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장. 네놈들이 우리 애들 건드렸냐? -04 >
벽우진이 가당찮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다른 이도 아니고 나름 방귀 좀 뀌는 백면귀가 고작 돈 하나로 움직였다고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돈으로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그러한 이유만으로는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다.
백면귀처럼 영악한 놈이 달랑 돈 좀 쥐어줬다고 움직일 리가 없었으니까.
“진짜입니다!”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과 거래를 했다고?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내가 그렇게 단순해 보여? 응?”
“끄윽!”
벽우진이 인정사정없이 백면귀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반항하고 싶어도 이상하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따로 마혈을 점혈 당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좋게 좋게 말해주니까 만만해 보였나봐. 금세 잔머리를 굴리는 것을 보면.”
‘언제 좋게 좋게 말했는데!’
백면귀가 속으로 부르짖었다.
벽우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폭력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가 찬 돌멩이에 죽어나간 부하들만 200여 명이 넘었다.
딱!
백면귀가 마음속으로 울부짖을 때 벽우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잠들어 있던 황면귀가 깨어났다.
물론 마혈을 점혈 당한 상태라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넌 좀 입을 다물고 있고. 물론 눈빛 교환도 안 돼.”
“으어으어···.”
발끝으로 아혈을 짚은 벽우진이 머리를 툭 찼다.
황면귀와 마주치지 않게 몸을 돌려버린 것이다.
그런 다음에 벽우진은 황면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어?”
“너에게 내 긴히 물어볼게 있어서 말이지.”
“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자신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벽우진 앞으로 날아가자 황면귀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의 한 수가 허공섭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였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기에 황면귀는 자기도 모르게 공손해졌다.
“천검문.”
“어···.”
벽우진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증거로 황면귀의 눈알이 뒤룩뒤룩 굴러가고 있었으니까.
“알고 있는 거 다 내뱉어 봐.”
“그, 그럼 살려주시는 겁니까?”
“누가 두령, 부두령 아니랄까봐 하는 말도 똑같구나.”
“아직 살아 있는 거죠?”
“당연하지.”
황면귀의 시선이 백면귀의 뒤통수로 향하자 벽우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미소가 황면귀에게는 참으로 섬뜩하게 다가왔다.
마치 지금은 살아 있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표정이라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 들었기에 황면귀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 살려주신다고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면 제가 알고 있는 걸 다 말하겠습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주제 파악을 참 못해. 내가 왜 둘을 살려놓았는지 모르겠어? 응? 설마 그렇게 머리가 안 굴러가는 거야?”
벽우진이 발끝으로 황면귀의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황면귀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어서였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자신의 머리통이 산산조각 나는 광경이 떠올랐다.
“으으!”
“입이 두 개인 이유를 알면 이렇게 뻗대지 못할 텐데. 역시 교육을 덜해서 그런가?”
콰아앙!
벽우진이 가볍게 구른 발구름에 땅이 진동했다.
진각도 아닌 그냥 가볍게 내려찍은 발을 중심으로 반경 1장이 푹 주저앉았던 것이다.
그러자 황면귀는 물론이고 굳어 있던 백면귀의 얼굴 역시 해쓱하게 변했다.
“우리 좋게 좋게 가자? 응? 너도 아픈 건 싫을 거 아냐? 아니면 혹시 취향이 그쪽이야? 맞는 게 좋아? 행복해? 짜릿해?”
도리도리!
황면귀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마혈을 짚혔기에 움직일 수 있는 궤적은 극히 좁았지만 그 부족한 부분은 눈알로 대신했다.
마음 같아서는 우렁차게 대답하고 싶은데 두려움 때문에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좀처럼 나오지가 않았다.
“이제 좀 말할 생각이 든 것 같네.”
“한 달 전 복면을 쓴 남자가 산채를 찾아왔습니다. 물론 저도 들은 내용입니다. 복면인이 찾아간 건 형님이었으니까요.”
“계속해.”
“복면인이 금와전장의 전표를 주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레 후 여기를 지나가는 청하상단의 상행을 공격하라고요. 그러면서 싹 다 죽여 버리라고 했답니다. 대신 물건들은 손대지 말라고요. 말이나 여자는 가져도 되지만, 물건은 가급적 원래 상태 그대로 보관하라고 했답니다. 나중에 천검문에서 오면 그대로 전달해 주라고 하면서요.”
이제야 원했던 내용이 나오자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게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은 그때 복면인이 천검문의 사람이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천검문 사람들이 찾아올 때 물건을 돌려주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증거가 없어. 얼굴이라도 알면 모를까 복면을 썼다며? 목소리 역시 변조했을 테고.”
“예에.”
황면귀가 눈치를 살폈다.
벽우진의 말마따나 명확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나 백면귀가 나서면 논란은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천검문 쪽에서 잡아뗄 게 분명했다.
“고작 돈 때문에 백귀채가 움직였다고는 생각하기 힘든데.”
“금액이 엄청 났습니다. 또한 청하상단은 더 이상 뒷배가 없기에 작업을 쳐도 후환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 정도로 큰 금액을 제시했습니다. 아마 천검문 말고는 그 정도 금액을 융통하기 힘들 겁니다. 누가 뭐래도 청해제일문은 천검문이니까요.”
“부족해.”
벽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로는 천검문을 압박할 수는 있어도 사태를 해결하기는 힘들었다.
때문에 벽우진은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원했다.
“제,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잠시 쉬고 있어. 다음은 백면귀한테 물어볼 테니.”
