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장. 그 아들에 그 아버지. -02 >
‘원래부터 자질이 훌륭했으니까.’
전쟁으로 얻은 내상과 사문의 멸문으로 인한 마음고생으로 청민은 제대로 된 수련을 하지 못했다.
사부의 죽음으로 곤륜파의 무공 역시 제대로 전수받지 못한 상태였었고.
하지만 벽우진의 등장으로 모든 게 달라졌다.
내상도 치료하고 완전한 무공구결을 전수 받자 눈부시게 성장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잘 가르치기도 했고.’
벽우진이 콧대를 세웠다.
지금의 성장에는 그의 눈높이 가르침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서였다.
더구나 다른 이도 아니고 그 정도 되는 무인이 내려주는 가르침이었다.
이 정도 성장은 당연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곤륜파의 장로직을 맡기에는 말이지.’
두 눈을 감고서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청민을 쳐다보며 벽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빠르게 성장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장로라는 직책에 앉기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해서였다.
‘적어도 절정고수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말이지. 말 그대로 최소한은.’
청민을 일별한 벽우진이 서진후와 서일국 부자를 차례대로 살펴봤다.
둘 다 속가제자이기에, 더구나 서일국은 본산에서 무공을 사사받은 게 아니라 서진후에게서 배운 것이기에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
서진후조차도 제대로 사사받지 못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벽우진은 일단 기초를 제대로 잡아주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었다.
‘당장은 큰 효과를 보기 힘들 나이지만, 그래도 곤륜파의 속가제자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면 안 되니까.’
속가제자에게 허락된 내공심법 중 가장 뛰어난 내공심법이 소청신공(小淸神功)이었다.
하지만 벽우진은 본산의 직전제자에게 허락된 태청신공(太淸神功)을 둘에게 전수했다.
그동안 곤륜파에 보여준 신의에 대한 보답으로 태청신공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이에게 전수하지 않는 조건이 달린 것은 당연했다.
‘죽기 전까지 꾸준히 노력하면 절정의 경지에는 닿을 수 있겠지.’
벽우진의 시선이 다시 청민에게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눈빛이 복잡했다.
마음 같아서는 환골탈태를 시켜주고 싶은데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았다.
환골탈태를 하기에는 몸이 견디지 못할 가능성이 컸기에 벽우진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다셨다.
‘스스로 하는 게 가장 좋긴 한데 그러기에는 너무나 늦었지.’
딱 10년 전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벽우진은 계속해서 들었다.
“장문인.”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장문인께서 여기 계실 것 같아서요.”
“대답을 듣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예.”
서예지가 곱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참으로 눈부셨다.
어젯밤 안 좋은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온한 신색을 유지하는 모습에 벽우진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 멀쩡해 보이는구나.”
“실질적으로 저에게 온 피해는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비슷한 일들을 많이 겪기도 했고요.”
“마냥 곱게 크지는 않은 모양이야.”
“그러기에는 세상이 많이 험하니까요. 그 사실을 어젯밤에 다시 한 번 느꼈고요. 때문에 저는 더 장문인께 무공을 사사받고 싶어요.”
서예지가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결국 자기의 몸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어제 다시 한 번 깨달아서였다.
게다가 가르치는 사람이 벽우진이라면 더욱더 좋았다.
무공도 고강할뿐더러 그의 제자가 된다면 곤륜파의 일대제자이자 첫 번째 제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속가제자인 만큼 장문제자가 되기는 힘들겠지만.’
여도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알기로 곤륜파의 역사에서 여인의 몸으로 장문인에 오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서예지는 자신이 벽우진에게 가르침을 받는다고 해도 장문제자가 되는 건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의 미모는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족쇄이기도 하지.”
“맞아요.”
서예지가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힘없는 여자가 미색이 뛰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오늘 절절히 느꼈기 때문이다.
만약 벽우진이 없었다면 그녀는 공휘준에게 납치되어 지금쯤 온갖 치욕이란 치욕은 다 당하고 있었을 터였다.
부르르르!
그것을 상상하자 서예지는 온몸이 떨리며 손발에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어깨에 올라온 손에, 그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에 그녀의 떨림이 멎었다.
“마지막으로 물어보마. 후회하지 않겠느냐? 다른 선택지도 있다.”
“후회하지 않아요. 그리고 앞으로도 후회하고 싶지 않고요.”
“그렇다면야. 하지만 직전제자는 힘들어. 너 역시 도사가 될 생각은 없을 테고.”
“본산제자는 아빠나 할아버지도 원하시지 않으실 것 같아요.”
서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도사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도적에 이름을 올릴 생각도 없었고.
“미리 말해두는데 엄청 힘들 거다.”
“각오하고 있어요. 쉽게 얻는 게 없다는 걸 이번에 깨닫기도 했고요.”
“철이 너무 빨리 들던 그것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닌데.”
벽우진이 살짝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을 해도, 조숙해도 이제 고작 열여덟에 불과했다.
그런데 벌써부터 철든 말을 하자 벽우진은 살짝 씁쓸해졌다.
“어쩔 수 없죠. 상황이 이러니까요. 이게 다 제가 약해서 그런 거니까요.”
“알겠지만 힘에는 무력만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저를 지킬 수 있는 건 제 몸뿐이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러니 일단은 뛰어라.”
“예?”
서예지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반문했다.
뜬금없이 뛰라고 하니 당황한 것이었다.
“못 들었어? 뛰라고. 무공수련의 가장 기본이 육체단련 아냐. 넌 내공수련은 제법 꾸준히 했지만 육체는 아냐. 그러니까 기초부터 다져야지. 기초훈련에 달리기보다 좋은 건 없고.”
“예!”
“우선 수련장 30바퀴. 다음은 네 상태를 보고 결정하마.”
