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마계 군세를 주도했던 마르바스는 소멸했다.
이진한은 게이트를 열어 직접 마계 군세를 돌려보냈고, 내친김에 마계까지 찾아가 모든 마왕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가운데 탁자를 내리치며 선포했다.
“나한테 까불면 뒤진다.”
중간계를 침공하는 건 인과의 흐름이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마르바스처럼 마왕을 넘어 주신에 맞먹는 마신이 되고자 반역한다면 용납지 않을 거라고 서슬 퍼런 경고를 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반발이 있었다.
이진한은 기선제압을 하고자 72, 아니 71 마왕 중 절반인 35 마왕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입증했다.
빈자리가 서른 개나 넘게 생겼으니 마계는 다시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했다.
누군가는 새로운 마왕이 되기 위해 나설 테고, 누군가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올라오는 새싹을 짓밟으려 할 것이었다.
향후 몇백 년간은 감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 하지 못할 터.
주신으로서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한 중간계를 향한 배려였다.
그것으로 끝이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쉴 여유는 없었다.
여신은 주신이 되기 위한 것에 모든 여력을 쏟아부었는지 세상의 관리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등한시한 듯했다.
관리 체계는 개판이었고, 이대로 가다간 스스로 멸망해버릴 정도로 과부하 상태였다.
이진한은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으로 체계를 다시 정립했고, 가까스로 다시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었다.
“…돌아간다고? 어째서?”
툭.
프로메테우스는 당황한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렸다.
그, 아니 그녀 역시 많이 뒤바뀐 상태였다.
반신은 원래 무성(無性)이다. 물론 원한다면 성별을 바꿀 수 있었고, 프로메테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그녀는 여성체였다.
사도들에게 굳건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남성을 연기해왔을 뿐, 더는 그럴 이유가 없어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여기에 존재할수록 세계의 축이 엇나가고 있다는 거.”
“…아직은 괜찮다. 다른 이들의 영혼은 전부 돌려보냈으니 너 한 명 정도는 괜찮을 거다.”
세상이 안정을 되찾고 이진한은 곧바로 옛 동료들을 챙겼다.
고대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을 비롯해, 자신들과 함께 이 세상에 넘어온 이들의 영혼을 전부 회수해 원래 세계로 되돌렸다.
지구의 주신과 상의해 기억은 모두 지운 채로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시간의 흐름도 조작했다.
그 탓에 저쪽 신에게 상당한 빚을 지게 됐거늘, 이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이야기인가.
“아니. 내가 보통 인간이었으면 괜찮았겠지만, 주신 자리에 오르면서 달라졌어.”
이진한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이계의 존재가 세상의 주축을 맡게 되었다.
문제가 생기는 건 필연적인 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되는 요소를 지워야 했다.
“…나는 그렇다 치고 그녀들에겐 뭐라고 설명할 거지?”
그의 결심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프로메테우스는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일레이나, 엘레오노라, 미르엘, 이리아.
일레이나는 신격을 부여받아 반신에 올랐고, 다른 셋은 전부 초월지경에 올라 반신 격이 머지않았다.
전부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한참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인 이진한이 사라진다면 큰 문제가 생길 터.
“말 안 하고 떠나려고.”
“하지만….”
“영원히 간다는 것도 아니야. 내가 떠나있는 동안 프로메테우스, 네가 해결책을 찾으면 되잖아. 지금 당장 주신 자리도 넘겨주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잠시 여행가 있다고 생각하자. 내가 미쳤다고 이 좋은 자리를 버리고 떠나겠어?”
해결책을 찾는다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그러면 자신이 이곳에서 존재해도 되지 않는가.
…그리고 그 이면에는 고향이 그립다는 마음도 조금 있었다.
“그러면 뒷일은 부탁할게.”
이진한은 곧바로 문을 만들었다.
목적지는 지구, 아주 오래전 떠나온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다들 그때까지 행복하게 지내.
닿지 않을 목소리만이 차원의 틈새에 끼어 부서져 내렸다.
***
“….”
이진한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 쓴 VR 기기를 내려놓자 눈물이 주르륵 쏟아지며 바지가 흥건하게 물들었다.
