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7화 (7/325)

< 제 3장. 네놈들이 우리 애들 건드렸냐? -01 >

“천검문의 반응은 어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혼사에 대한 얘기를 거둔 것도 아니고요.”

“느긋하게 기다리겠다는 심보로곤.”

“···그런 것 같습니다.”

서진후가 답답한 얼굴로 힘겹게 대답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벽우진과 청민에 대해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무언가를 바라는 기색을 띠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 곤륜의 속가제자라는 걸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청민의 말마따나 치졸하고 옹졸한 녀석들이네.”

“그런 놈들이 백도를 운운한다는 게 참 어이가 없습니다.”

“말했잖아. 힘 있는 놈이 장땡인 세상이 강호라고. 힘도 있고 정의로우며 도리를 아는 곳도 있지만 그런 곳들은 말 그대로 소수이지. 괜히 명문이라 부르는 게 아니고. 아, 명문대파라고 해서 꼭 좋은 놈들만 모여 있는 건 아니지. 사람 사는 곳이 괜히 개판이라고 하겠어.”

“개판까지는···.”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져버리는 벽우진의 말에 청민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벽우진은 당당했다.

“사실인데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그건 아니지만요.”

“어쨌든 문제는 산적 놈들에게 강탈당한 물건이랑 천검문이랑 짝짜꿍 했다는 증거잖아?”

“그렇죠.”

청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이 길어져서 그렇지 본론은 저렇게 딱 두 가지뿐이었다.

해결책도 간단했고.

다만 그 해결책을 실행하기가 어려워서 문제인 것뿐이었다.

“쉽네.”

“예?”

“다시 빼앗고 천검문이랑 입이 닿아 있는 녀석 잡아오면 되는 거 아냐?”

“말은 쉽습니다만.”

서진후가 어색하게 웃었다.

말처럼 쉬웠다면 그가 이 나이 먹고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서진후는 세월이 흘렀을 뿐 벽우진은 여전히 약관의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하기에도 쉬워. 물론 너희들에게는 아니겠지만. 이 녀석이 얼른 컸다면 내가 직접 움직일 필요가 없었을 텐데. 쯧! 얼른 영약을 구해서 먹여야지.”

“예?”

“네 선에서 해결될 일이었으면 나한테까지 안 왔을 거 아냐?”

“허허허···.”

이번에는 청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였다.

“너도 꼬장꼬장한 기색은 여전하다만 몸이 예전 같지 않고.”

“촌부가 다 되었죠. 허허. 아마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이렇게 돌아다니지도 못했을 겁니다.”

“나를 다시 만나지도 못했겠지.”

“맞습니다.”

서진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에게도 적지 않은 나이가 69세였다.

평범한 촌부였다면 아마 진즉에 관에 들어갔을 터였다.

“지도나 좀 가져와 봐.”

“지도요?”

“응. 백귀채가 있는 지도. 녹림 녀석들이니까 산속에 꼭꼭 숨어 있겠지만 그래도 어느 산에 있는지 대충은 알 거 아냐?”

“알고는 있습니다만. 혹시 다른 분도 계시는 겁니까?”

지금껏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던 서진후가 눈을 빛냈다.

벽우진이 시간을 뛰어 넘어 돌아온 마당에 다른 제자가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곤륜파의 제자는 우리 셋뿐이다.”

“으음!”

“장사꾼이라는 놈이 속내를 너무 쉽게 보이는 거 아니냐? 그것도 하늘같은 사형들 앞에서.”

“죄, 죄송합니다.”

“뭐 이해는 해. 내가 너였어도 얼마나 답답하고 짜증나며 실망스럽겠어. 그런데 그거 아느냐?”

벽우진의 표정이 달라졌다.

장난기가 사라지며 한없이 차가운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그 서슬 퍼런 눈빛에 서진후는 갑자기 등골이 시렸다.

“그깟 산적 놈들에게 곤륜파의 제자가, 가깝게는 내 사제가 핍박받고 있다는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야.”

“사, 사형.”

“얼른 가져 와. 바로 갔다 올 거니까.”

“예, 예!”

서진후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형의 냉엄한 눈빛에 반사적으로 노구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서진후가 접객당을 나가자 청민이 빙그레 웃으며 벽우진을 쳐다봤다.

“청범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예의가 있더라고. 직접 움직인 것도 그렇고.”

“그래서 그렇게 화를 내신 겁니까? 사제니까?”

“그런 것도 있고, 갑자기 짜증이 솟구친 것도 있고. 청범을 보니 왠지 모르게 곤륜산이 떠올라서 말이지.”

폐허가 되어버린 곤륜파의 터를 떠올리며 벽우진이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은 외모만 젊은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아니지. 애초에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늦게 흐른 걸 수도 있지. 안과 바깥의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면 모든 게 이해가 되니까. 다만 이게 말이 안 되는 일이라서 그렇지.’

벽우진이 입맛을 다시며 내심 중얼거렸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게 곤륜파의 시조가 살아가던 시절에는 온갖 기기묘묘한 일들이 벌어졌었다.

지금이라면 소설이라는 둥 말도 안 된다는 둥 떠들어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진짜 있었던 일들도 있었다.

“만약에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거나 직급이 낮은 아이가 왔다면 어떻게 하셨을 겁니까?”

“뭘 어떻게 해? 그냥 인사하고 가는 거지. 인연이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말이야.”

“···정말요?”

청민이 믿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사형의 성깔을 생각하면 그렇게 조용조용히 지나갈 것 같지 않아서였다.

아마 길길이 날뛰지 않았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설마 내가 청하상단을 뒤집겠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에이. 그래도 속가제자가 일으킨, 우리 사문과는 연이 깊은 곳인데 내가 어떻게 그래. 더구나 난 장문인도 아닌데.”

