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3화 (13/325)

< 제 5장. 발정난 개새끼에게는 매가 약이지. -01 >

“후우.”

뒷짐을 지고 있던 벽우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기에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시조가 어째서 자신에게 그 많은 무공을 익히도록 안배했는지 그 이유를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자신에게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또한 재건한다는 결심에는 각오가 필요했다.

어중간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민거리가 많으신 것 같아요.”

“이 늦은 시각에 웬일이더냐.”

“대화를 좀 나누고 싶어서요.”

“나와 말이더냐.”

“예.”

활동하기 편한 경장 차림의 서예지가 곱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정작 벽우진은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대화를 나누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자고, 내일 하자꾸나.”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꼭 지금 대화를 해야겠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맞아요.”

하염없이 밤하늘에 떠 있던 달을 보고 있던 벽우진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담담한 신색으로 서 있는 서예지를 지그시 쳐다봤다.

“해보거라.”

“저를 곤륜파의 제자로 받아주세요.”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들은 것 같은데.”

“곤륜파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다짜고짜 제자로 받아달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표정으로 보건데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청하상단과의 연을 위해서라면 굳이 제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 곤륜과 청하상단의 인연은 그리 가볍지 않으니.”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에요. 진심으로 곤륜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곤륜파의 무공이 배우고 싶어서 말한 거예요.”

“좋지 않은 생각이다. 차라리 다른 문파의 제자로 들어가는 게 더 낫다.”

벽우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서예지가 기껍기는 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현재의 곤륜은 청하상단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이야 자신 때문에 대단하게 느껴지겠지만 벽우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거대문파의 제자로 들어가는 게 훨씬 나았다.

“당장을 생각하면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코앞이 아닌 더 먼 미래를 생각해서 결정을 내렸습니다.”

“내가 곤륜파를 재건할 거라고 생각했구나?”

“아니신, 가요?”

서예지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말하는 투가 어째 반드시 곤륜파를 재건하겠다는 느낌이 아니어서였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곤륜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느꼈었는데 말이다.

“아직 결정을 내리진 않았지. 나 혼자서 가능한 일도 아닐뿐더러 자신이 없거든. 때려 부수고 박살내는 거야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지만, 멸문한 문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다른 문제니까. 나 혼자서 하고 싶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청하상단이요.”

“사문을 위해서 너희들을 희생시킬 마음은 없다.”

벽우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혹시라도 이런 말을 할까봐 일부러 사문의 재건에 대해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희생이 아닙니다. 투자입니다. 저는 상가(商家)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상재가 제법 있는 편이지요. 그런 제가 생각하기에 곤륜파는 반드시 부활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제가 없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제가 제자가 된다면 그 시기를 좀 더 앞당길 자신이 있습니다.”

“무얼 보고 그리 생각했는지 궁금하구나.”

“어, 어르신이요.”

서예지가 힘겹게 대답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몇 살 차이 나지 않았기에 어르신이라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직 곤륜파의 장문인인 것도 아니었기에 어르신 말고는 따로 떠오르는 호칭이 없었다.

“내 가치가 좀 드높기는 하지.”

“저는 이 모든 흐름을 만든 이유가 어르신께서 천검문을 감당할 자신이 있기에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명분만으로는 강호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아닐 수도 있지.”

“맞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추측뿐이니까요. 하지만 아무 대책 없이 무모하게 일을 벌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벽우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만을 지어보였다.

“청범의 말대로 똑똑하구나. 손녀 자랑을 할만 해.”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자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을 좀 더 해보자꾸나. 날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 말이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기도 하고.”

“제가 올해 열여덟입니다. 무공에 입문하기에는 많이 늦은 나이입니다만.”

고민해 보겠다는 말에 서예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귀동냥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열여덟이라는 나이는 한참 늦은 나이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운기토납법은 익히고 있지 않느냐. 그것도 본파의. 그러니 늦은 건 아니지. 다른 문파의 내공심법을 배워도 상관없고. 어차피 기본적인 운기토납법이니까.”

“알겠습니다.”

단호한 벽우진의 태도에 서예지는 일단 한 발 물러났다.

계속 부탁하면 조르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일단 완전히 거절한 것은 아니었기에 서예지는 그 점에 의의를 두었다.

“시간이 늦었다. 어서 들어가라.”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하며 몸을 돌리는 서예지의 모습을 보자 벽우진은 화용월태(花容月態)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그 정도로 서예지의 미모는 대단했다.

하지만 괜히 나이가 일흔다섯이 아닌지 아무리 아름다운 서예지를 대면하고도 심중에 별다른 파문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참으로 잘 어울립니다.”

“청범이 손녀라는 사실을 잊었더냐?”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서예지가 물러나자 이번에는 청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늘 그렇듯이 낡은 도복차림이었다.

“그 말을 들었으면 청범이 네 멱살을 잡았을 것이야.”

“그럴 리가요. 청범이는 착합니다.”

청민이 옅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가 아는 청범이라면 당연히 농담으로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벽우진의 생각은 달랐다.

“아닐 걸? 다른 이도 아니고 금지옥엽이나 마찬가지인 혈육인데? 나는 멱살을 잡는다는데 내 손모가지를 거마.”

