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장. 청하상단(靑厦商團). -01 >
청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꺼내기가 쉽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벽우진은 장문제자가 아니었다.
애초에 장문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재건이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솔직하게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습니다. 혼자였을 때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혹시라도 찾아올지 모르는 곤륜파의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저는 제 주제를 잘 알고 있기도 하고요. 거기다 몸까지 망가진 상태였으니. 그런데 지금은 사형께서 돌아오셨죠. 하지만 그렇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자격도 저에게는 없고요.”
“왜 자격이 없어. 마지막까지 본산을 지킨 게 너인데. 아니면 혹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으니까요.”
청민이 에둘러 말했다.
겉모습이 약관처럼 보인다고 하나 벽우진의 나이는 그보다 많았다.
아무리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공간에 있다고 하더라도 흐른 세월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물론 무공의 성취가 엄청날 것이라고 짐작이 가기는 하지만 문파 재건은, 더구나 구대문파 중 한 곳이었던 곤륜파를 재건하는 건 두 사람만으로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쉬운 일은 아니지. 하고 싶다고 당장 이뤄지는 일도 아니고. 하지만 적어도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 나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난 예외야. 물론 너는 감이 잡히지 않겠지만.”
“아닙니다. 믿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형께서 하시는 말인데요.”
“너무 진심이 담겨 있지 않는 말투인데? 어쩔 수 없이 비위를 맞춰준다는 느낌이야.”
“그럴 리가요.”
청민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벽우진은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사제를 쳐다봤다.
“뭐, 쉽게 믿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아직은 본 게 없으니까. 일단 재건에 대한 문제는 뒤로 미뤄 놓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아침식사가 중요하다는 말씀이시죠?”
“그것도 물론 중요하고.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두 가지 있다.”
“두 가지나요?”
청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문을 재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자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첫 번째는 너다.”
“저, 저요?”
“정확하게는 네 무공이지. 물론 그 전에 몸부터 회복하는 게 우선이겠지. 너무 오랫동안 혹사시켰어. 나이도 있는데 말이지.”
“이미 늦었습니다. 전 그저 건강하게 살다 가면 됩니다. 저보다는 사형을 더 챙기셔야죠.”
청민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을 신경 써주는 건 너무나 고마웠지만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었다.
이미 그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기에 제대로 된 곤륜파의 절학을 익힌다고 해도 성과는 미비할 게 뻔했다.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할 테고 말이다.
“나는 이미 충분히 강해. 하지만 넌 아니지. 그리고 이런 말도 있잖느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제 나이가 일흔인데요, 사형.”
청민이 허허 거리며 웃었다.
평범한 촌부였다면 이 험한 곤륜산에 오르지도 못했을 터였다.
그저 시전에 마실이라도 나가면 다행이었지.
“나이는 단순히 숫자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리고 난 내 하나뿐인 사제가 빌빌거리는 꼴은 못 본다.”
“하고 싶어도 이제는 몸이 따라주지 않는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넌 그저 내가 하라는 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돼. 설마 하니 네 몸이 그런데 내가 무식한 방법으로 수련을 시키겠어?”
“······.”
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과거 벽우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서였다.
“진짜 걱정하지 말라니까? 오로지 너만을 위한 방식으로 수련을 짜 놓았어. 진짜 이대로만 하면 넌 천하십대고수가 될 수 있다!”
“요즘은 삼제오왕칠성(三帝五王七星)이 강호무림을 대표합니다. 물론 마도와 사도를 제외하고요.”
“그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마.”
벽우진이 호기롭게 말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진짜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청민은 농담으로 들었다.
“그렇게 되면 진짜 좋겠네요.”
“못 믿는 눈치네?”
“아닙니다. 믿어요. 사형께서 하시는 말인데요.”
벽우진이 미간을 좁혔다.
멍한 얼굴로 혼자만의 상상에 빠진 청민을 보니 자신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아직 보여준 게 전혀 없으니까.
‘뭐, 그건 차차 보여주면 될 일이고. 중요한 건 스스로의 의지니까.’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적어도 지레 포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서였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요?”
“유람을 하자. 일단은 청해성부터.”
“유람이요?”
“응. 강호유람. 너도 솔직히 청해성을 전부 다 둘러본 것은 아니잖아? 이참에 유람이나 다녀보자. 언제 또 우리가 같이 돌아다녀 보겠어?”
청민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확실히 청해성에서 나고 자랐지만 크게 돌아다닌 적은 없어서였다.
그나마 했던 외출도 사문의 일과 관련이 있었고.
마음 편히 돌아다녀본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궁금하기도 해. 곤륜파가 진짜 잊혀진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잊은 것인지. 또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난 우선 그것부터 알고 싶어.”
“알겠습니다.”
“뭐, 그렇다고 단순히 유람만 할 생각은 없어. 수련은 계속 이어질 거야. 하지만 그 수행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넌 날 엄청나게 고마워하겠지. 이건 장담할 수 있어.”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허허.”
진짜 늙은이처럼 웃는 청민의 모습에 벽우진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창졸간에 사라졌다.
이내 그는 순진하게 웃으며 청민과 잡담을 하면서 사슴구이를 뜯어먹었다.
벽우진은 곤륜산을 내려와 청민과 청해성을 돌아다녔다.
그 역시 아주 어린 시절 곤륜산에 올라가 제자가 되었기에 사실 청해성에 대해 잘 몰랐다.
