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209화 (209/210)

◈ 209.

저적─.

공간이 뒤흔들렸다.

이진한은 아직 제 권능을 수습하느라 여력이 없거늘, 도대체 누가 이런 심상치 않은 파장을 뿜어내며 자신의 몸을 옭아매는가.

“해석하느라 애먹었지만, 덕분에 막혀 있던 벽을 넘어섰어요.”

엄청난 마력 파동에 감싸인 일레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넘실거리며 미증유의 힘을 내뿜는다. 그것은 곧 정점에 다다르더니 여신의 것을 닮은 순백의 색으로 점칠 되며 덧씌워져 갔다.

“그러니, 일단 감사를 표할게요.”

꽈아악!

부드러운 손짓을 따라 공간이 뒤틀렸다.

천여 년 전 《영원》이 이룩한 경지. 일레이나에게 부여된 잠재력이 극한까지 활성화되며 새로운 가능성을 일궈내었다.

물론 경지 자체로만 따지자면 원탁의 일원으로 「발푸르기스의 마녀」라 불렸던 레이첼 프라하리슈와 같았다.

하지만 반쪽짜리 영원의 계보를 이었던 그녀와 달리 일레이나는 완전한 《영원》의 마법을 계승했다.

더욱이 모태가 되는 「삼라만상」으로부터 한 차원 진화한 「사계」가 그 개성을 활짝 꽃 피우며 세상을 뒤덮었다.

“《영원》이 사실 여신이었다는 건 놀랍네요. 같은 마도의 길을 걷는 후인으로서 당신을 존경했어요. 당신도 설마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따라잡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죠. 하지만….”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영원》의 계보는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에 얽매이고 좌절하여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과정.

자신도 이진한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결국 레이첼과 같은 운명을 밟았으리라.

“제 근성과 운을 너무 얕보셨어요.”

딱!

여신의 쪽으로 기울어지던 권능의 균형이 다시금 무게 추가 맞춰졌다.

하지만 여전히 불리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여기서부터는 서로 밀고 당기는 지구력 싸움이었다.

“서로 숨겨둔 패는 다 오픈한 것 같은데 누가 더 오래 버티나 볼까?”

여신은 두 눈을 번뜩였다.

시시각각 신도들과 연결된 선이 끊어져 간다. 시간을 끌면 이쪽이 불리해졌지만, 그간 축적해온 주신의 힘이 권능을 단단하게 했다.

“…윽.”

여신이 서서히 출력을 올리자 일레이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신음을 토해냈다.

《영원》의 경지를 완성했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술식과 마나로 짜인 마법의 종류였다.

진짜 권능과 비교하자면 한참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다.

“….”

이진한과 일레이나가 점차 밀려 나가기 시작할 때, 한참 뒤쪽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이를 꽉 깨물었다.

자신들 역시 도움이 되고 싶었으나, 초월지경에 도달하지도 못한 경지로는 그 근처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신들은 왜 여기에 있는가.

턱.

그때 그런 둘의 어깨를 잡아 오는 손길이 있었다.

물망초 빛깔이 허공에 드리운다.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끈을 풀어헤친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엘레오노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

“긴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잘 들어. 딱 한순간, 여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줄게. 그러면 너희가 저 재수 없는 면상에 한방씩 먹여줘.”

“하지만 저희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미르엘이 암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초월지경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여신의 몸에 상처 하나라도 낼 수 있겠는가.

딱.

이리아, 진하율은 곧바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둘의 몸 위로 바람의 가호가 깃들며 이때까지 닿지 못한 격의 기운을 담아내었다.

“첫 일격. 그거면 충분해.”

“…이리아. 아니, 당신은.”

“자자, 이것도 그리 오래는 유지 못 하니까.”

진하율은 미소를 지으며 둘의 어깨를 툭툭 밀었다.

솔직히 미안한 감정도 있었다.

자신이 길을 연다고 해도 여신에게 닿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설령 상처 입히지 못하더라도 단 한 순간 시선을 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천 년 간 후손의 몸으로 이어져 내려오며 기다린 값으로는 충분했다.

파아앗!

푸른 질풍이 여신에게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일순간 「세계의 근원」이 내뿜는 불꽃조차 밀려났고,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그 즉시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

여신이 그 둘의 존재를 눈치챈 건 바로 직후였다.