“사형은 그런 거 신경 안 쓰시잖아요.”

“써. 다만 그 전에 내가 엎는 걸 감당할 수 있나, 없나를 잠시 고민할 뿐.”

“···역시.”

“눈빛이 심히 불경하다?”

벽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존경심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내도 모자랄 판에 아주 불순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봐서였다.

그러자 청민히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흠흠!”

“이미 다 봤다.”

“그런 거 아닙니다.”

“갑자기 훌쩍 떠나고 싶어지네. 중원으로.”

“허허. 왜 그러십니까?”

토라진 듯이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돌리는 벽우진의 모습에 청민이 살살 달래듯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벽우진은 청민을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어떻게 해야 더 빨리, 아니 더 힘들게 수련을 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사형. 진짜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전 단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고마움은 무슨. 완전 쓰레기를 쳐다보는 눈빛이었는데.”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순진했던 청민은 이제 없구나. 역시 세월은 무상해.”

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의 표정과 음성에는 진심으로 씁쓸하다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진짜 아니에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과도 같다는 말이 있지.”

“허참.”

“저 왔습니다, 사형들!”

그때 청민에게 구세주가 찾아왔다.

서진후가 지도를 가지고 다시 접객당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얼마나 급하게 다녀왔는지 서진후의 긴 수염이 양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수련을 허투루 하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배운 것만큼은 확실하게, 꾸준히 했습니다.”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내 다녀와서 네 무공도 한 번 봐주마.”

벽우진이 언제 토라졌냐는 듯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육체야 노쇠화를 피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수련한 티가 나서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형.”

“왜?”

“진짜 가시려는 겁니까?”

“어. 보니까 거리도 얼마 안 먼데?”

벽우진이 마치 집 근처 마실이라도 간다는 투로 말했다.

긴장감이나 각오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말을 타고도 하루 종일은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건 보통 사람들 얘기고.”

“더구나 혼자서 가시는 거 아닙니까?”

“나 혼자로도 넘치지. 아니. 과분하지.”

진심으로 귀찮다는 듯이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청민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만약 청민이 그가 생각하는 수준의 무위를 갖추었다면 직접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진짜 혼자 가시게요?”

“왜? 산적 놈들에게 뒈질 것 같냐?”

“그런 뜻이 아니오라···.”

서진후가 말끝을 흐렸다.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표정이나 어조는 달랐다.

아무리 그가 곤륜파의 마지막 남은 고수라고 하나 백귀채는 결코 만만한 산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녹림칠십이채에는 속하지 않지만 그건 따로 연관이 없어서 그렇지 채주인 백면귀(白面鬼)는 청해성에서 날고 기는 고수 중 한 명이었다.

천검방주에게는 밀리겠지만 적어도 청해성의 최고수 다섯 명을 뽑으면 말석에는 들어갈 수 있는 실력자였다.

“죽으면 어때? 어차피 방법도 없는데. 게다가 방문하는 사람들도 없으니 문지기랑 하녀들만 입단속 시키면 내가 여기 왔는지 아는 사람도 없을 테고.”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형. 저는 단지 사형이 걱정되어서 그렇습니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실력 아니다. 그 정도 실력이었으면 탈출도 못했어. 그 분께서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준비해 놓으셨는데. 내가 갇혀 있던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고 잠이 안 와.”

벽우진이 진짜로 이를 갈았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시공간의 진에 갇혀 있던 때는 그에게 있어 지옥에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련하기도 했다.

이제는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니까.

“사형. 차라리 다 같이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늦어. 적들이 생각하지 못했을 때가 가장 좋은 기회야. 아마 경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을 걸? 나름 청해성에서 제일 큰 산채라며?”

“그렇긴 합니다만.”

“기다리고 있어. 빠르면 저녁,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올 테니까.”

벽우진이 지도를 품속에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방향을 얼추 확인했으니 이제는 직접 움직여서 찾을 생각이었다.

물론 정확한 위치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곤륜산에 비하면 백귀채의 산채가 있는 산은 동네 뒷산이나 마찬가지였다.

뒤지다 보면 결국 나오게 되어 있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네 몸뚱이로 어딜 같이 가? 청범이랑 해후나 제대로 하고 있어. 정 몸이 근질근질 거리면 연무장에서 둘이 비무라도 하던가.”

“아닙니다. 저라도 사형을 보필하겠습니다.”

“여기에 가만히 있어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칼 같이 거절하고서 창문 밖으로 나가버리는 벽우진의 모습에 청민은 물론이고 서진후 역시 득달같이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볼 수 있는 건 없었다.

분명 방금 전에 나갔건만 벽우진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이다.

접객당이 장원에서 외곽에 위치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허어.”

“아니, 어느 틈에 사라지신 거지? 그보다 청민 사형. 청류 사형은 괜찮을까요?”

벽우진이 호언장담을 했지만 서진후는 걱정이 되었다.

괜히 혈기를 참지 못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청민의 표정은 담담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아. 사형이 옛날의 말썽꾸러기가 아니라는 걸. 그리고 내가 감히 가늠하지 못할 경지에 있다는 것도.”

“그 정도입니까?”

“내 내상을 이틀 만에 치료했어. 게다가 무공도 직접 가르쳐주고 계시지. 사문의 진신절학을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

“허어.”

서진후의 눈빛이 달라졌다.

단순히 알고 있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다르다는 걸 그 역시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더불어 청민이 보는 것보다 더 벽우진을 믿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막말로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 일단은 기다려볼 수밖에.”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길 기도해야지.”

< 제 3장. 네놈들이 우리 애들 건드렸냐?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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