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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11화 (11/325)

< 제 4장. 역시는 역시네. -01 >

콰앙!

천검문주 공추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책상을 내려쳤다.

그러자 앞에 부복해 있던 심복이 몸을 떨었다.

지금 공추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어찌된 일이냐? 어떻게 백면귀랑 황면귀가 청하상단에 있는 거지?”

“그게, 그러니까···.”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무얼 하고 있었느냔 말이다!”

공추의 노성에 남자가 몸을 떨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문주님!”

“후우!”

공추가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의자에 몸을 늘어뜨렸다.

“괜찮으시다면 제 생각을 말해도 되겠습니까?”

“해 봐.”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주님도 아시겠지만 증거는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까요. 청하상단이 가지고 있는 건 그저 산적 나부랭이인 백면귀와 황면귀일 뿐입니다. 반면에 저희는 정도를 표방하는 천검문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누구의 말을 믿겠습니까?”

“흐음.”

공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그 역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짜증이 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을 뿐.

“복면을 쓰고 갔고, 따로 연락할 방법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정황상 의심은 하겠지만 대놓고 묻지는 못할 겁니다.”

“그럴 테지.”

청해성에서 천검문이 가지는 위상은 압도적이었다.

과거 곤륜파가 지녔던 위상만큼이나 말이다.

그런 만큼 감히 그에게 대놓고 따지거나 묻는 이들은 없을 터였다.

“청하상단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오늘처럼 공개적으로 일을 키웠다고 생각합니다.”

“증거가 있었다면 아마 바로 나를 찾아왔겠지. 그 정도 배짱은 있는 작자이니까.”

“맞습니다. 그러니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결국 무지렁이들은 잊고 말 테니까요.”

“그게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기는 하지. 하지만 기분이 상당히 더러워. 참고만 있어야 하니까.”

공추가 이를 드러냈다.

이렇게 모욕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만들어서였다.

하지만 천검문이 정도를 표방하는 만큼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건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정마대전 이후 백도문파들이 과거의 성세를 대부분 회복해서 자신들의 영역 너머를 넘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그들에게 아주 작은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되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청해제일문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무려 이십 년이 걸렸다.

그런 만큼 공추는 이 자리를 절대 놓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잠깐만 참으시면 됩니다. 청하상단은 그 후에 은밀히 손 보면 됩니다.”

“자식 놈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인지. 그 놈이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한창 혈기가 왕성하실 때 아닙니까. 그리고 서예지라면 소문주의 짝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본처 감은 아니지.”

공추가 피식 웃었다.

과거 한창 잘 나가던 청하상단이라면 모를까 이미 몰락할 대로 몰락한 청하상단은 청해제일문인 천검문과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서예지의 미모와 재색은 인정했다.

화용월태(花容月態), 단순호치(丹脣皓齒)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서예지는 절세가인이었다.

그러나 딱 그뿐이었다.

미모 외에는 천검문의 소문주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첩으로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암.”

공추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의 간지러운 곳을 심복이 가려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사실 청하상단에게는 기회를 준 것인데도 그것을 모르고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내 말이. 내 친히 손을 내밀어 주었건만. 넙죽 엎드려서 받지는 못할망정.”

공추가 혀를 찼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였다.

다 망해가는 상단을 일으켜 세울 방법이 있는데 그걸 거절하다니.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직 주제를 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지들이 아직 청해제일상단인 줄 아는 모양이야. 일단 알았으니 나가 봐. 가는 길에 휘준이도 좀 부르고.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상황이 이러니 당분간은 조용히 있어야지. 잠잠해질 때까지.”

“알겠습니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고는 대전을 나갔다.

그러자 넓은 대전에 혼자 남게 된 공추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누구일까. 백면귀가 근본 없는 산적 놈팡이라고 하나 그렇다고 무위가 낮은 건 절대 아닌데. 그렇다고 망해버린 곤륜파에서 도움을 주었을 리도 없고.”

탁탁탁.

공추가 손가락으로 태사의를 두드렸다.

애초에 청하상단이 백귀채를 어찌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을 벌인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을 해결해버리자 공추는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귀채를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 하던 곳이 청하상단이었으니까.

“알아보라고 지시해야겠군. 뭔가 냄새가 나. 아주 더러운 냄새가.”

“소자 왔습니다, 아버지!”

“공적인 자리에서는 문주님이라고 부르라 하지 않았느냐?”

“죄송합니다, 문주님.”

화려한 적의무복을 입고서 뒷골목 왈패처럼 건들거리며 대전 안에 들어왔던 공휘준이 넉살 좋게 웃으며 호칭을 바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세는 자유분방했다.

“오전 수련은?”

“완벽하게 끝마쳤습니다.”

“등 사범은 뭐라더냐?”

“나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흠.”

공추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늘 똑같은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기 때문이다.

사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 정도 수준에 이르면 공휘준 정도는 보는 순간 무경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이 가능하니까.

“백면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안 그래도 알아보는 중이다.”

“밑에 애들에게 듣고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산적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백면귀의 무공 실력은 청해성에서 한 손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제압을 당했다는 건 청하상단에 백면귀 이상 가는 고수가 있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겠지. 그래서 널 부른 것이다.”

