소속으로 보이지 않는데, 저 늙은이랑 같이 온 놈이 너로구나? 백귀채에 같이 간.”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다 맞는 말은 아니지만 정정해주기 귀찮으니까 그렇다고 할게.”
“후후후!”
공추가 살소를 흘렸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싸늘한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그때 하나의 인영이 벼락처럼 뛰쳐나갔다.
하늘같은 공추의 앞에서 건방을 떠는 벽우진을 더 이상 좌시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천류검대주가 벽우진을 향해 몸을 날렸던 것이다.
쒜애애액!
비호처럼 달려 나간 천류검대주가 이동하는 속도를 그래도 이용해서 발검술을 펼쳤다.
단숨에 벽우진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듯이 처음부터 살초를 뿌렸던 것이다.
스윽.
하지만 섬광을 방불케 할 정도의 쾌검은 안타깝게도 빈 허공을 갈랐다.
벽우진이 너무나 여유롭게 고개만 까딱이는 것으로 그의 일검을 피해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천류검대주는 물론이고 공추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완벽한 기습이었음에도 벽우진은 딱히 당황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였다.
“어, 어떻게!”
“느리니까.”
따악.
경악하는 천류검대주에게 심드렁하게 대답해준 벽우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전날 천검문도들을 제압했던 예의 탄지공이 펼쳐졌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류검대주는 벽우진의 공격을 막아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하고는 검신으로 지풍을 막았던 것이다.
“흡!”
그러나 기적은 한번뿐이었다.
뒤이어진 지풍에 천류검대주는 별다른 반항을 하지 못한 채 전신을 난타 당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지풍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이익!”
하나 그렇다고 순순히 무너지지도 않았다.
요혈만은 어떻게든 피해내면서 벽우진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한 방만! 한 방만 맞추면!’
천류검대주가 이를 악물며 단전의 공력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일단 일격만 제대로 맞추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느린데 눈에 훤히 보이기까지 한 공격을 내가 맞겠어?”
“컥!”
천류검대주의 목이 뒤로 꺾이며 날아갔다.
은밀하게 날아온 강력한 지풍이 그의 이마를 강타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일격에 정신을 잃은 모양인지 천류검대주는 몸만 부르르 떨뿐 일어나지를 못했다.
“어, 어떻게 대주님이···!”
“무슨 수법이지?”
천류검대는 물론이고 장로들도 얼굴을 굳혔다.
마치 가지고 놀 듯이 상대하는 모습에 다들 놀란 것이었다.
특히 장로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들이 가늠한 실력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다들 당황한 것이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군.”
“네놈들 눈깔이 삐어서 제대로 보지 못한 거지. 남 탓을 하면 쓰나.”
“너였구나, 삼 장로를 제압한 놈이.”
“맞아. 쓰레기들과 같이 있어서 그런지 실력도 형편없더라고.”
벽우진이 진심으로 실망했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데 반응이 조금 전하고는 사뭇 달랐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천둥벌거숭이처럼 바라보던 이들이 지금은 긴장한 얼굴로 벽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장로들조차 얼굴을 굳힌 상태였다.
“삼 장로 하나 제압했다고 온갖 거들먹은 다 부리는구나.”
“거들먹이라니. 난 사실을 말했을 뿐. 내가 자랑질 제대로 하면 너는 더 참지 못할 걸?”
“언제까지 내 앞에서 그 촐싹대는 주둥이를 나불거릴지 궁금하구나. 과연 사지가 잘리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말이야.”
“할 수나 있겠어? 고작 네놈 실력으로?”
벽우진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 도발에 공추는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천류검대주가 당했다고 하나 아직 부대주 두 명이 남아 있었고, 천류검대의 전력 역시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쫄리나 봐. 부하들 뒤에 숨어 있는 걸 보면.”
“싸움에도 격이라는 게 있는 거다. 네놈이 나이에 비해 실력이 제법 있다고 하나 나하고 어울릴 정도는 아니다, 애송이. 별호도 없는 무명소졸에게는 천류검대도 과분하지.”
공추의 말에 천류검대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혼자라면 천류검대주를 쓰러뜨린 벽우진을 상대하기가 껄끄럽고 두려웠겠지만 지금 그들은 함께였다.
그렇기에 천류검대는 대놓고 조소를 흘렸다.
