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장. 너와 내가 곤륜이다. -01 >
저벅저벅.
아주 오래 전에 불타버린 흔적이 가득한, 한때는 고루거각들로 가득 찼던 길을 거닐며 벽우진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벽우진은 어린 시절 사형제들과 뛰놀던 기억이 선명했다.
물론 무공수련 시간은 재미가 없었지만 사형제들과 함께 하기에 그 힘든 일과마저도 행복했었다.
“허허허···.”
그런데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폐허가 된 사문의 모습이었다.
느껴지는 기척이라고는 산짐승들이 움직이는 게 다인 모습에 벽우진은 헛웃음만 나왔다.
“정말, 정말 멸문했다고? 나의 사문이? 천하의 곤륜파가?”
비록 속세의 일에 크게 관여하지는 않았다고 하나 곤륜파는 당당히 구파일방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문파였다.
또한 벽우진이 도적에 이름을 올릴 때만 하더라도 역사가 40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 그토록 대단하고 찬란한 무명을 가졌던 곤륜파가 이제는 사라졌다는 게 그는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없던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명명백백하게 멸문지화를 당한 사문의 모습에 벽우진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지금은 파악이 먼저였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부리부리한 안광을 뿌리며 전각들이 있었던 장소를 샅샅이 살폈다.
“일단 시간은 제법 흐른 듯하고.”
무너지고 허물어지며 불탄 흔적들이 가득한 건물들의 잔해를 살피며 벽우진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알 수 있는 건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는 게 전부였다.
“음?”
한참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곤륜파의 내원을 돌아다니던 벽우진이 순간 눈을 번쩍였다.
산짐승들이 아닌 인기척이 느껴져서였다.
그것도 정확히 이쪽을 향해서 오는 기척에 벽우진은 땅을 박차 산문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후우.”
한때는 사람들도 북적북적 거렸던 오르막길을 한 명의 노인이 느릿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낡은 도복을 입고 있는 노인이었는데 자글자글한 눈가의 주름은 그가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었다.
적지 않은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사람이 찾지 않아 아무렇게나 자란 수풀과 잡초를 가르고 올라와서인지 노인이 지친 얼굴로 숨을 골랐다.
한데 그를 본 벽우진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오늘은 길을 정리해야겠어. 가만히 놔두면 또 훌쩍 자라 산문으로 향하는 길을 막아버릴 테니.”
벽우진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나이를 먹어 늙었음에도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또한 시공간의 진 속에서 그가 수도 없이 떠올렸던 목소리이기도 했다.
때문에 벽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인기척을 내고 말았다.
“응? 누구···.”
작은 인기척이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곤륜파의 산문으로 올라왔던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정녕, 정녕 청민(淸敏)이더냐?”
힘겹게 흘러나오는 벽우진의 음성에 낡은 도복의 노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몸을 떨었다.
벽우진이 그를 알아본 것처럼 그 역시 벽우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떨며 화등잔 만하게 커진 눈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처, 청류(淸流) 사형? 정말 청류 사형이십니까?”
털썩.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도명에 벽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하늘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벽우진은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정말 청민이구나.”
“사형!”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벽우진을 향해 청민이 날 듯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벽우진의 얼굴을 너무나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열 살을 갓 넘은 꼬맹이였는데, 지금은 노인네가 다 되었구나. 허허허···.”
“그동안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이 모습은 또 어떻게 되신 거고요? 설마 반로환동(反老還童)하신 겁니까?”
“그럴 리가. 그렇다고 그 정도 경지가 아니냐면 그건 또 아니지만. 일단 너에게서 들어야 할 대화가 많은 것 같구나. 사문에 대해서도 그렇고.”
벽우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동시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청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졸졸졸.
폐허로 변한 곤륜파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벽우진과 청민이 마주앉았다.
그리고는 나무로 만든 술잔에 화주를 따랐다.
“더 좋은 술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이것만 해도 진수성찬이다. 내가 갇혀 있었던 곳에는 토끼구이가 뭐야. 그 흔한 꿩도 없었다. 술은 더더욱 없었고.”
“그래도···.”
싸구려 화주가 따라진 술잔을 보며 청민이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벽우진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대략적으로나마 들었기에 고작 화주 밖에 따라주지 못하는 게 미안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청민을 달래며 벽우진은 웃었다.
“이 정도로 충분해. 더구나 네가 있지 않느냐. 나는 사문에 돌아왔고. 그거면 되었다. 그보다 내 얘기는 어느 정도 했으니 네 얘기를 듣고 싶구나.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흘렀으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노릇노릇하게 익은 토끼의 뒷다리를 큼지막하게 뜯은 벽우진이 그걸 청민에게 건네며 물었다.
그러자 청민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곤륜파의 참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가가 촉촉해져서였다.
“사형께서 사라지신지 벌써 5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열두 살이었던 저는 어느새 일흔이 되었지요.”
“청춘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내 나이가 벌써 일흔다섯이란 말이더냐.”
