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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6화 (6/325)

< 제 2장. 청하상단(靑厦商團). -03 >

청해성의 성도인 서녕에 도착한 벽우진은 청민의 안내에 따라 곧장 청하상단으로 향했다.

상황이 꽤나 안 좋게 흘러가고 있었기에 성도 구경은 나중으로 미루고 바로 청하상단을 찾아갔던 것이다.

“흐음. 규모에 비해 인원이 딱히 많은 것 같지 않은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상주인원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요. 상단인데 상행을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상단이라고 빈객들은 좀 받지 않나? 손님이라도. 그런데 딱히 고수라고 할 법한 이들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그게 느껴지십니까?”

벽우진과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청민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무위가 되면 이런 걸 느낄 수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당연하지. 나 정도 되면 그냥 슥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것들은 알아낼 수 있어. 나보다 강하다면야 내가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 정도 되는 위인은 없는 것 같은데?”

“다행스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네요.”

“앞으로는 달라지겠지. 물론 우리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손을 잡아주려고 해도 내팽개치면 답이 없는 거 알고 있지?”

“어,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한손이라도 아쉽지 않을까요?”

청민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가 생각하기로 벽우진이 염려하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해서였다.

“이 세상에 절대라는 일은 없어. 하지만 예외, 변수,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수도 없이 일어나지. 그러니까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지 마.”

“예, 사형.”

청민은 휘적휘적 걸어가는 벽우진의 뒤를 황급히 따랐다.

이윽고 두 사람은 청하상단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과 마주쳤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곤륜산에서 왔네. 청민이 왔다고 단주나 부단주께 말을 전해주시면 아실 걸세.”

“약속이 되어 있으신 겁니까?”

문지기가 조심스럽게 청민과 벽우진의 행색을 살폈다.

워낙에 뜨내기들이나 잡놈들이 단주와 부단주를 거론하며 어떻게든 만나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기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살펴볼 수밖에 없어서였다.

“미리 약속은 되어 있지 않지만 곤륜에서 왔다고 하면 알아들을 걸세.”

“아!”

곤륜이라는 말에 문지기 중 한 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뒤늦게 자신이 곤륜산에서 왔다는 청민의 말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공손한 자세로 두 사람에게 허리를 숙였다.

“따라오시죠.”

정중한 문지기의 태도에 청민은 빙그레 웃으며 따라 나섰다.

반면에 벽우진은 마치 구경꾼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곤륜파를 제외하면 이렇게 큰 장원을 처음 보는 것이기에 신기해하는 것이었다.

유람을 하기는 했지만 명소라기보다는 그냥 발 가는 대로 돌아다니기도 했고.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알겠네.”

“하인들이 간단하게 마실 차를 가져다 드릴 겁니다. 그럼.”

안내했던 문지기가 다시 한 번 정중히 머리 숙여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려준 청민은 몸을 돌려 사형을 찾았다.

“어떠십니까?”

“깔끔하네.”

“성세가 대단했던 시절에는 청해성 제일 가는 상단이라고 들었습니다.”

“곤륜파가 건재했을 때 이야기겠군.”

청민이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청하상단의 성세는 곤륜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였다.

동시에 아직도 곤륜파의 제자임을 표명하고 있는 청하상단이 고마웠다.

“앞으로는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글쎄.”

벽우진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실 그는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장문제자가 아니었기에 그는 곤륜파를 반드시 재건해야 한다는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책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기에 벽우진은 고민 중이었다.

‘이 녀석은 은근히 바라는 것 같지만.’

벽우진의 시선이 청민에게로 향했다.

처음 만났을 때 사제는 단순히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기뻐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되었기에 죽은 줄로만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자신의 무위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청민은 은근슬쩍 속을 떠보고 있었다.

똑똑똑.

잠시 후 문지기가 말한 대로 하녀 한 명이 나무 쟁반에 차를 가져왔다.

선선한 날씨인 만큼이나 시원하게 준비된 냉차였다.

“분위기가 썩 좋지는 않네요.”

“그럴 수밖에. 천검문이 치사하게 압박하는데 좋을 리가 있나. 약자의 설움 같은 거지.”

“사문이 건재했더라면 천검문 따위가 날 뛰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죠.”

“그랬을 테지.”

벽우진은 순순히 인정했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대문파가 곤륜파였다.

아마 곤륜파가 건재했다면 천검문주는 아무리 소문주가 청하상단의 금지옥엽을 탐내더라도 절대 이런 식으로 압박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오히려 정식으로 제안을 보냈으면 보냈지.

“얼굴만 보고 가시지는 않으실 거죠?”

“하는 거 봐서? 말했잖아. 여기서 거절하면 별 수 없다고. 판단을 존중해 줘야지.”

“빨리 와야 할 텐데.”

청민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이는 일흔다섯이나 되었지만 하는 행동은 약관의 청년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어디로 튕겨나갈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가졌기에 청민은 내심 단주가 왔으면 싶었다.

그래도 단주는 그와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오겠지.”

“반 시진(1시간) 정도는 기다려주실 거죠?”

“그래도 오후에 도착했는데 나가지 말라고 하면 하룻밤 정도는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설마 찾아온 손님한테 숙박비를 받겠어?”

“······.”

뜬금없는 숙박비 타령에 청민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돈이 궁한 것도 아닌데 숙박비 운운하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흥청망청 썼던 게 벽우진이었다.

똑똑.