“하긴 내가 아직 별호가 없긴 하지. 강호에 출도한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 그마저도 대부분은 유람으로 시간을 보냈고. 근데 말이지. 네놈이 하나 깜빡 잊고 있는 게 있는 거 같은데.”
따악!
벽우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몇 명이 몸을 움찔거렸다.
혹시나 천류검대주를 날려버린 지풍이 혹시나 자신에게 날아올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단순한 손가락 튕김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하나같이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음!”
반면에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던 공추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왜냐하면 서현기의 손에 공휘준과 삼 장로가 붙들려 나왔기 때문이다.
마혈을 점혈당한 것은 물론 양손과 양발이 완벽하게 포박되어 있는 둘의 모습에 다섯 명의 장로들과 천류검대 역시 얼굴을 굳혔다.
“잠시 잊은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말해주지.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어. 네놈이 아니라. 그 사실을 잊지 말라고.”
“···협박하는 거냐?”
“협박은 네놈들이 하고 있는 거고. 거기에 겁박까지 추가.”
벽우진이 씨익 웃으며 청하상단 사람들을 포위하듯 길게 서 있는 천류검대를 눈짓했다.
하지만 그 눈빛에 공추의 눈동자는 더욱 깊어졌다.
이 시점에서 벽우진이 아들과 삼 장로를 보인 의도는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어디서 나타난 놈이지?’
공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자신을 상대하는 배포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스물 남짓한 나이로는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무공 역시 의문투성이였다.
절정의 초입이라고 하나 그래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무인이 천류검대주였다.
그런데 벽우진은 그런 천류검대주를 상대하면서 별다른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순히 공력을 응집시킨 지풍이 다였지.’
경시하듯 말하고 있었지만 공추는 벽우진의 움직임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시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의문은 짙어져갔다.
아무리 봐도 어느 문파 소속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이번에 네놈들의 주제를 좀 알려줄까 해. 시작은 삼 장로가 낫겠지? 장유유서라는 말도 있잖아?”
서걱.
천류검대주가 떨어뜨린 검을 주워든 벽우진이 히죽 웃으며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포박되어 있던 삼 장로의 오른팔이 너무나 깔끔하게 절단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르르!
점혈당한 상태라고 하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삼 장로는 오른팔이 잘리자 바람에 흔들리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격정적으로 떨었다.
“저, 저!”
그리고 그 모습에 삼 장로와 친분이 있던 장로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하니 자신들의 앞에서 저렇게 망설임 없이 오른팔을 잘라버릴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시선에서 벽우진은 태연히 웃으며 검을 빙그르르 돌렸다.
“다음은 누구일까나?”
“뒤를 생각하지 않는 놈이로구나.”
“어이어이. 말했잖아.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다고. 그러니 을이면 을다운 자세를 취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자식은 다시 낳으면 된다.”
“그래?”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공추의 모습에 벽우진이 싱긋 웃으며 검을 공휘준의 오른팔에 가져다 대었다.
권사만큼이나 중요한 검사의 오른팔을 잘라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협이었다.
그러나 공추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단 하나뿐인 후계자이기에 아깝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자존심을 굽힐 생각은 없었다.
“이야. 진심인 모양이네? 야, 네 아빠가 너 버렸다. 너보다는 자기가 더 소중한 가봐. 금쪽같은 자식이라는 말도 이제는 옛말이 되어버린 모양이야. 역시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런가, 세상이 변했네.”
“으으! 으으읍!”
혀를 차는 벽우진의 말에 공휘준이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부친을 쳐다봤다.
“죽어라. 대신 네 복수는 내가 확실하게 해주마. 손가락 하나하나, 팔다리를 얇게 포를 떠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게 만들어주겠다.”
싸늘한 공추의 말에 공휘준의 흔들림이 멈췄다.
대신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는 부친의 말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휘준이 진심으로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아이고 매정하셔라.”
“내 자식을 가지고 논 죗값, 지금 받겠다. 또한 약속하마.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네놈과 저 버러지들에게 내려주겠다고.”
스윽.
공추의 수신호에 천류검대가 몸을 날렸다.
일제히 청하상단의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삼 장로를 향해서는 장로들이 짓쳐들었다.
< 제 6장. 그 아들에 그 아버지.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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