저런 것들조차 자신을 무시하냐며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가볍게 손을 휘두를 찰나, 푸른 질풍에 감싸인 미르엘의 프로스트가 날카롭게 허공을 베어 갈랐다.

저저적─!

물리 법칙 따위는 통용되지 않은 그 신성한 몸 위로 빙결의 권능이 떨어져 내렸다.

혈계 전승으로 내려오는 브레스트 가문의 특성일 뿐인 빙결.

하지만 그 미약한 이름이나마 권능의 이름을 지녔다.

진하율의 가호를 도움닫기 삼는다면 단 한 순간이나마 여신에게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무슨!”

새하얀 피부가 얼어붙으며 작은 생채기가 생겨났다.

여신이 경악하며 두 눈을 크게 떴을 찰나, 뒤이어 닥쳐온 엘레오노라가 자신의 데스 사이드 형태로 펼친 완드를 프로스트 위에 힘껏 박아넣으며 극강의 일격을 펼쳤다.

푹!

겨우 1cm.

그 가녀린 팔 위에 겨우 손톱만큼의 상처만 생겨났을 뿐이었다.

여신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거칠게 팔을 휘둘러 둘의 존재를 소멸시키려 할 찰나, 조금 전까지 길을 열던 푸른 질풍이 손을 뻗어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쑤우욱!

텔레포트를 한 것처럼 풍경이 뒤바뀌었다.

순식간에 원래 있었던 자리로 되돌아온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영혼을 짓뭉갤 것 같았던 압박감에 구토를 토해내면서도 자신들을 구해준 그녀에게 감사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이 아이를 잘 부탁….”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근원까지 쥐어짜서 힘을 끌어온 진하율은 의식의 소멸을 느끼며 천천히 앞으로 쓰러져 내렸다.

미르엘이 황급히 그 몸을 받아냈을 때, 이진한은 둘이 만들어준 그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크어어어!

그의 등 뒤로 바포메트의 현신이 강림했다.

두 개의 뿔과 짙은 피부, 그리고 새파란 불꽃이 피어오른 눈동자를 지닌 고대 악마가 손을 뻗어 여신에게 닥쳐갔다.

“더러운 짐승 주제에!”

바포메트의 모체가 된 염소는 부정한 존재를 상징하는 생물.

여신이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거칠게 팔을 떨쳤을 때, 이진한은 거의 앞으로 고꾸라지듯 몸을 날리며 「세계의 근원」을 붙잡았다.

“멍청하기 짝이 없네. 네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여신의 눈동자에 비웃음이 스쳤다.

그와 동시에 이진한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섰고, 곧 뇌리의 신경 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엄습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끄아아아!”

절로 비명이 토해져 나왔다.

엄청난 정보의 총량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눈 앞을 가린다. 일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원초적인 충격이 전신을 뒤흔들며 생명의 기운을 앗아갔다.

여신은 당연히 그가 버텨내지 못한 채 「세계의 근원」을 놓으리라 생각했다.

자신 역시 버티지 못했고, 그렇기에 반쪽짜리 주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그것을 놓지 않았다.

살갗이 터지고 뇌가 녹아버리며 이성을 잃어감에도 두 눈을 부릅뜬 채 손아귀의 힘을 꽉 쥐었다.

‘…이건.’

대현자가 맹렬하게 돌아가며 「세계의 근원」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처리했다.

그 가운데서 알 수 있던 단 한 가지 사실.

단 한 번이라도 세계의 근원을 놓친다면

다시는 주신이 될 수 없다.

여신은 이미 제 기회를 차버린 것이었다.

불쌍하게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이제껏 발버둥 쳐왔다니. 둘 가운데 주신이 될 수 있던 건 원래라면 오직 프로메테우스뿐이었다.

‘반쪽짜리 주신으로 계속 있는 것이 더 행복했겠거늘.’

무엇이 그리 욕심이 나기에 이런 일들을 꾸며가며 제 목에 칼을 집어넣는가.

“…! 안 돼!”

여유롭게 있던 여신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개입하려 했다.

하지만 일레이나를 비롯해 다른 원정대,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와 사도들이 그 앞으로 끼어들며 자리를 지켰다.

“끝났다 여신이여. 그저 지켜보도록 하여라 새로운 주신이 탄생하는 순간을.”