넋을 놓은 듯 멍하니 있던 청민의 귓가로 접객당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청민은 물론이고 벽우진의 시선 역시 출입문으로 향했다.

“접니다, 사형.”

“어?”

“들어가겠습니다.”

청민만큼이나 늙수그레한 음성과 함께 접객당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낡은 경장 차림의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청범(淸範)아.”

“오랜만입니다, 청민 사형. 허허허.”

부드러운 인상의 청민과는 다르게 깐깐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가진 청범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망설이지 않고 청민의 두 손을 맞잡았다.

“네가 어쩐 일이냐?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말은 들었는데.”

“저도 이제는 나이가 적지 않지 않습니까. 아들놈이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물러나야지요. 그동안 너무 열심히 일을 하기도 했고요. 근데 너무 잘 쉬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움직이려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으음.”

청민이 침음을 흘렸다.

마지막에 힘들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아서였다.

“헌데 다른 분과 함께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꽤나 젊은 청년이라고 하던데 혹시 제자를 들이신 건지요?”

“그럴 리가. 허허.”

농이 섞인 청범의 말에 청민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벽우진을 쳐다봤다.

“그럼 누구입···.”

정겹게 청민과 인사를 나눈 청범, 달리 청하상단의 전대 단주인 서진후가 이제야 벽우진을 바라봤다.

그런데 벽우진을 보는 순간 서진후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날 기억하는 모양인데?”

“58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렇다고 사형이 쉽게 잊혀질 사람은 아니죠. 얼마나 유명하셨는데요.”

“성격 좋은 걸로?”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 아니죠?”

마치 어린 시절처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정작 서진후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넋을 잃은 얼굴로 벽우진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저, 정말 청류 사형이십니까?”

“아니면 청민이 나보고 사형이라고 하겠느냐?”

“어, 어떻게···.”

“설명하자면 길어. 그냥 갇혔다가 탈출했는데 58년이 흘러 있었어. 꼬맹이였던 너희들이 늙은이가 될 정도의 시간이 말이지.”

서진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요약을 해도 너무 무식하게 요약을 해서였다.

결국 청민이 다시 한 번 설명했다.

“허어. 어떻게 그런 일이···.”

“나도 설명 못해.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냥 이렇게 되었다고 납득할 뿐이지.”

“제 눈으로 보고도 신기하네요.”

“난 노인네가 된 너희들이 더 신기해.”

“허허허!”

세월이 흘렀음에도 기억 속의 청류 사형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에 서진후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말투며 표정이며 전부 다 똑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망해버린 곤륜파의 제자를 누가 따라할 이유도 없었고.

한때는 중원을 호령했던 그 많은 상승절학 대부분이 소실된 상태인데 누가 곤륜파를 탐을 낼까.

남아 있는 건 청하상단과 청민뿐이었다.

“얘기는 오는 길에 대충 들었다. 하지만 역시 당사자에게 듣는 게 가장 정확하겠지.”

“어떤 일을 말씀이십니까?”

청범은 벽우진을 의심하지 않았다.

칠십 가까이 살아오면서 세상에는 별의 별 일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렇다고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난 것도 아니기에 서진후는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하물며 반로환동의 경지도 있는데 늙지 않는 것쯤이야.

“시치미 떼지 말고. 설마 하니 나에게 귀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지?”

“그럴 리가요.”

벽우진의 눈빛이 무거워지자 서진후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저런 표정일 때의 벽우진에게 반항하면 안 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어서였다.

말썽꾸러기이자 천덕꾸러기로 불린 벽우진이었지만 그렇다고 만만한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성격이 엉뚱해서 그렇지 실력만으로 따지자면 동년배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던 기재가 바로 벽우진이었다.

“설명해 봐.”

“옙.”

거만하게 탁자 위에 팔을 괴고서 하는 명령에 서진후는 마치 58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작금의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청민은 물론이고 벽우진의 표정 역시 심상찮게 변해갔다.

“허어. 들었던 것보다 더 치졸하구나.”

“뭐, 그렇겠지. 천검문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제대로 떠벌릴 리가 있나.”

자세한 서진후의 설명에 청민이 장탄식을 흘렸다.

반면에 벽우진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투였다.

만약 진짜 정도(正道)를 걷는 이들이라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오지는 않았을 터였기 때문이다.

강압적으로 청하상단을 압박하지도 않았을 테고.

“일단 가장 큰 문제는 백귀채(白鬼寨)에 강탈당한 물건들이겠구나.”

“예. 그게 현재는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신용이 걸려 있어서요.”

“하지만 쉽지 않겠지. 정황을 보아하니 백귀채 뒤에는 천검문이 있는 것 같은데.”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일단 강탈당한 물건이라도 되찾으려고 무사들을 모집하고 있는데, 천검문이 손을 쓴 것인지 낭인들 모으기도 쉽지 않습니다.”

서준후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주야장천 서녕 곳곳은 물론이고 청해성이 좁다하고 돌아다녔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볼 요량으로 말이다.

하지만 천검문과 엮여 있어서 그런지 그 어느 곳 하나 청하상단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친우들이라고 생각했던 이들 역시 말이지.’

혈연으로 맺어져 있는 추열문을 제외하면 청하상단의 손을 잡아준 곳이 단 하나도 없자 서준후는 쓴웃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단순히 친분 때문에 가문과 가족을 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라는 말처럼 만약 반대의 경우였다면 서진후 역시 선뜻 도움을 주지 못했을 터였다.

< 제 2장. 청하상단(靑厦商團).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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