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장. 발정난 개새끼에게는 매가 약이지. -02 >
귓전으로 파고드는 장로의 전음에 공휘준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청하상단에 있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를 상대할 요량으로 어렵게 데려온 이가 장로인 만큼 공휘준은 그의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적어도 납치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의 지시에 확실하게 따라야했다.
‘고년을 나눠야 한다는 게 아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일단은 품는 게 먼저니까. 그리고 확실하게 비밀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니까.’
공휘준이 히죽 웃었다.
아버지는 사태가 조용해질 때까지 잠자코 있으라고 했지만 그의 성격상 얌전히 있는 건 불가능했다.
오히려 거의 손에 들어왔다가 놓쳤기에 더욱 안달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의 일을 몰래 계획했다.
‘들키지만 않으면 되니까. 의심은 하겠지만 제깟 놈들이 뭘 할 수 있겠어? 증거가 없으니 따지는 게 고작이겠지. 아니면 이판사판으로 달려들거나. 킥킥!’
공휘준은 세간의 시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성토하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 버러지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은 결국 강자의 뜻대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스슥!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서예지의 처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백귀채를 몰살 시킨 고수가 존재하는 만큼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느껴지시는 게 있으십니까?
-아직은 없군.
-그럼 바로 작업하겠습니다.
-서두르게.
공휘준이 두 손을 비볐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자고 있을 서예지의 모습을 상상하자 벌써부터 몸이 뜨거워졌던 것이다.
‘드디어 청해제일미가 내 손 안에 들어오는구나!’
장로와 수하들이 처소를 포위하듯 서 있는 것을 확인한 후 공휘준이 창문에 손바닥을 댔다.
내공을 이용해 조용히 창문을 열어서 방안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런 다음 진입과 동시에 마혈과 아혈을 짚어서 빠져나오는 게 오늘의 계획이었다.
“거기까지.”
“흡!”
그런데 창문을 반쯤 열었을 때 한 줄기 서늘한 음성이 밤공기를 갈랐다.
동시에 공휘준을 따라온 천검문의 무인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순식간에 포위망을 구축했던 것이다.
“납치범들이 참으로 당당해. 도망치지도 않는 걸 보면.”
벽우진이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의 집 담벼락을 넘었음에도 당당하게 달려드는 게 어이가 없어서였다.
파아앗!
한편 벽우진을 발견한 복면인들은 살기를 감추지 않고서 박도를 휘둘렀다.
들키긴 했지만 일단 죽여 놓으면 시간을 어느 정도는 벌 수 있어서였다.
게다가 혼자였기에 아직까지는 문제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철두철미한데. 검이 아니라 박도를 들고 온 걸 보면.”
스스슥!
열 개의 박도가 순식간에 벽우진을 갈랐다.
하지만 그들이 가른 건 벽우진의 잔영이었다.
얼마나 빨리 움직인 것인지 벽우진은 잔상을 남긴 채 공휘준의 옆에 서 있었다.
-물러나게!
“크흡!”
문도들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벽우진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던 장로가 전음으로 소리쳤다.
지금 이 시점에서 공휘준이 잡히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전음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벽우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늦었어.”
“켁!”
장로가 전력을 다해 경신술을 펼쳤지만 이미 공휘준은 벽우진의 손에 잡힌 뒤였다.
그것도 뒷목을 잡힌 채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이놈!”
“어따 대고 이놈이래? 나이도 어린 것이.”
순식간에 공휘준을 제압한 벽우진이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한참 어린놈이 자신에게 놈놈 거리니 심기가 심히 불편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장로는 벽우진이 그러거나 말거나 주먹을 크게 내질렀다.
강맹한 공력이 실린 일권을 그의 안면을 향해 내뻗었던 것이다.
후우우웅!
뻗어오는 주먹과 함께 묵직한 소성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장로의 주먹은 벽우진의 얼굴에 닿지 못했다.