아직 남은 반신의 격으로 여신의 공격을 겨우 상쇄해낸 프로메테우스는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세계의 근원」과 이진한의 존재가 융합한다. 아직 포기하지 못한 여신은 하늘을 뒤덮는 성화의 물결을 쏟아내어 자신 앞에 있는 모든 존재를 소멸시키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가운데 불쑥 솟은 손이 세상에 명령을 내렸다.

“멈춰.”

나지막한 말 한마디.

그 짤막한 목소리에 세상천지가 멈췄다.

이곳을 말고 대륙 각지에서 벌어지던 크고 작은 싸움 역시 멈췄고, 정말로 누군가 시간을 정 시킨 것처럼 모든 흐름이 얼어붙었다.

그 어떤 법칙보다, 그 어떤 현상보다 우선시 되는 말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집어삼키던 새하얀 불꽃 가운데서 눈을 뜬 이진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주신은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그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랐다. 여신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새로이 창조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것 역시도 큰 위험이 존재했다.

완전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존재.

전신에 차오른 전능 감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상실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다.

“…아.”

여신, 아니 여신이었던 반신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신의 힘이 빠져나가 그에게로 깃들고 있다.

완벽하리라 생각했던 자신의 계획에 언제부터 문제가 생겼던 것일까.

프로메테우스를 이기기 위해 이방인을 끌어들였을 때부터?

아니면,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완벽한 주신이 되기 위한 계획을 구상했을 때부터

이진한은 고개를 돌려 여신을 향했다.

모든 불꽃을 태운 채 주저앉아 있는 그 모습을 보아하니 절로 씁쓸한 입맛이 느껴졌다.

“그래도.”

“…안 돼.”

“너랑 게임 했을 때는 재미있었다.”

“안…!”

딱!

조금 전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드높던 존재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것으로 완전한 소멸을 이루었다.

반신 격에 이르러 누구보다 주신에 가까웠던 것이 허무해질 정도로 그 차이는 지대했으니.

이진한은 내친김에 주위에 있던 천족마저 모조리 지웠다.

그것들은 여신이 필요해 의해 창조해낸, 세계에 있어서 불필요한 존재들이었다.

뒤이어 사람들이 모든 상처를 회복했다.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은 발휘되지 않았지만, 숨만 붙어 있다면 모두 새로운 육신을 얻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프로메테우스 역시 이진한에게 넘겨준 반신의 격을 모두 회복했다.

창백했던 안색에 활기가 띠고, 반신으로서의 위용이 돌아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주신이여, 이제 어떻게 할 것입니까.”

더 이상의 반항은 무의미했다.

자신은 피조물로 그저 선택을 기다릴 뿐.

이진한은 그 물음에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바뀌는 건 없어. 약속은 지킨다. 하지만 주신 자리는 쉽게 양보하지 못하는 모양이야.”

“…당연합니다. 그건 기존 주신에게 모종의 결격 사유가 생겨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걸 알고 내게 신격을 넘겨준 거야?”

“저는 그때 이미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여신을 이기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요.”

참으로 소탈한 목소리였다.

잠시간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이진한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신계에 주신만 있는 건 아니야. 그 밑으로 세상을 관리하는 여러 직급이 있지. 프로메테우스 너는 내 밑에서 힘들게 굴러야 할 거다. 그래야 나중에 주신 자리를 넘겨주기 쉽지.”

“…하하.”

“웃을 일이 아닐걸? 여신이 얼마나 개판 쳐놓았는지 당장 위쪽에서 올라와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진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정대 일행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일대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정말로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 듯 멍한 기색이다. 오로지 그의 일행만이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진짜로 신이 된 건가요?”

“뭔가 변한 건 없는 것 같은데.”

“피부 좀 봐요. 원래 좋으셨는데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일레이나, 엘레오노라, 미르엘.

그 셋이 이진한을 둘러싸며 이곳저곳을 만졌다.

“이리아는?”

“아. 저희를 도와주고 쓰러졌어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여신에게 닿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더라고요.”

“…그런가.”

이야기를 듣자마자 깨달았다.

진하율, 그녀가 자신의 남은 사념을 쥐어짜 도와준 것이리라.

신격을 거스를 정도의 힘이었으니 아마 이제는 그 존재 자체가 소멸해버렸을 터.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런 기회는 없을 듯싶었다.

“자, 대충 마무리되었으니까 빨리 움직이자. 원래 사후 처리가 더 바쁜 거 알지?”

짝!

이진한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주신이 된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이 남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