별채에 따로 딸려 있는 수련장은 제법 넓었다.
그런데 그곳을 서른 바퀴나 뛰라고 하자 서예지는 사실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기에 그녀는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땅을 박찼다.
“역시 제자로 받으셨군요.”
“속가제자야. 진산제자가 아니라.”
“그래도 첫 제자를 받으신 거잖습니까.”
“도중에 포기할 수도 있지.”
벽우진이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 역시 큰 법이었기 때문이다.
“근골이 훌륭한 아이이니 금세 두각을 드러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공이 부족하지만 그건 시간이 흐르면 해결이 될 문제니까요. 오히려 내공은 양이 적을 뿐이지 아주 정순하고요.”
“그걸 알기에 받았지. 무재가 썩 나쁘지 않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아주 훌륭한 편인데요?”
청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실 자질로만 보면 청범이나 서일국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어째서 지금까지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순수하게 자질로만 보면 구대문파에서도 욕심을 낼 정도라고 청민은 생각했다.
“무재가 좋다고 다 고수가 되는 건 아니니까. 단지 출발선이 유리할 뿐이지. 궁극에 닿는 건 재능만 있다고 가능한 게 아냐. 그보다 너는 예지를 품평할 때가 아닐 텐데? 장로면 장로다운 실력을 갖춰야 하지 않겠어?”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절정에는 오르자?”
“예?”
청민이 얼굴 가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다고 하지만 절정의 경지는 단순히 노력한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합당한 깨달음이 있어야 오를 수 있는 경지가 바로 절정지경이었다.
“절정에 오르는 깨달음, 별 거 없어. 그냥 강기만 완성하면 돼. 넌 검을 다루니까 검강만 만들면 된다는 소리지.”
“엄청 쉽게 말씀하시네요.”
“나한테는 쉬웠으니까. 검기상인(劍氣傷人)이랑 비슷해. 크게 다르지도 않아.”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청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벽우진에게나 쉽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리고 그건 막 운기행공을 끝마친 서진후, 서일국 부자도 같은 생각이었다.
“너희는 쓸데없이 걱정이 많아.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고 말이야. 안 되도 일단은 시도해 보고 그래야지! 도전정신이라는 말도 있잖아? 일단 해보고 얘기를 해!”
“알겠습니다.”
벽우진의 닦달에 세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내 육체단련을 시작했다.
비록 육체가 노쇠화 되었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일정 수준까지는 해주는 게 좋았다.
특히 청민의 경우 벽우진이 매일 같이 특별 추궁과혈을 해주고 있었기에 아주 조금씩이지만 회춘하고 있는 상태였다.
“후욱! 훅!”
“헉헉헉!”
이윽고 수련장에 격한 호흡소리가 울려 퍼졌다.
늙은 청민, 서진후, 서일국에 이어 서예지 역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헐떡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벽우진은 냉엄한 눈빛으로 네 사람을 지도했다.
힘들다고 자세가 흐트러지면 그건 수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예에!”
칼 같은 벽우진의 호통과 함께 네 사람의 수련이 이어졌다.
그러나 누구 하나 포기하거나 주저앉는 이는 없었다.
지금은 비록 약자이지만 앞으로는 강자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회가 없었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다들 이를 악물고 수련에 매진했다.
휘이이잉.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보통 사람들이라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야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들이 서녕을 가로질렀다.
그러더니 이내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는데 그곳이 바로 전날 공휘준이 서 있던 자리였다.
“천류검대 전원 도착했습니다.”
“장로들은?”
“지금 도착했습니다.”
전날 청하상단의 담벼락을 넘었던 공휘준과 삼 장로와 달리 공추는 복면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천검문의 정예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늦은 시각이기도 하고 누군가 그들을 발견했다면 은밀히 처리할 생각이었기에 공추는 일부러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들어간다.”
“예.”
이윽고 전원 도착한 것을 확인한 공추가 농밀한 살기를 흩뿌리며 땅을 박찼다.
그 뒤로 삼백여 명의 천류검대가 따라서 담벼락을 넘었다.
툭.
한 번의 도약으로 청하상단의 담을 넘은 공추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의 기감에 마치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모여 있는 기척들이 느껴져서였다.
“역시 예상했나.”
“그런 모양입니다, 문주님.”
천류검대에 이어 담을 넘은 장로들도 기척을 느낀 듯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가 청하상단에 있다지만 그래 봤자 두 명에 불과했다.
반면에 그들은 천검문의 전력을 모조리 이끌고 왔고.
“오히려 잘 됐어. 깔끔하게 한 번에 정리할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일 장로의 맞장구에 공추가 다시 한 번 땅을 박찼다.
그러자 그 뒤를 감율과 장로들, 천류검대가 뒤따랐다.
“오셨구려.”
“그래.”
“이 야밤에 도둑처럼 담을 넘은 걸 보면 역시나 사과할 뜻은 없으신가보오?”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지?”
청하상단주인 서일국의 말에 공추가 피식 웃었다.
사과는 잘못한 것이 있을 때 하는 게 사과였다.
하지만 그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아들이 저지른 일이니 자신하고는 상관없다는 뜻이오?”
“그럴 리가. 내 말은 곧 시체가 될 놈들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허허허.”
대놓고 살인멸구를 하겠다는 말에 서일국이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휘준이는?”
“아들이 내 손에 있는 걸 알면서도 살인멸구를 하겠다는 말이 나오나?”
서일국은 더 이상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저쪽에서 자신들을 죽이겠다는데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당연히. 원래 결정은 강자가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살려두었다는 걸 아는데 확인 차 묻는 거다. 원래 너희 같은 놈들은 최후의 보루 하나 정도는 남겨 놓으니까.”
< 제 6장. 그 아들에 그 아버지.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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