끝나지 않는 여운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 이거 스토리 갓겜이네. 내가 게임 하면서 울어본 건 또 처음이다.”
‘월드’ 2부.
한 달간의 여정 끝에 엔딩에 도달했다.
같은 원정대의 동료가 사실은 NPC고 더불어 흑막이었다던 반전은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도 몇 년을 매달리던 게임의 엔딩을 보았으니 사뭇 후련한 감정이 들었다.
“…이제 뭐 하고 사나.”
‘월드’의 메인 스토리는 끝이 났다.
물론 게임이 망하지 않는 이상 컨텐츠는 계속 이어지고, 추가 에피소드도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 가슴 언저리에는 진득한 여운이 남아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하.”
게임의 여운은 게임으로 지워야 하는 법.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새로운 게임을 물색하던 이진한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는데.”
가만히 있어도 건물 몇 채에서 꼬박꼬박 수입이 들어오는 삶.
대부분은 부럽다며 배부른 투정이라고 하겠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내면 깊은 곳이 썩어가는 느낌이었다.
“…공부나 해볼까?”
‘월드’ 같은 게임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공부와 담쌓은 건 고등학교 이후로 꽤 시간이 지났지만, 제법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일단 밥이나 좀 먹고.”
집 앞에 있는 국밥집에서 허기나 달래기 위해 대충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매일같이 방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니 밤낮의 개념이 사라졌다.
늦은 밤인 듯 하늘은 어두컴컴했지만, 국밥집은 24시간 영업했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
이진한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걸어갔다.
뭔지 모를 허전함이 마음 한구석에 가득하다. 게임에서 후유증을 느낀 것이 얼마 만인지, 참 순수하다며 쓴웃음을 지을 찰나 땅이 뒤흔들렸다.
“…엇!”
갑작스레 주위를 휩쓴 지진에 이진한은 자리에서 넘어졌다.
손으로 땅을 짚으며 목을 움츠렸고, 이 재난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저적─.
그때 깊은 밤임에도 선명히 알아볼 수 있을 크기의 균열이 발밑에 깔린 아스팔트에서 일어났다.
싱크홀이라도 생기려는가 싶어 기겁하며 물러났지만, 곧 지반을 뚫고 솟아오르는 괴생명체에 이진한은 입을 벌렸다.
-크르르.
거대한 애벌레 형태의 괴물이 수백 개는 될 법한 이빨을 출렁거리며 침을 흘렸다.
이진한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을 매만졌다.
하지만 현실에는 검도, 스태프도 없었고, 인벤토리나 스킬도 쓸 수 없었다.
“…이런 미친.”
할 수 있던 것은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 나지막한 욕설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파아앗!
자신의 앞에 있는 먹잇감을 포착한 괴물이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며 닥쳐온다. 이진한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얼굴 위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콰르릉!
그때 짙은 어둠 가운데 자색 뇌광이 내리쳤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은 강렬한 색채와 함께 괴물의 머리를 강타했고, 터져나간 살점으로부터 녹색 체액이 뿜어졌다.
-키에에엑!
괴물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발광하며 몸부림쳤고, 바로 앞에 있던 이진한을 깔아뭉갤 듯 몸을 굴렸다.
“얼어붙어라.”
“…!”
저저적─!
삽시간에 주위의 기온이 내려가며 조금 전까지 난동을 치던 괴물의 몸이 얼어붙었다.
새하얀 얼음 결정이 허공을 노니며 눈부신 반짝거림을 토해낸다. 이진한이 무심코 그것을 건드리자 시릴 정도로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서부터 느껴졌다.
“….”
멍하니 고개를 들자 자신의 머리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한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백금색 머리카락의 끝으로 얼음 결정이 흩어진다. 이국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쉬이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에 그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뭘 그리 놀라세요?”
“…네?”
“네?”
이진한과 미르엘과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지 않을 이유가 있던가?
별안간 지진이 나더니 괴물이 땅에서 불쑥 솟아올랐고, 요정처럼 예쁜 여성이 나타났는데.
“참, 미르엘도. 스스로 기억을 봉인하셨다고 했잖아.”
“아, 그랬었죠.”
괴물의 시체 위. 새로운 여성이 등장했다.