독하디독한 화주를 단숨에 삼키며 벽우진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코앞에서 듣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청민이 앞에 있었기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참사는 그 후 10년이 지나고서 찾아왔습니다. 신강의 마교가 중원정복을 외치며 발호했고, 첫 번째 목표가 본파였습니다. 청해성이 중원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고, 구대문파 중 한 곳이 바로 본파였으니까요.”
“수도 없이 충돌한 악연도 있지.”
중원무림의 선봉장, 혹은 첫 관문.
그게 바로 곤륜파를 달리 말하는 단어들이었다.
때문에 다른 문파들과 비해 마교는 곤륜파라면 이를 갈았다.
항상 앞을 막아서는 게 곤륜파였기 때문이다.
‘속세의 문파가 세가도 아닌데 늘 막아섰으니까.’
벽우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사문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지금은 청민의 설명을 들을 때였으니까.
“그때 마교의 공격은 지금까지와는 달랐습니다. 불세출의 마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실력자인 교주의 손에 장문인께서 유명을 달리하시고 하루 만에 본산이 불탔습니다. 그리고 사부님을 비롯해서 사백조, 사숙조, 심지어 태사조께서도 마인들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졸졸졸.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인지 점점 더 격정적으로 변해가는 청민의 말을 들으며 벽우진은 화주를 따랐다.
언뜻 보면 무심한 얼굴로 말이다.
“마교와의 전투로 본산은 불탔지만 그럼에도 곤륜파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전투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어르신들은 마지막까지 마교에 대항하며 싸우셨고, 불타버린 본산을 복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십 년이라는 세월은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곤륜파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이름과 명예까지도요.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구질구질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저뿐입니다···. 실력이 모자라서 지금껏 살아 있습니다. 크흑!”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아가는 땅바닥 위로 눈물방울들이 떨어졌다.
일흔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청민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참으로 절절했다.
깊은 후회와 한탄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허어···.”
그 모습에 벽우진 역시 장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청민의 모습에서 그가 가슴에 담고 살아온 한이 얼마나 깊은지, 슬픔과 죄책감이 얼마나 거대한지 느낄 수 있어서였다.
“하루에 수도 없이 생각했습니다. 더 살아서 뭐하나. 나 하나 남았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 지금이라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무슨 소리! 어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하는 것이냐!”
“마지막까지 사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네가 있기에 지금까지 곤륜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그런 망발을 하느냐!”
“크흐흑!”
청민은 가슴에서 무언가가 솟구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형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를 위로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눈물만 더욱 나왔다.
사문이 멸문지화를 입은 후 더 이상은 흘릴 눈물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둘러보면서 느꼈다. 폐허가 되었지만 곳곳에 사람의 손길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아마도 너 혼자 치우고 있었겠지. 수십 년의 세월 동안을.”
“···저라도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라도 찾아올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 발길도 9년 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참으로 힘들었겠구나.”
뚝뚝.
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를 악물며 눈물만 쏟아냈다.
그런 청민을 벽우진은 묵묵히 다독여주었다.
동시에 그는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 자리를 지켜주고 있어서. 또한 맥을 이어주고 있어서.”
“사, 사형.”
“너는 보잘 없는 일이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게 어찌 보잘 것 없는 일이겠느냐. 더구나 모두가 잊어버린 문파를 홀로 지키는 게 말이다.”
주르륵.
다른 이도 아니고 사형인 벽우진의 말에 청민이 다시 한 번 울컥했다.
그러자 두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고생했다. 이제는 네가 짊어지고 있던 것을 나에게 넘기거라.”
“사형···.”
“이제부터는 내가 책임지마. 물론 너무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말이지.”
“아, 아닙니다. 늦지 않으셨습니다. 사형께서도 불가항력이시지 않았습니까.”
“변명일 뿐이지.”
벽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사정이 이러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선대의 안배로 인해 함께 하지 못했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미래에 대해서만 말했다.
두 사람이 살고 있는 때는 현재이며 앞으로 다가올 것은 미래뿐이었으니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될 것을 알기에 선대께서 준비를 하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짐작뿐이라는 거다. 나 역시 따로 들은 건 없었으니까. 시간이 늦었다. 이만 자거라.”
“아닙니다. 좀 더···.”
“좋은 꿈 꾸거라.”
자기도 모르게 수혈이 짚힌 청민이 잠에 빠져들었다.
무음지(無音指)의 수법으로 청민을 재운 것이다.
그런 사제를 벽우진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제는 나이도 적지 않은데 제 몸도 돌보지 않았으니.”
청민이 왜 그렇게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였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때문에 벽우진은 안타까운 얼굴로 청민의 몸을 부드럽게 주물러주었다.
추궁과혈의 수법으로 오랜 세월 동안 망가진 그의 육체를 어루만져 주었던 것이다.
“으음···.”
단순한 추궁과혈이 아니라는 걸 느낀 모양인지 청민의 표정이 점차 편안해졌다.
어느새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잠꼬대를 하는 모습에 벽우진 역시 웃음을 흘렸다.
“곤륜은 사라지지 않았다. 네가 있고, 내가 있는데 어찌 곤륜이 사라지겠느냐.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푹 자거라.”
< 제 1장. 너와 내가 곤륜이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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