벽우진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너무나 자연스럽게 황면귀의 아혈이 짚어졌고 대신 백면귀의 아혈이 풀렸다.
“으음!”
“다 들었지? 이번에는 네 차례야. 혹시 생각나는 게 있으면 빨리 말해. 연락책을 불러낼 방법이라든지 말이야.”
“어···.”
백면귀가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복면인을 만났던 때를,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최대한 상세하게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런 백면귀를 벽우진은 가만히 내려다봤다.
야심한 시각에 서예지는 오빠인 서현기와 함께 부친의 집무실로 향했다.
저녁 식사 때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을 전해 들어서였다.
똑똑똑.
“들어오너라.”
문을 두드리기 무섭게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들어오라는 부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서예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오빠와 함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단주님.”
“사적인 자리니 편히 말하거라.”
“예. 아버지.”
서예지와는 전혀 다른, 시전에 나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외모를 가진 서현기가 곧바로 호칭을 바꾸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서예지가 앉았다.
“이 늦은 시각에 날 찾아온 건 역시 곤륜파에서 온 손님들 때문이겠지?”
“예. 할아버지의 사형께서 오셨다고 들었어요.”
“나도 그리 들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분께서 백귀채로 가셨다는 말도요.”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는 딸의 말에 서일국이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그 말을 듣고 그 역시 대경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떠난 인물이 청민도 아닌 젊은이라고 하자 더욱 놀랐다.
“불필요한 희생이에요, 아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지금쯤이면 결과가 나왔을 거다.”
서일국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청년이 떠났을 때가 오후라고 들었다.
그렇기에 지금쯤이면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났을 터였다.
“아직 늦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그랬을 수도 있지. 하지만 따라잡기에는 격차가 너무 커. 이미 상황이 종료되었을 수도 있고.”
“어째서 할아버지께서는 말리지 않으셨을까요?”
서예지가 얼굴 가득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청년의 의기는 높이 사지만 솔직히 말하면 만용이었다.
만약 무력으로 해결이 될 일이었다면 이렇게 가만히 있지 않았을 터였다.
당장에 강탈당한 물건을 되찾기 위해 백귀채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다.
백귀채와의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없어서였다.
“나도 그게 궁금하다. 아무리 여쭈어 봐도 일단은 기다려보라고만 하시니.”
“사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어요. 저희를 도와주러 떠난 분께는 죄송하지만.”
서예지가 냉정하게 말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에는 백귀채의 백면귀가 지닌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아마 청해성에서 일대일로 백면귀를 잡을 수 있는 무인은 한 손을 넘지 않을 터였다.
거기다 백귀채에는 절정고수로 알려진 백면귀의 의동생 황면귀도 있었다.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 희박하기는 하지만 만약에 그 남자가 엄청난 실력자라면? 곤륜파의 제자일 가능성은 없지만 곤륜파와 인연이 있는, 그러니까 은거고수의 제자일 수도 있잖아?”
“소설 같은 이야기에요.”
오빠의 말을 서예지는 단호하게 일축했다.
물론 진짜 서현기의 말대로 은거고수의 제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귀채에는 백면귀와 황면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숫자 역시 알려진 것만 해도 200명이 훌쩍 넘었기에 혼자서는 뭘 해도 무리였다.
“예지 말이 맞다. 우리는 냉정하게 상황을 볼 필요가 있어.”
“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어째서 할아버지께서 말리지를 않으셨는지를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을 해주지 않으니.”
서일국도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자신들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나 그렇다고 젊은이를 희생시키는 건 옳지 않아서였다.
더구나 생판 남이지 않던가.
차라리 청민이 나섰다면 적어도 이해는 되었을 것이다.
“일단은 달라질 상황에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럴 것 없다.”
“어?”
서예지는 물론이고 서일국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문 너머에서 세 사람에게 아주 익숙한 음성이 들려서였다.
달칵.
이윽고 문이 열리며 긴 수염이 인상적인, 더불어 깐깐한 눈매를 가진 서진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세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앉아라. 너희들도.”
“예.”
갑작스러운 등장이었으나 누구 하나 놀라지 않았다.
전대 단주인 서진후가 청하상단에서 가지 못할 곳은 없어서였다.
게다가 서예지의 경우 조부와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의구심이 많은 것 같구나.”
“사실 무모한 행동이지 않습니까. 저만 해도 아버지의 말을 듣고 믿기지가 않았는데요.”
“흠. 그럴 테지. 이해한다. 내가 너였어도 그랬을 테니.”
“어째서 혼자 보내신 겁니까?”
서진후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물론 다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꺼림칙했다.
일단 그보다 윗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벽우진을 자신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아직은 시원하게 말해줄 수 없지만 한 가지만 말해주자면 나로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에게는 믿기 힘든 이야기이겠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 고수입니까?”
“내가 보기에는. 그리고 청민 사형께서 장담하시기도 했고.”
“으음!”
서일국은 물론이고 서예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만약 서진후의 말대로 청년이 정말 고수라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면귀는 강해요. 백귀채의 인원 역시 적지 않고요. 그런 곳에 혼자 가는 건 너무나 무모해요.”
“그게 일반적인 생각이지.”
서진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약 벽우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역시 같은 판단을 내렸을 터였다.
“저기 단주님! 오후에 나갔던 손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때 뜻밖의 소식이 집무실을 강타했다.
밖에서 하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던 것이다.
< 제 3장. 네놈들이 우리 애들 건드렸냐?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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