곤륜산 인근만 조금 알았을 뿐.
그렇기에 벽우진은 청민과 함께 진짜 유람을 하듯 청해성 곳곳을 쏘다녔다.
“천검문(千劍門)이라.”
곤륜산을 내려와 청해성을 크게 한 바퀴 돌던 벽우진은 발길 닿는 곳에 머물렀다.
굳이 명소를 찾아다니지 않고 그냥 막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그렇게 이동하다가 눈에 띄는 객잔에 들어갔다.
“본파가 사라지고 청해성의 패권을 차지한 문파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정사중간인 것 같은데? 역시 세외에 가까운 지역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중원 무림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건가?”
“제가 생각하기에는 둘 다인 것 같습니다.”
“호랑이가 죽으니 늑대가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모양새네.”
벽우진이 혀를 차며 죽엽청을 따랐다.
도인(道人)이지만 고기며 술이며 가리지 않고 먹는 그의 모습에 청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는 도복도 벗어던졌기에 가만히 보면 절대 명문도가(名門道家)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됩니다. 천검문주의 무위는 청해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니까요.”
“그래봤자 늑대새끼일 뿐이지. 호랑이의 자리를 차지한.”
“근데 그렇게 드셔도 괜찮습니까?”
“언제 내가 취한 거 봤어?”
죽엽청을 물처럼 마시는 벽우진의 모습에 청민이 살짝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가 고수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매일 마시는 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불가(佛家)에서도 곡주라 하면서 술을 마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매일 마시는 건 과했다.
“그건 아니지만요.”
“혹시 돈이 걱정 되서 그래? 에이. 왜 그래? 우리 돈 많잖아? 약초 판 돈만 해도 밥값, 술값, 방값 치르고도 남아.”
“아는데 조금 낭비하는 것 같아서요. 저만 해도 그렇게 많이 먹지 않는데···.”
청민의 시선이 식탁을 훑었다.
단 두 사람이서 먹는 저녁 식사인데 양은 대여섯 명이 먹어도 충분할 정도로 많았다.
그렇기에 청민의 머릿속에는 아깝다는 생각만 들었다.
“안 남기잖아? 그럼 된 거지. 낭비라는 건 남기고 버렸을 때 하는 이야기야. 그리고 네가 58년 동안 벽곡단만 먹어 봐. 풀떼기가 눈에 들어오나.”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요.”
“그리고 막말로 가장 돈을 많이 쓰는 건 너야. 알지?”
“······.”
유구무언(有口無言).
청민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지금껏 청해성을 돌면서 벽우진은 신기하게도 영약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귀신 같이 찾아냈다.
물론 전설처럼 회자되는 아주 비싸고 영험한 영약은 아니고 오십 년에서 백 년 정도 묵은 영초들을 찾아냈는데 그 중 대부분이 그의 내상을 치료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기에 청민은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빚내서 먹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내가 평생 이렇게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것도 다 한때야, 한때.”
“죄송합니다.”
“그런 말은 더 이상 하지 말고. 넌 그냥 떡고물이나 잘 받아먹으면 돼.”
벽우진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청민이 멋쩍게 마주 웃었다.
“사형. 근데 검은 장만하지 않으실 겁니까? 밖으로 나온 김에 하나 장만하시지요.”
“필요 없어.”
“예?”
“검을 들 일이 있을까 모르겠다.”
벽우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청민은 이상하게도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고치지 못한 그의 내상을 불과 이틀 만에 치료한 사람이 벽우진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대로 전수받지 못했던 무공구결들도 알려주고 가르쳐주고 있었기에 청민은 벽우진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한 자루 정도는 가지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은 필요 없어. 튼튼하고 멀쩡한 몸뚱이도 있고.”
“흉기인 것은 인정합니다.”
“뭘 봤다고 인정이야.”
“다른 성도 둘러보실 생각이십니까?”
곤륜산을 내려온 지 어느덧 한 달이 흘렀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금처럼 좋았던 때가 있었을까 싶었을 정도로 말이다.
동시에 묘한 기대감이 생기기도 했다.
“다른 성이라. 이참에 중원에 놀러 가고 싶기도 하긴 한데.”
벽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청해성을 돌아다니면서 사실 벽우진은 실망을 참 많이 했다.
나름 청해성의 역사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것이 사문이라고 했는데 불과 몇 십 년 만에 곤륜파를 까맣게 잊은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이제는 중원 무림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아마 청해성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테지. 이미 기대도 없어.”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화나 짜증도 처음에만 치솟았지 지금은 무감각했다.
어차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었고, 강자존의 세계에서 잊혀진다는 말은 곧 약해서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애초에 받은 이들은 기억을 잘 못하는 법이었다.
‘배려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게 인간이니까.’
이제는 기대하는 것도 없었기에 분노도 없었다.
다만 묻고 싶을 뿐이었다.
정말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말이다.
“자네 들었나? 청하상단 소식.”
“이번에 크게 당했다지? 허어. 화무십일홍이라지만 그래도 천하의 청하상단이 이렇게까지 몰락할 줄이야.”
“어쩌겠어. 줄을 잘못 잡은 탓이지. 만약 천검문 소문주와의 혼사를 받아들였다면 일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겠지.”
“쉿!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닐세!”
< 제 2장. 청하상단(靑厦商團).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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