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5화 (15/325)

< 제 6장. 그 아들에 그 아버지. -01 >

지하석실에 공휘준과 장로를 따로 가둔 후 벽우진은 별채로 돌아왔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에는 별채만큼 좋은 곳이 없어서였다.

게다가 아직은 여명이 밟아오지도 않은 시각이기도 했고.

또르륵.

여전히 분노를 지우지 못한 얼굴로 서진후와 서일국이 찻잔을 노려봤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였다.

“일단 둘 다 흥분부터 가라앉히게.”

“후우. 못난 꼴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청민 사형.”

“아냐. 오히려 난 잘 참았다고 생각해. 자식은 없어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죽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게 너무나 한탄스럽습니다.”

죽일 듯이 공휘준을 짓밟기는 했으나 서진후는 차마 그를 죽이지 못했다.

마지막 이성이 그를 붙잡아서였다.

물론 벽우진의 지시도 있었지만 진짜 뒤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서진후는 공휘준을 죽였을 터였다.

“자기비하는 하지 말고. 세상도 살 만큼 산 녀석이 왜 그래?”

“죄송합니다.”

“사과는 되었고. 네가 왜 사과를 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청민이 따라주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벽우진이 말했다.

그러나 틱틱 대는 말투와 달리 벽우진은 두 부자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늦었지만 손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암. 그건 고마워해야지. 내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이 났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서진후가 대답하면서 어금니를 악물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라서였다.

동시에 천검문의 위선에 이가 갈렸다.

그렇게 착한 척, 정도인인 척 행세하더니 이렇게 뒤로 추잡한 짓을 할 줄은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사람들을 물린 것을 보면 사형께 고견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고견까지는 아니고 다만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려고 그랬지.”

“확실하게요?”

청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벽우진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청민에게 설명해주는 대신 여전히 얼굴에 붉은 기가 남아 있는 서진후를 바라봤다.

“네가 나라면 어찌하겠느냐?”

“날이 밝자마자 저 놈을 데리고 천검문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검문의 소문주가 예지를 야밤에 납치하려 했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리기 위해서라도요.”

“그런다고 해결이 될까?”

“예?”

서진후가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묻는 말의 저의가 무엇인지 파악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래. 공휘준을 데리고 가면 너를 선뜻 공격하지는 못하겠지. 마도나 사파가 아닌 한 지은 죄가 있는데 대놓고 싸우자고 하지는 못할 거야. 아마 명문정파들의 시선 때문이라도 사과하는 시늉을 하겠지. 그리고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기 시작할 거야. 원래 저런 놈들이 자기가 한 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당한 것만 생각하거든. 그럼 결과적으로 너희는, 청하상단은 사과만 받고 끝이야. 돈 좀 몇 푼 받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아.”

“으음!”

서진후가 침음을 흘렸다.

더불어 서일국 역시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제야 벽우진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자신들이 얼마나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지도 깨달았다.

“그걸 바라는 거라면 나는 존중해. 선택은 너희들이 하는 거니까. 나는 도움을 줄 뿐이지. 당사자도 너희들이고.”

“사형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말뿐인 사과나 돈이 아닙니다.”

“내 방식이 너희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어. 사부님께서 말했다시피 내가 좀 과격한 성격이거든.”

“망나니라고 하셨죠. 저에게는요.”

청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서진후와 서일국이 순간적으로 실소를 흘렸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단어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 말도 몇 번 들었었지.”

“그것 때문에 고민하셨던 거잖아요.”

“넌 쓸데없이 나에 대해 너무 잘 알아.”

“제가 있어서 다행이죠. 허허.”

넉살이 많이 는 청민이 씨익 웃었다.

그 모습에 서진후와 서일국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사형제간이어서였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내 계획은 이래. 공휘준을 꼭꼭 숨겨두는 거야. 아니, 천검문의 소문주가 저지른 납치미수사건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거지.”

“애초부터 없었던 일처럼요?”

“그래. 그럼 천검문주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이상하다 여기겠지요. 분명 아들놈이 삼 장로와 함께 청하상단에 갔을 텐데 행방불명되었으니까요. 그렇다고 먼저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면 천검문주가 할 수 선택지는···.”

서진후가 입을 벌렸다.

이제야 벽우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놀란 얼굴로 벽우진을 바라봤다.

“천검문주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몇 개 없지. 정면돌파를 하느냐, 아니면 똑같은 짓을 하느냐. 하지만 지금까지 하는 행태를 보아하면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지.”

“그게 가장 깔끔하니까요. 죽은 자는 말이 없고요.”

서진후의 얼굴이 굳어졌다.

만약 그가 천검문주의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천검문주와 똑같은 성격이었다면.

“천검문주 입장에서는 일이 더 커지면 좋지 않으니까. 청하상단이야 솔직히 이제 역사만 있고 영향력은 별 거 아닌 곳이니 하루아침에 사라진다고 한들 조금 이상하다 여길 뿐 진상조사를 하지는 않겠지. 어쩌면 백귀채와 엮어서 유언비어를 퍼트릴 수도 있고. 백귀채의 복수를 위해 다른 산채가 은밀히 나섰다는 쪽으로 몰아갈 수도 있으니까.”

“확실히 그럴 역량이 천검문에게는 있죠. 소문을 조작하는 것 정도야 쉬울 테니까요.”

