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장. 청하상단(靑厦商團). -02 >
벽우진과 청민이 앉아 있는 자리와 제법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장한이 친구의 말에 대경하며 소리쳤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벽우진 쪽을 훔쳐봤다.
자신들을 제외하면 유일한 손님이 바로 두 사람이었기에 혹시라도 들었을까 싶어 몰래 살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벽우진도 그렇고 청민도 못 들은 척 했다.
‘청하상단?’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둘 다 장한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벽우진은 아예 귀를 쫑긋거렸다.
왜냐하면 청하상단은 유일하게 곤륜파를 지원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적은 금액이지만 매달 계속 후원금을 보내오는 곳이라 했었지.’
대부분의 속가제자들이 곤륜파라는 그늘을 버리고 떠날 때 오직 청하상단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벽우진은 청민에게서 들었다.
만약 청하상단의 지원이 없었다면 자신 역시 아직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거라고.
그 말을 벽우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뭐 어때? 듣는 사람도 없고. 막말로 모두가 알고 있지 않나. 천검문이 청하상단을 집어삼키려고 그런다는 걸.”
“심증뿐이지 않나. 증거가 없어.”
“증거야 당연히 없겠지. 청해성의 패권을 놓치기 싫으니까. 가뜩이나 정사중간적인 성향으로 인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눈치를 보는데 마구잡이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지.”
“이 친구가.”
장한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친구의 손을 붙잡았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무언의 강요였다.
“후우.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인가? 결국 강자가 독식하게 되어 있어. 괜히 강자존, 약육강식의 세계라 하는 게 아니지.”
“그건 천산마교가 늘 부르짖는 단어인데. 허참.”
“더 이상 도의니 인의니 하는 것은 없지. 그나마 명분을 신경 쓰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
두 사람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를 만류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속마음은 똑같았다.
예전 부친에게 들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너무나 살기가 팍팍했다.
“곤륜파가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천검문이 지금처럼 막 나가지는 못했겠지. 곤륜파가 어떤 문파였나? 구대문파의 일좌를 차지한 무문(武門)이며 정통도맥이지 않나. 아마 곤륜파가 건재했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겠지.”
“하지만 멸문했지. 더 이상 곤륜파는 없어. 곤륜산만 남았을 뿐이지.”
두 친구가 말없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더 이상 곤륜파니 천검문이니 하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형.”
“걱정이 되느냐?”
“사실 한 번 정도는 찾아가보고 싶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신의를 지킨 곳이니까요.”
“청하상단이라.”
청민이 벽우진의 표정을 살폈다.
평생을 괴롭혔던 내상이 완치되었다고 하나 냉정하게 따져 그는 일류고수 한 명도 감당하기 벅찬 수준이었다.
하지만 벽우진은 달랐다.
실제로 그가 싸우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제대로 된 무경을 보지는 못했지만 안목마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청민은 살짝 기대하는 눈빛으로 벽우진을 바라봤다.
‘사형이라면···.’
청민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때 벽우진이 청민을 쳐다봤다.
“가자.”
“예?”
“찾아가고 싶었다며? 그럼 가야지. 사람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야 해.”
“괘, 괜찮을까요?”
마치 뒷산에 올라가자는 듯이 너무나 쉽게 말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오히려 청민이 당황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현재 청해성의 패자인 천검문이 엮여 있는 만큼 아주 조금은 고민할 줄 알았다.
그런데 벽우진은 마치 놀러가자는 듯이 너무나 가볍게 일정을 결정했다.
“뭐가? 내가? 아님 천검문이?”
“어, 그러니까···.”
청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런 청민의 모습에 벽우진은 웃었다.
“당연히 가야 하지 않겠느냐. 마지막까지 신의를 지킨 곳인데. 단주가 궁금하기도 하고.”
“제가 모시겠습니다.”
“길은 알고 있지?”
“예. 성도인 서녕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청해성 유람의 마지막이 성도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내일 바로 가자꾸나.”
“예.”
청민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직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그게 청민은 신기하면서도 웃겼다.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게 이토록 든든하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어서였다.
“물론 가는 길에도 수련은 계속 된다. 몸이 좋아졌는데 놀릴 순 없잖아? 그리고 난 곤륜산에서 했던 말을 농담으로 한 게 아냐.”
“가, 가능할까요?”
“안 될 건 또 뭐야?”
청민이 자신 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벽우진은 오히려 뭐가 걱정이냐는 듯이 말했다.
당연히 그리 될 것처럼 말이다.
그게 청민은 살짝 부담스러웠다.
자신에게 너무 과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저는 나이도 많고, 몸도 이미 늙었고···.”
“대신 기초가 튼실하게 잡혀 있지. 의지 역시 젊은 애들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고. 게다가 넌 전쟁을 직접 겪은 경험도 있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그런 거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해. 곤륜의 직전제자는 이제 너와 나 밖에 없다는 사실 하나만. 곤륜파라는 이름에 먹칠을 할 생각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청민의 표정이 달라졌다.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벽우진이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아주 좋은 얼굴이야.”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죽지는 말고. 너마저 없으면 난 어떡하니?”