“아, 안 그럴 겁니다. 암요.”

“너도 지금 흔들렸잖아.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소리지. 그리고 자식도 없는 네가 청범을 어찌 이해하겠어?”

“······.”

청민은 말문이 막혔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아니 할 수 없는 공격이어서였다.

“농담은 이쯤하고. 여태 안 자고 왜 나왔어? 회춘한 게 느껴지니 잠이 안 오나? 아니면 나랑 한판 뜨려고?”

“전 오래오래, 건강히 살고 싶습니다.”

청민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비무는 무공수련을 할 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서였다.

“그럼 왜?”

“사형께 고민거리가 있는 것 같아서요.”

“나이 먹고 눈치만 늘었다니까.”

“재건 때문에 그러시죠?”

벽우진이 고개를 들어 다시 밤하늘을 바라봤다.

그러자 어느새 구름이 제법 몰려와 있었다.

“나도 아직 멀었나보다. 표정관리가 잘 안 되는 걸 보면.”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을 겁니다.”

“솔직히 말해 난 자신이 없다. 너도 알다시피 난 장문인의 재목은 아니지 않느냐. 괜히 어쭙잖게 나섰다가 곤륜파라는 이름에 먹칠을 할 것 같기도 싶고.”

“사형은 잘 하실 겁니다. 또한 적임자이기도 하고요. 과거의 곤륜파는 선대들의 곤륜파였지요. 앞으로는 사형의 곤륜파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변화를 두려워했기에 저는 한 번 무너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이 담긴 걱정과 우려에 청민 역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어떤 부분에서 벽우진이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멋대로도 이기적인 벽우진이었지만 그 역시 곤륜파의 제자였다.

또한 누구보다 곤륜파와 곤륜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말아먹으면 어떡하려고 그리 말하느냐?”

“더 이상 말아먹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이왕이면 강한 곤륜파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 어떤 풍파와 역경에도 천년만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곤륜파를요.”

“강한 곤륜이라···.”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일이 년 만에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하나씩 천천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과거의 곤륜파를 재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청민이 진지한 눈으로 벽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뜨거운 열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루하루를 절망에 빠져 보내던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눈빛이었다.

“이왕 할 거면 과거보다 더 나은 곤륜파를 만들어야지. 여전히 야망이 크지 못하구나.”

“허허. 제 그릇인 모양입니다.”

“뭐, 어쨌든 본론은 이거 아냐? 더 놀지 말고 얼른 일하라고.”

“흠흠!”

심유한 벽우진의 눈빛이 청민에게 닿았다.

그러자 청민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차마 벽우진의 눈을 정면으로 직시할 수가 없어서였다.

“전에는 눈치를 좀 보더니 이제는 그냥 대놓고 말하는구나.”

“얼마 전까지는 반신반의 했었습니다. 사형이 되돌아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너무 부담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백귀채를 때려 부순 걸 보고?”

“예. 거기에 더해 천검문을 딱히 안중에도 두지 않는 걸 보고요. 사형은 어릴 적에도 질 싸움은 애초에 시작을 하지 않으셨죠. 만약 지더라도 나중에는 어떻게든 승리를 쟁취하셨고요.”

“어릴 때 이야기야. 너나 나나 이제는 더 이상 어리지 않지.”

벽우진이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너무나 먼 과거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민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았다.

“미력하게나마 저 역시 전력을 다해 사형을 돕겠습니다.”

“짜샤. 그건 당연한 거야. 늙었어도 넌 내 사제야. 당연히 날 보필해야지. 물론 그 전에 얼른 강해지는 게 먼저지만. 천검문주 따위는 네 선에서 해결해야지. 안 그래? 나이 일흔이 넘은 녀석들 뒤치다꺼리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더욱 더 노력하겠습니다.”

투덜거리는 듯한 벽우진의 말에도 청민은 웃었다.

지금 이 순간 벽우진이 결정을 내렸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렇기에 청민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내 분명히 기억해둘 거야. 지금 네 말.”

“실망시키는 일 없을 겁니다.”

“음. 결의를 다지는 건 좋은데, 다치거나 죽지는 말자. 이왕이면 오래 오래 날 보좌해줬으면 해.”

“그것도 노력하겠습니다.”

너무 과하게 진지한 탓일까.

벽우진이 슬쩍 말을 바꿨다.

이제는 단 둘 밖에 남지 않은 사제였기에, 그리고 나이가 적지 않기에 벽우진은 살짝 걱정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나는 건 아닐까 하고.

어둠이 짙게 내린 야밤에 십여 개의 인영이 청하상단의 담벼락을 넘었다.

하나같이 검은색 야행복에 복면을 한 정체불명의 인영들은 담을 넘은 후 순식간에 내원으로 질주했다.

장원에 짙게 내린 어둠을 이용해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이동했던 것이다.

‘드디어 손에 넣는구나! 흐흐흐!’

열두 개의 인영 중 가장 앞장서서 달려가던 남자의 눈매가 귀에 닿을 것처럼 쭉 찢어졌다.

잠시 후에 벌어질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던 것이다.

동시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너무 흥분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소문주. 지금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부터 확실하게 끝냅시다.

-알겠습니다.

< 제 5장. 발정난 개새끼에게는 매가 약이지.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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