전력으로 달려와서 날린 일격을 벽우진은 그저 고개만 까딱이는 것으로 피해냈던 것이다.
‘고수다!’
그 모습에 장로의 눈빛이 달라졌다.
청하상단에 왔다는 정체 모를 고수가 이 남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확신이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천검문도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문주부터 구해!
몰래 움직인 만큼 절대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힌다면 차라리 문도들을 넘기는 게 나았다.
그래야 수습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휘준이 사로잡힌다면 문제가 커졌기에 장로는 어떻게든 그부터 빼내라고 지시했다.
“어딜.”
장로의 폭풍 같은 공세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내던 벽우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예의 탄지공으로 공휘준을 데려가려던 천검문도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그러자 장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신을 상대하면서도 문도들까지 신경 쓴다는 것은 최소 그와 동등, 혹은 그 이상이라는 걸 뜻했기 때문이다.
‘젠장!’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장로는 욕이 절로 나왔다.
살인멸구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동시에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도망칠 궁리를 하나 봐? 눈깔이 정신없이 굴러다니는데?”
“이익!”
양손으로 탄지공을 펼치면서도 여전히 여유로운 벽우진의 모습에 장로가 단전에서 공력을 가일층 끌어 올렸다.
시간을 끌어봤자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알기에 속전속결로 끝낼 생각이었다.
‘죽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틈은 만들 수 있겠지!’
장로가 이를 악물었다.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서였다.
웅웅웅!
이윽고 그의 주먹에서 황색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더니 이내 주먹을 휘감았다.
완연한 강기의 형상을 띠었던 것이다.
그걸 장로는 그대로 벽우진을 향해 내질렀다.
‘제발 좀 죽어라!’
전심전력을 다한 일격이 벽우진을 향해 벼락처럼 쇄도했다.
모든 진기를 끌어 모아서 펼친 회심의 일격이었다.
부웅!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혼신의 힘이 담긴 일권은 벽우진이 아닌 빈 허공을 관통했다.
동시에 벽우진의 발끝이 휑하니 비어 있는 그의 옆구리로 향했다.
퍼억!
초식이랄 것도 없는, 파락호의 발길질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발차기였으나 결과는 놀라웠다.
단 일격에 장로가 입을 쩍 벌리며 주저앉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장로는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몸만 부르르 떨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벌써 상황을 끝내셨군요.”
“너희들이 늦은 거야.”
“그러니까 미리 언질을 주셨으면 좋잖아요.”
“뭐, 딱히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았으니까.”
야밤의 소란에 청민은 물론이고 서진후, 서일국, 서현기가 뛰쳐나왔다.
그리고 청하상단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는데 벽우진은 그들을 바로 물렸다.
지금은 보는 눈이 적은 게 여러 모로 좋아서였다.
“왜 그러십니까?”
“저 아이들을 완벽히 믿을 수 있어?”
“음!”
“어차피 나르기만 하면 되니까 애들은 없어도 돼.”
“알겠습니다.”
벽우진의 지시에 서진후가 손짓했다.
그러자 서진후 일가를 제외한 무사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형은 이렇게 될지 예상하고 계셨군요.”
“말했잖아. 남자의 성욕과 집착은 생각보다 대단하다고. 그리고 제 마음대로 살아온 천둥벌거숭이가 애비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리가 없잖아?”
“읍읍!”
거기까지 말한 벽우진이 엎어진 상태로 굳어 있는 공휘준을 발로 뒤집었다.
그러자 얼굴은 물론이고 복면에 흙먼지가 잔뜩 묻은 공휘준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벗겨 봐.”
“예.”
청민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공휘준의 복면을 벗겼다.
이윽고 공휘준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 이···!”