새빨간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바닥에 착지한 그녀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희한테서 말없이 떠나신 것도 모자라서 기억까지 다 지우시다니.”
여성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선 뺨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었는데, 오늘은 몇백 년 만에 재회니까 참을게요.”
“엘레오노라 님. 베르너 님의 시간으로는 한 달 남짓입니다.”
“아, 그렇지.”
엘레오노라는 주저앉은 이진한의 몸을 일으켜 세운 뒤, 그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주었다.
“베르너 님. 아, 여기서는 이진한이었죠. 하여튼 진한 님이 떠나신 이후 일레이나가 얼마나 길길이 날뛴 지 몰라요. 자기는 키스도 안 해봤다면서.”
“지상을 뒤엎으려던 걸 겨우 말렸어요. 적어도 사정은 설명해주고 가시지.”
미르엘도 쓴웃음을 지었다.
“…어.”
이진한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멍한 표정에 두 여성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을 때, 돌연 그 앞의 허공이 일그러지며 하나의 문이 생겨났다.
“벌써 왔네. 이쪽 세상의 주신이랑 이야기하고 온다더니.”
“급한 성질은 어디 안 가죠.”
탁!
문이 열리자마자 보랏빛 머리카락을 지닌 여성 한 명이 뛰쳐나왔다.
그녀는 곧바로 이진한을 향해 닥쳐오더니 그가 어찌할 새도 없이 얼굴을 붙잡고 진한 입맞춤을 나눴다.
“…!”
이진한으로서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심정이었다.
반항하고 싶어도 온몸을 구속하는 힘이 너무나도 강한 탓에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
기나긴 입맞춤 끝에 입을 땐 일레이나는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고개를 들었다.
“진짜 철저하게 지웠네. 기억을 재생하는 술식을 심었는데도 반응이 없어.”
“…그런 것치고는 너무 길게 한 것 아니에요?”
엘레오노라가 툴툴거리자 일레이나는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팔짱을 꼈다.
“관리자 직급인 프로메테우스 정도 되어야 풀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이 상태로 돌아가야 하나요?”
“그래야지. 이쪽 세상의 주신도 거의 폐인이 되어 있더라. 베르너 님이 넘어온 탓에 자기 세상이 일그러져 온갖 특이점이 넘치고 있다고.”
일레이나의 시선이 바닥에서 튀어나온 괴물로 향했다.
지구라는 이 세계에는 마법이나 몬스터 같은 요소가 없었다.
하지만 아르테니아의 주신인 이진한이 넘어오며 왜곡이 발생했고, 그 결과가 바로 눈앞의 괴물이었다.
“이미 망한 것 같긴 한데, 조금이라도 빠르게 돌아가 달라고 울면서 부탁하더라. …그러니까.”
탁.
일레이나는 이진한의 손을 잡았다.
엘레오노라, 미르엘 역시 그 옆에 섰고, 모두 밝은 미소로 고개를 들었다.
“이만 돌아가요, 검은 현자님.”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 完
< 후기 >
안녕하세요 글밈입니다.
2021.09.22.부터 2022.06.03까지 이어진 255일째의 여정이 이렇게 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완결까지 도움을 주신 편집자님, 그리고 댓글로 격려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망나니학 개론 ─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로 이어지면서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많은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아쉬운 부분이 많았지만, 반면교사로 삼아 더 나은 작품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게임 속 대현자는 사실 3부작으로 계획한 작품입니다.
천 년 후의 시간대를 다룬 현재의(본편), 그리고 이진한을 비롯한 ‘월드’의 플레이어들이 막 아르테니아로 전이해 왔을 때의 이야기를 다룬 (트랙 제로), 그리고 기억을 봉인한 채 현대로 돌아온 이진한의 이야기를 다룬 (특이점).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나중에 여유가 생긴다면 다른 두 편도 각각 별개의 작품으로 연재해볼 생각입니다
차기작도 곧 런칭될 예정입니다.
망나니학 개론,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으로 시간순을 따진다면 겜현자 이전의 시간대가 되겠군요.
(차기작) -> 게임 속 대현자 -> 망나니학 개론 순입니다.
열심히 준비했으니 부디 재밌는 모험을 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