“허허허.”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벽우진의 말에 청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객잔 주인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한참 어린놈은 반말을 찍찍하고 나이 지긋한 노인은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니 이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청민의 허리에 매달린 검을 보았었기에 따로 물어보거나 오래 쳐다보지는 않았다.
“넌 아무 걱정 말고 내가 짠 계획대로 따라오면 돼. 그럼 어느새 고수가 되어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이제는 좀 믿네?”
“사형께서 하시는 말씀이시니까요.”
“그래. 그렇게 날 믿어. 이 대단한 사형을 말이지. 후후.”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청민이 옅게 웃었다.
청하상단의 단주인 서일국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벌써 며칠 째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역시나 해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답은 있었으나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아.”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에 서일국이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아내의 웃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절대 그리 보낼 수는 없지. 암. 당신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지.”
아내의 마지막 유언이 딸을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근데 그게 그는 이상하게도 지금의 상황을 예견하고 한 말인 것 같았다.
똑똑똑.
깊어지는 밤처럼 그의 고민 역시 깊어져 갈 때 누군가가 집무실을 두드렸다.
그리고 익숙한 음성이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저예요, 단주님.”
“들어오너라.”
“역시 아직 안 주무시고 계실 줄 알았어요.”
“너야말로 이 늦은 시간까지 왜 안 자고 있느냐?”
“단주님과 같은 이유죠.”
눈에 넣어도 전혀 아프지 않을 딸의 말에 서일국이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딸에게 자리를 권했다.
“편하게 말해. 업무도 다 끝났는데. 더구나 우리 둘 밖에 없지 않느냐.”
“그럴까요?”
“사실 난 네가 사무적일 때 좀 서운하단다. 마냥 작고 귀여웠던 딸이 너무 훌쩍 큰 거 같아서.”
“열여덟이면 충분히 다 컸죠. 엄마는 제 나이 때 시집오셨다고 들었는걸요?”
서예지가 옅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에 서일국은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였다.
게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딸의 눈빛은 마치 그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는 듯했기에 더더욱 서일국은 입을 열 수 없었다.
“흠흠!”
“할아버지는 여전히 안 들어오셨나요?”
“그게 말이다···.”
연이어 들어오는 딸의 난감한 말에 서일국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서예지는 오히려 얼굴을 굳혔다.
“방법은 없는 거죠?”
“왜 없니? 있다. 다만 아직 찾지 못했을 뿐.”
“빈객 분들도 대부분 나가셨다고 들었어요.”
“모두가 나간 건 아니다. 그리고 어차피 그들은 외인일 뿐이다.”
서일국이 단호하게 말했다.
명망 높은 빈객들이 청하상단에 머물면 이점이 상당히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없어서 청하상단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만큼 빈객들의 유무는 이번 일과 크게 상관없었다.
“제가 가면···.”
“허튼 소리!”
서일국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친의 고성에서 서예지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도 아시잖아요. 이대로 고집을 부리면 우리 상단은 망해요.”
“다시 일어서면 된다. 빚을 지면 다 갚고 다시 시작하면 돼. 우리 상단의 별명이 무엇이더냐? 오뚝이 아니더냐? 너는 아무 걱정할 필요 없다.”
“······.”
다부진 부친의 말에서 서예지의 표정은 풀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하상단이 문을 닫아도 천검문의 그 호색한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외모 때문이었다.
‘힘없는 여자의 미모는 독이라고 했던가.’
적당히 예뻤다면 제법 괜찮은 혼처를 골라 결혼을 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미모가 너무 대단하다는 점이었다.
중원 무림의 다섯 개 꽃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정작 나는 만나본 적도 없는데 말이지.’
중원 무림에 있어 세외나 별다를 바가 없는 지역이 바로 청해성이었다.
그런 만큼 서예지는 중원에, 심지어 강북에 가본 적도 없었다.
끽해야 청해성과 인접해 있는 사천성 외곽과 감숙성에 가본 게 다였다.
“아비를 믿어라. 또한 할아버지를 믿어라. 우리는 널 결코 그딴 놈팡이에게 보낼 생각이 절대 없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
“아빠···.”
“이건 네 엄마도, 할머니도 같은 생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장인어른께서도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시기로 했으니까.”
부친의 말에도 서예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청해성에서 나름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는 추열문(推熱門)이 그녀의 외가라고 하나 천검문하고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따져 문주들의 실력 차이 역시 현격했고.
“···알았어요.”
“혹여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고.”
“예. 그런데 아빠.”
“왜?”
“죄송해요.”
서일국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딸내미에게서 흘러나와서였다.
그는 사랑한다는 말이나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지 이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었다.
“밤이 늦었다. 방으로 돌아가거라.”
“네.”
서예지 역시 마찬가지로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을 나섰다.
잠시 후 딸이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서 나가자 서일국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딸이 죄송하다는 말이 마치 화인처럼 그의 가슴에 박혀들어서였다.
동시에 그가 너무나 못나고 부족한 아비인 거 같아서 가슴이 답답했다.
으드득!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이내 그는 천검문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리고 분노가 치솟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 말고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 제 2장. 청하상단(靑厦商團).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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