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장. 네놈들이 우리 애들 건드렸냐? -02 >
벽우진이 뒷짐을 진 채로 땅을 박찼다.
그런데 한 번 박찰 때마다 그의 신형이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십여 장은 가뿐히 날아갔던 것이다.
“이 근처인 거 같은데.”
성도인 서녕에서 동남쪽에 자리 잡은, 황중현의 중간 정도쯤에 자리 잡은 흑악산을 돌아다니며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백귀채의 산채가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벽우진은 감각을 확장했다.
공력을 이용해 자신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을 훑어 내려갔던 것이다.
“가장 좋은 건 나를 잡아먹겠다고 달려드는 건데 혼자라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고.”
옷이라도 비싸 보이거나 화려했다면, 부잣집 자제처럼 보이기라도 했으면 옳다구나 하고 달려들었겠지만 현재 그의 옷차림은 낡디 낡은 무복 차림이었다.
즉 돈이 전혀 없어 보이는, 거지와 다름이 없었기에 산적들이 노릴 가능성은 전무했다.
“생각을 잘못했어. 저잣거리 포목점에서 옷 좀 샀어야 했는데.”
무작정 뛰쳐나온 자신의 잘못을 곱씹으며 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벽우진은 기감을 이용해 인기척을 찾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 결국에는 일일이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찾았다.”
해가 서산에 걸렸을 때, 구름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산속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끝에 드디어 인기척을 발견했던 것이다.
동시에 벽우진의 신형이 귀신처럼 사라졌다.
“아오. 오는 놈들도 없는데 경계는 왜 서라고 하는 건지.”
“그러니까. 이제는 좀 쉬엄쉬엄 해도 되는데. 영업을 뛰는 것도 아니고.”
“쳐들어 올 거였으면 진즉에 쳐들어왔겠지.”
“내 말이. 아마 이대로 시간만 하염없이 흐르다가 천검문에 팔려가겠지.”
“야야, 말 조심해. 두령이 가급적이면 천검문은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그랬잖아.”
시시껄렁한 자세로 목책에 기대 하품을 하던 장정이 퍼뜩 놀라 소리쳤다.
지금이야 자신들만 있다지만 납치한 여자들이 들어서 좋을 것은 없어서였다.
“뭐 어때? 계집년들이야 안에 있는데. 우리 목청이 아무리 좋아도 저 안쪽까지는 안 들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가뜩이나 산속에서는 소리가 멀리까지 퍼지는데.”
“들리겠어? 즐기느라 바쁠 텐데. 아오. 나도 얼른 일 끝내고 가서 한 잔 거나하게 들이켜야 하는데. 너도 봤지? 이번에 데리고 온 년들 얼굴이 제법 반반한 거?”
“흐흐흐!”
털북숭이 장정이 대답 대신 음흉하게 웃었다.
이번에 납치한 여자들의 미색은 확실히 상급이라 해도 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깟 것들이 들으면 또 어때? 싹 다 죽여서 살인멸구하면 되지. 그런 적이 한두 번인가?”
“가장 확실하긴 하지.”
“역시나 쓰레기 놈들이었구나.”
“누구냐!”
난데없이 위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두 장정이 화들짝 놀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서 그 중 한 명은 종이 있는 우측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퉷!
하지만 남자는 종에 매달린 줄을 잡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소리와 함께 강력한 충격이 손등을 강타해서였다.
뒤이어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감촉이 손등에서 느껴졌다.
“으억! 뭐, 뭐야?”
“뭐긴? 벌레한테 뱉은 내 고귀한 침이지.”
“이 병신은 뭐야!”
“병신은 너고.”
동료가 손등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자 함께 경계를 서던 장정이 창을 내질렀다.
산적 나부랭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깔끔한 기습공격이었다.
다만 상대가 나빴다.
스윽.
가까운 거리에서, 그것도 기습과도 같은 찌르기였으나 벽우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뒷짐 진 자세에서 고개만 옆으로 살짝 꺾는 것으로 공격을 피해내고는 그대로 입을 오물거렸다.