“그러니 내 계획은 간단해. 가만히 있어서 저쪽이 먼저 움직이게 만드는 거지. 아니, 천검문이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든다고나 할까.”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사형께서는 천검문주를 상대할 자신이 있으신 겁니까?”

벽우진의 작전은 좋았다.

서진후로서도 말뿐인 사과보다는 직접적인 복수가 훨씬 좋았으니까.

더구나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천검문이었다.

청하상단은 가만히 있다가 뺨도 맞고 배도 맞은 꼴이었기에 명분은 자신들에게 있었다.

다만 문제는 천검문주였다.

어쩌면 청해제일인일지도 모르는 그를 상대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이 작전이 통할지 통하지 않을 지가 결정되었다.

“상대할 자신이 없었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어. 여기에 오지도 않았고.”

“으음!”

“쫄리면 아침에 공휘준 데리고 천검문으로 가. 말했다시피 난 강요할 생각은 없어. 그냥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뿐이지. 대신 공휘준을 데려가는 쪽을 택하면 빠른 시일 내에 청해성을 떠나야 할 거야.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둘 다 알고 있겠지.”

벽우진은 거기까지 말한 후 차를 들이켰다.

늘 그렇듯이 선택은 각자의 몫이었다.

그리고 책임 역시 각자가 감당해야 했고.

“사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더는 참고 싶지 않습니다. 참기도 힘들고요.”

“저 역시 이 꼴을 당하고도 참기는 싫습니다.”

“나 죽으면 너희도 다 죽어.”

“안 죽으실 거잖습니까?”

서진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사실 고민은 얼마 하지 않았다.

천검문의 장로를 상대하면서도 천검문도들을 제압한 게 바로 벽우진이었다.

그렇기에 서진후는 벽우진이 정말 천검문주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안 죽고 싶은데 그건 모르지. 생사는 하늘의 뜻이니까. 갑자기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는데 내가 그거에 맞으면 가는 거지.”

“벼락 맞고도 멀쩡하실 것 같은데요.”

“이게.”

벽우진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서진후는 웃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선택을 했으니 이제는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패는 던져졌다.’

서진후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런데 그건 서일국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

“삼 장로는 어떻게 할까요?”

“알아서 해. 어차피 천검문주가 관심 있는 건 아들놈일 텐데.”

“알겠습니다.”

서진후가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 미소가 그렇게 섬뜩할 수가 없었다.

“경계도 더 철저히 하고. 눈 뒤집힌 채로 뛰쳐나올 수도 있으니까.”

“예.”

서진후가 서일국과 함께 방을 나섰다.

그러자 두 사람이 나간 문틈 사이로 여명이 비추기 시작했다.

넓은 대전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태사의에 앉아 있는 공추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대전 전체를 뒤덮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야밤에 나간 후 행방불명되었다? 삼 장로도 같이 사라졌고?”

“그, 그렇습니다.”

심복이자 거의 부문주나 마찬가지인 감율이 머리를 조아렸다.

오랫동안 공추를 모셔왔지만 이 정도로 분노하는 것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머저리 같은 녀석이 결국···.”

으드득!

공추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서였다.

동시에 그는 의문이 들었다.

삼 장로와 직속 부하들을 데리고 갔음에도 실종이 되었다는 것은 청하상단에 있는 의문의 고수가 생각보다 더한 강자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둘이라고 했던가.’

젊은 놈 하나와 늙은이 하나가 별채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은 그도 파악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둘이 삼 장로를 잡았다고 하자 공추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짐작하기로는 청하상단에 억류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청하상단 쪽의 반응은?”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라고 합니다.”

“후후후!”

공추가 비소를 흘렸다.

청하상단이, 아니 정확하게는 아들과 삼 장로를 잡은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단박에 파악해서였다.

그 도발 아닌 도발에 공추는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감히 자신을 상대로 이런 도발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막혔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나를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데, 그 장단에 맞춰줘야지.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다. 이대로 지워버리면 되는 일이니까.”

공추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이번 납치미수를 공론화 하는 것보다 그로서도 오히려 이쪽이 훨씬 더 나았다.

논란이 되기 전에 먼저 수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준비시키겠습니다.”

“자정에 칠 것이다. 그러니 그에 맞춰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감율이 물러났음에도 그의 살기는 전혀 옅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렬해지며 허공을 응시했다.

“어떤 놈인지 궁금하군. 감히 나를 상대로 이런 맹랑한 도전을 하는 이가 누구인지 말이야.”

공추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자신을 이렇게 당당히 부르는 녀석이 말이다.

“곧 보자고.”

공추가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는 질식할 듯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벽우진은 사제들과 서일국의 무공을 봐주었다.

지난 밤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평소와 달리 열의가 대단한 세 사람의 모습에 벽우진은 아주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매일 이런 마음가짐으로 세 사람이 무공을 수련했으면 싶어서였다.

“좋아, 좋아.”

자신의 말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운기행공에 열중하는 세 사람의 모습에 벽우진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셋을 한 명씩 뚫어져라 쳐다봤다.

‘제일 수준이 높은 건 청민인가.’

내상을 완치시키기 무섭게 청민은 정말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그동안 내상이 성장을 정체시켰다는 듯이 벽우진도 깜짝 놀랄 정도로 무공의 화후가 깊어졌던 것이다.

< 제 6장. 그 아들에 그 아버지.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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