훤히 드러난 얼굴을 확인한 서진후가 치밀어 오르는 격정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또한 서일국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소문이 좋지 않다고 하나 그래도 정파를 표방하는 천검문의 소문주가 복면을 하고서 대놓고 납치를 계획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더구나 그 상대가 자신들의 하나뿐인 손녀이자 딸이라는 사실에 두 부자는 씹어죽일 듯한 눈빛으로 공휘준을 노려봤다.
“밟아. 죽이지만 않으면 돼.”
콰득!
벽우진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진후의 발바닥이 공휘준의 허벅지를 짓밟았다.
가장 단단한 뼈이기도 하지만 벽우진이나 청민이 보기에는 일부러 사타구니를 빗겨 밟은 것 같았다.
“끄으으으!”
그 사실을 공휘준 역시 모르지 않는지 식겁한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눈동자를 쉴 새 없이 굴렸다.
믿을 구석인 장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점혈당한 상태에서 그가 볼 수 있는 건 극히 좁은 공간뿐이었다.
“서현기.”
“예, 옙!”
“여기에 지하석실이나 감옥 같은 곳 있어?”
“있습니다. 감옥까지는 아니지만 따로 취조를 할 때 쓰는 공간이 지하에 있습니다.”
조부나 부친만큼은 아니지만 서예지의 오빠로서 극도로 흥분하던 서현기가 벽우진의 말에 기합이 바짝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신비로운 웃어른이었지만 지금은 감히 똑바로 마주보기가 힘들었다.
만약 벽우진이 청하상단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면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했기 때문이다.
“저 녀석들 데려가.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겠지?”
“모두요?”
“열 명만. 저 늙은이랑 이 젊은 놈은 내가 직접 옮길 테니까.”
“옙!”
서현기는 두 번 묻지 않았다.
대신 한 손에 한 명씩 옆구리에 끼고서 바람같이 달려갔다.
벽우진의 지시대로 하인들의 시선을 피해서 말이다.
“무슨 일이에요?”
“예, 예지야.”
처소 밖의 시끄러움 때문에 깬 것인지 서예지가 얇은 모포를 몸에 두르고서 눈을 비비며 나왔다.
그러다가 처소 앞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흑의복면인들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밤손님이 좀 찾아왔었어.”
“···설마 천검문인가요?”
벽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묘하게 웃으며 검지를 입술에 댔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죽어! 죽어, 이 놈아!”
반면에 서진후는 분노에 몸을 맡긴 채 공휘준을 쉬지 않고 지르밟고 있었다.
벽우진의 말대로 죽지 않는 선에서 마음껏 짓밟았던 것이다.
그런 그의 눈에는 광기와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얼굴 보면 알잖아.”
“제가 아는 얼굴이랑은 많이 달라서요.”
“짧은 시간에 많이도 팼네.”
아무리 개새끼에게는 매가 약이라지만 서진후는 정말 쉬지 않고 계속해서 때렸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점은 서일국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뭐, 어쨌든 상황은 종료했으니까 다시 들어가서 자. 자세한 설명은 내일 듣는 걸로.”
“괜찮으신 거죠?”
“누굴 걱정하는 거야.”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오로지 공휘준만 노려보며 춤을 추듯 발길질을 하는 서진후에게로 다가갔다.
1차 폭행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야밤이기는 하나 소란이 너무 커져서는 좋지 않았다.
딱 적당한 수준이 좋았다.
“사형?”
“그쯤 해. 나머지는 조용한 곳에서 하자고. 한 놈이 더 있기도 하고.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후욱! 예.”
“그래도 다행이네. 난 사실 청민보다 네가 더 걱정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육체단련을 좀 더 빡시게 해도 되겠어.”
흠칫!
서진후가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왠지 모르게 갑자기 오한이 든 것처럼 한기가 느껴져서였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당연히 네가 해야지. 나나 청범이 하리?”
그때 아들이 그를 구해주었다.
이윽고 벽우진은 양손에 장로와 공휘준을 하나씩 들고서 서일국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제 5장. 발정난 개새끼에게는 매가 약이지.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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