“죽어!”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하자 장정이 재차 창을 휘둘렀다.
그뿐만 아니라 손등에 침을 맞았던 남자 역시 종을 향해 슬금슬금 움직였다.
믿기지는 않지만 침 뱉기 공격으로 손이 부어 주먹이 쥐어지지 않기에 반대편 손으로 줄을 잡아 종을 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또 다시 익숙한 소리와 함께 머리가 새하얘졌다.
“끄륵!”
“무진장 허약하네. 이런 애들이 도대체 왜 악명이 높은 거지?”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간질 환자처럼 몸을 떨어대는 장정과 발로 찬 돌멩이에 이마가 깨져 절명한 남자를 번갈아보며 벽우진이 혀를 찼다.
이렇게나 허약한 녀석들이 청해성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산적들이라고 하자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두목만 강한 건가. 뭐, 우두머리만 강해도 산채가 유지는 될 테니까.”
혀를 차며 둘을 번갈아보던 벽우진이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생각할 가치가 없기에 이동한 것이었다.
“침입자다!”
“종을 쳐!”
뎅뎅뎅뎅!
산채 내부로 들어간 벽우진은 이내 침입한 것을 들켰다.
아니, 들켰다기보다는 그냥 휘적휘적 중심부를 향해 걸어가다가 산적들과 마주쳤다는 말이 맞았다.
애초에 벽우진은 숨어서 움직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냐!”
“어떻게 들어왔느냐!”
“말이 참 많아.”
퍼퍽!
더 이상의 전진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앞을 가로막았던 산적들이 죄다 허물어졌다.
바닥에 널리고 널린 돌멩이들을 벽우진이 발로 차서 머리통을 죄다 터트려버렸던 것이다.
그 모습에 종소리를 듣고 우르르 몰려오던 산적들이 주춤거렸다.
자신들이 모여들었음에도 전혀 주눅 든 기색이 보이지 않자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던 것이다.
“누, 누구냐? 여기는 왜 왔지?”
“왜 오긴. 볼 일이 있어서 왔지. 여기 두목 어디 있어? 백면귀라고 그랬나? 맞지?”
“젊은 놈의 새끼가 입이 상당히 짧구나.”
혼자임에도 이상할 정도로 당당한 벽우진의 모습에 산적들이 오히려 당황할 때 8척이 훌쩍 넘는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뿌리며 산적들을 가르고서 나타났던 것이다.
특히 일부러 그러는 건지 습관인지 거한은 웬만한 어린아이 크기의 도끼를 장난감처럼 돌렸다.
“젊게 봐줘서 고맙긴 한데, 안타깝게도 네놈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이가 많단다. 지금 보이는 것에 딱 58만 더하거라, 아가들아.”
“큭큭큭!”
마치 노인인 것처럼 꼰대질을 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거한이 흉소를 흘렸다.
하지만 두 눈만큼은 절대 웃지 않았다.
오히려 스산한 살기를 흘렸다.
“짜증나면 참지 말고 덤벼. 인내심도 없어 보이는 녀석이 어디서 사람 행세야?”
“맞아. 어차피 죽일 놈인데 대화는 필요 없겠지.”
쌔애액!
거한이 그대로 도끼를 휘둘렀다.
태산도 갈라버릴 듯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끼날이 향하는 곳에는 벽우진이 있었다.
콰앙!
거침없이 휘둘러진 거한의 도끼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혈흔은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기습처럼 휘두른 참격을 벽우진은 피해냈던 것이다.
“넌 좀 낫네.”
“···어떻게?”
“뭘 어떻게 피해? 눈깔 삐었어? 옆으로 한 걸음 움직였잖아?”
벽우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마치 보고도 모르냐고 타박하는 말투였다.
하지만 그 말에도 거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흔들리는 눈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근데 그래 봤자 오십보백보야.”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벽우진이 입을 오물거렸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침을 뱉었다.
“켁!”
그 공격에 장한은 말 그대로 눈 뜨고 당했다.