공휘준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백면귀가 붙잡힌 거하고 자신을 부른 게 무슨 상관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당분간은 얌전히 있거라. 괜히 헛짓거리 하지 말고.”

“설마 참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참지 말고 싸그리 쓸어버릴까?”

“체면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면귀가 사로잡은 의문의 고수가 청하상단에 있다고 하나 저희의 전력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그리고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것을 해라. 오로지 여자만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만 하지 말고!”

공휘준이 순간 움찔 거렸다.

부친의 호통에 반사적으로 겁을 먹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공추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뿐인 후계자가 부족해도 너무나 부족한 것 같아서였다.

“더, 더 기어오르지 못하게 바짝 눌러줘야 하지 않습니까? 문주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이를 드러낸 짐승은 확실하게 짓밟아야 한다고요. 그래야 다시는 개기지 않는다고.”

“···그랬었지. 하지만 지금 상황을 봐라. 우리가 마도나 사도문파였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하지만 우리는 백도문파다. 그런데 백면귀가 헛소리를 지껄였다고 청하상단을 공격하면 청해성의 무인들이, 그리고 중원의 명문대파들이 우리를 어찌 생각하겠느냐?”

“어, 음.”

공휘준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렀다.

아무리 생각 없이 무대포로 살아가는 그이지만 세간의 시선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고를 쳐도 아버지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인지 아닌지를 생각할 머리는 있었기에 공휘준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파악했다고 이해를 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러니 당분간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정 여자가 생각나면 기녀들 끼고 놀고. 밖으로 싸돌아다니지 말고 장원에만 있으라는 얘기다.”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이 사태가 잠잠해질 때까지.”

“만약 그 틈을 타 청하상단주가 딸내미를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내버리면요?”

공휘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 정도로 서예지는 그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첫 눈에 반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어떻게든 서예지를 품고 싶었다.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고.

“끽해야 한두 달이다. 그 사이에 일이 벌어지겠느냐? 그렇다고 청하상단주 성격에 정략결혼을 시킬 리도 없고. 그럴 마음이었다면 진즉에 혼처를 알아봤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서예지라는 계집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더냐?”

“한 번 정도는 데리고 놀고 싶습니다. 솔직히 중원의 미녀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이지 않습니까?”

공휘준이 음심을 숨기지 않았다.

본능은 아주 당연한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물론 먹어서 탈이 날 것 같다면 적당히 숨겨야 하겠지만 청하상단은 어떻게 따져보아도 천검문보다 아래였다.

게다가 서예지를 품으면 청하상단 역시 집어삼킬 수 있고, 다시 한 번 청해성 천검문의 위세를 각인시킬 수 있었다.

때문에 공추 역시 이 계획에 반대하지 않은 것이었고.

“확실히 보기 드문 미색이긴 하지. 중원의 외곽인 여기에서는.”

“그래서 걱정이 되는 겁니다. 사실 서예지를 노리는 놈들이 저뿐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한들 제깟 놈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 청해성에서는 말이지. 그러니 너는 걱정 말고 잠자코 있어. 괜히 사달을 일으키지 말고. 알겠느냐?”

“···예.”

공휘준이 살짝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부친의 말이니 어쩔 수 없이 대답한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러가거라.”

“예.”

얼굴 가득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공휘준이 대전에서 물러났다.

그 모습에 공추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가 어느새 스물다섯이나 되었는데 어째 하는 행동은 어릴 때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독하게 할 수도 없는 게 공휘준은 그에게 있어 하나뿐인 자식이자 후계자였다.

“일단은 원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주지. 하지만 잠시뿐이다.”

공휘준에 대한 생각을 털어낸 공추가 이내 살벌한 안광을 뿌렸다.

어쭙잖게 반항을 해오는 청하상단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던 것이다.

동시에 대전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진후는 아들과 손자들을 이끌고 별채로 향했다.

세 사람이 하도 사형을 만나고 싶다고 성화를 부렸기에 아예 따로 시간을 잡았던 것이다.

그런데 악명 높은 백귀채를 혼자서 와해시켜서 그런지 서일국은 물론이고 손주들도 잔뜩 굳어 있었다.

“그렇게 얼어서 인사라도 제대로 하겠느냐?”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서요.”

“하긴. 이해는 한다. 근데 너무 긴장할 것 없다. 사형 성격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깐깐한 편은 아니니까.”

“깐깐한 건 아버지 쪽이시죠.”

아들의 직언에 서진후가 피식 웃었다.

그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었기에 차마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서였다.

“갑자기 데려가기가 싫어지는구나.”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습니다, 아버지.”

“입만 살아서는. 지천명에 가까워지는 나이를 생각하거라.”

“하하하.”

서일국이 어색하게 웃었다.

확실히 그의 나이 역시 적지 않아서였다.

똑똑똑.

아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별채에 도착한 서진후가 옷매무세를 한 번 가다듬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도 당연히 사형이었기에 예의를 다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또 달랐다.

‘혼자서 백귀채를 쓸어버릴 정도의 고수이니까.’

< 제 4장. 역시는 역시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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