뜬금없이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공력이 실려 있는 침 뱉기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침 뱉기라고 무시할 수 없는 게 그 침을 뱉은 게 벽우진이었고, 그 안에는 상청무상신공(上淸無上神功)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쿵!
눈을 뚫고 들어가 단숨에 뇌를 헤집어버리는 잔혹한 침 뱉기 공격에 거한이 단말마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그러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심지어 침조차 삼키는 이가 없었다.
절륜한 무공을 보인 것도, 그렇다고 신출귀몰한 움직임을 보인 것도 아닌 그저 단순한 침 뱉기로 백귀채 서열 10위를 쓰러뜨리자 산적들은 본능적으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 놈의 서열이 제법 높았나봐? 그렇게나 얼어있는 걸 보면.”
“누, 누구십니까?”
“이제야 존장에 대한 예우가 나오는구만? 역시 이곳도 무림이야. 크크!”
한순간에 달라진 말투에 벽우진이 키득거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두 눈에서는 살벌한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어디서 오신 겁니까?”
“그게 중요해? 난 아닌데. 나한테 중요한 건 네놈들 두목이야. 백면귀 어디 있어? 아니, 가기도 귀찮으니까 불러 와. 내가 하루 종일 움직였더니 삭신이 좀 쑤셔서.”
산적들이 하나같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를 봐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더구나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듯한 젊은 놈이 계속 늙은이처럼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반로환동?”
그때 산적들 중 한 명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젊은데 늙은이처럼 행동하고 또 무공이 고강해 보이자 한 단어가 절로 떠오른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반로환동은 아니다. 내 몸은 아직 파릇파릇한 이십대거든.”
‘근데 왜 늙은이 척이야!’
모여 있던 산적들이 눈빛으로 똑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도 벽우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산적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근데 확실히 무식한 놈들이긴 한 거 같아. 내 분명 네놈들 두목을 대령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움직이는 이들이 없는 걸 보면.”
씨이이잉!
그때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렸다.
제법 멀리서 예리한 소성과 함께 무언가가 벼락같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스윽.
그러나 이번에도 벽우진은 고개만 까딱이는 것으로 피해냈다.
기습과도 같은 화살 공격을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흘려보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그 광경에 산적들이 다시 한 번 입을 쩍 벌렸다.
산적들은 누가 쏜 화살인지 알고 있어서였다.
“궁귀 형님께서 쏜 화살을 어찌 저리 쉽게···.”
“지, 진짜 고수다. 진짜 고수가 온 거야!”
“내가 이래서 청민을 빨리 키우려고 했던 건데. 에휴.”
산적들이 웅성거리거나 말거나 벽우진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애초에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산적들이 떠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씨이잉! 씨잉!
그러는 사이 화살이 연거푸 날아왔다.
벽우진의 앞쪽에 수십 명의 산적들이 있음에도 전혀 거리낌 없이 화살을 날려댔던 것이다.
물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기에 산적들이 맞을 가능성은 낮았지만 그럼에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푹푹푹!
정확히 벽우진을 겨냥하고서 날아온 화살들이 덧없이 바닥에 꽂혔다.
놀랍게도 벽우진은 단 하나의 화살도 몸에 닿는 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날카로운 눈빛으로 화살을 날린 산적을 노려봤다.
“참으로 얍삽하게 생긴 놈이로다.”
“여기까지 침을 뱉어 보시지?”
미꾸라지처럼 피해내는 벽우진을 도발하려는 듯이 거의 자신의 키만 한 대궁을 들고 있는 중년인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든 벽우진의 평정심을 흐트러뜨려 화살을 박아버릴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벽우진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퉷!
궁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벽우진이 침을 뱉었던 것이다.
그것도 허리의 반동을 이용한 게 아니라 빳빳하게 선 자세에서 침을 뱉었다.
한데 그 침이 마치 암기처럼 순식간에 10장(30m)도 넘는 거리를 단숨에 관통하며 궁귀의 이마를 꿰뚫었다.
“구, 궁귀 형님!”
< 제 3장. 네놈들이 우리 애들 건드렸냐?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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