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불가능하다. 설사 내가 돕는다고 하여도 너는 저 가증스러운 여신에게 닿을 수 없다.”
“그래, 평범한 방법으로 말이지.”
“설마….”
“신격을 포기하고 내게 모든 것을 쏟아부어라. 그것만이 여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프로메테우스는 아직 천족과 싸우고 있는 제 사도들을 바라보았다.
오직 자신 하나를 바라보며 지난 수천 년을 고생해준 자식들.
이대로 반신이란 자존심을 세운 채 패배한다면 그 노력과 인고의 세월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나는 애초에 다른 세상의 존재다. 일만 제대로 끝난다면 주신의 자리는 기꺼이 양보하지.”
“…지금으로선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군.”
프로메테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태초의 반신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으로 선언하나니….”
그는 곧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대현자가 극한으로 활성화된 이진한으로서도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태곳적 언어.
곧 항거할 수 없는 신격이 자신의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보아 협력이 타결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승부수를 띄웠다.
“「세계의 근원」이어, 적합자로 제안하나니 저울추의 무게를 맞추길 원한다.”
주신이 될 자리를 판가름하는 순간이었다.
빛의 구체에서 한 줄기 파동이 터져 올랐다.
그러곤 이때까지 잠자코 있던 여신에게 동의를 구한다. 애초에 주신의 자리는 그녀 쪽에 가까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좋아. 프로메테우스뿐만 아니라 네 힘까지 흡수하면 더는 날 귀찮게 할 존재가 없겠어.”
여신은 곧 히죽 웃으며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반신은 몇몇이 더 있다. 그들 모두 주신의 자리에 잠재적으로 위협이 되는 분자. 하지만 이 둘의 힘을 모조리 흡수한 뒤 완전한 주신의 자리에 오른다면 더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주신의 증명」
세계의 근원이 영역을 뒤덮었다.
곧 이진한을 뜻하는 흑색과 여신을 상징하는 순백이 백중지세를 이루며 첨예하게 세상 가운데서 대립했다.
“동수…!”
원정대 중 누군가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를 질렀다.
얼핏 보기에 균형을 이루는 듯했지만, 이진한은 고개를 저으며 가늘어진 눈으로 말했다.
“주신이 되기 위한 자리는 고작 자신의 힘만으로 판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세계의 인정.
그리고 그 다른 이름은 신앙이라 불렸다.
츠즈즈즈!
둘 한가운데에 아르테니아 대륙 형태의 그림자가 투사 되었다.
곳곳으로부터 각 진영의 색을 상징하는 빛의 선이 솟구쳤고, 이진한과 여신의 몸에 연결되며 세계의 인정을 저울질했다.
“네게 승산이 있을 것 같아?”
여신은 같잖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를 숨기는 신성 교단은 대륙의 6할이 신봉하는 종교였다.
이 자리에선 천족, 그리고 원정대 쪽에서는 프레이를 비롯한 팔라딘과 추기경의 선이 여신에게로 닿았다.
“….”
반대로 이진한을 향해 솟구친 선은 고작해야 전체의 2할 정도.
그와 직접 적인 연이 있거나, 용사 그리고 영웅의 소문을 듣고 흠모하는 이들의 것이었다.
“흠.”
자신과 비교하자면 삼분지 일에 불과했지만, 여신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6할. 이 세계에서 널 신봉하는 존재의 비중이다. 물론 나와 비교하면 매우 많지만, 그래도 큰소리친 것처럼 절대적인 수치는 아니군.”
“…그들 또한 품는 것이 여신의 본분이다. 길 잃은 어린 양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하지만….”
여신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세계는 너무 타락했어. 완전한 주신이 된다면 세상을 재구축할 것이다.”
“완전한 무로 되돌린 다음 다시 창조하겠다?”
“그래. 한점의 이질감 없는 유토피아를 만든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 가운데서 사는 거야.”
“오로지 너를 위한 장난감들일 뿐인 세상이겠지. 그건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조금 전까지 인간이었던 주제에 신 흉내라도 내는 거야? 그렇다면 선배인 입장에서 말해줄게.”
딱!
“같잖기 짝이 없네, 라고.”
콰지직!
흑백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압도적인 격차로 밀리는 가운데, 이진한은 몸을 돌려 제 옆에 있던 프레이를, 신성 왕국의 성왕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지금까지 너희들이 섬겨 온 여신이란 존재의 민낯이다.”
추악하고, 포악하며,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행위에 스스럼이 없다.
지금껏 네가 배운 교리에는 그렇게 하라고 쓰여 있던가?
“….”
프레이는 멍하니 이진한을 올려다보았다.
“이 세계의 신이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지금 단언하마, 여신은 악이다. 만일 여기서 그녀가 주신이 된다면 모든 이들이 자아를 잃은 채 오로지 한 명만을 신봉하는 불합리로 뒤덮인 세계가 될 것이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여신이 웃음을 토해냈다.
“재밌어. 고작 한 명, 아니 수십을 설득해서 무엇이 바뀌지? 인간은 어리석고 멍청하고 쓸모없는 존재다. 대다수는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를 거야.”
“프레이, 날 봐.”
“아이야. 신경 쓰지 말아라. 내가 너희를 유토피아로 이끌어줄 터이니. 그곳에서는 아무런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너만이 원하는 유토피아겠지. 프레이, 아니 성왕이여. 너는 정말로 이런 걸 원해서 여신을 믿었나?”
붉은 눈동자 위로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재로 물든 금발을 찰랑거리며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날 봐.”
“제가, 제가 뭘 어쩌면 되는 거죠?”
진중하고, 고결하며, 신실한.
하지만 여신은 자신들이 생각하던 그런 여신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그 시선엔 거룩함이나 수많은 이들이 울부짖는 신성 따위는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평생을 믿어온 신앙이 눈앞에서 부정당했다.
탁.
이진한은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움켜잡으며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날 믿어라. 그리하면 저런 반쪽짜리 여신보다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줄 테니.”
“…베르너 님.”
츠즈즈즈─.
프레이로 비롯된 선이 여신으로부터 이진한을 향해 옮겨갔다.
다른 팔라딘과 추기경 역시 마찬가지. 그래도 아직 소수는 여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못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못했다.
“아하하하! 좋아! 걸작이 따로 없네. 대단해! 성왕 정도 되는 위치면 나에 대한 신앙심도 대단할 텐데, 그걸 세 치의 혀로 돌리다니. 아니, 신앙이 아니라 남녀의 관계라서 그런가? 벌써 둘이 잔 거야? 그런데 어떡하지? 나를 지지하는 신앙은 아직 이토록 많은데.”
그녀는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대륙으로부터 이어진 선의 숫자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어쩌긴.”
“…?”
하지만 이진한은 피식 웃은 채 프레이의 손을 조심스레 놓아주고는 여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여신이 두 눈을 가늘게 뜰 찰나, 확연한 변화가 그들 가운데 나타났다.
파아앗!
이진한 쪽으로 수만, 아니 수천만의 실이 새로 드리운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여신은 두 눈을 부릅떴다.
“무슨 짓을…!”
“별것 아니다. 지금 너희 둘이 한 대화를 대륙 곳곳에 옮겨서 조금 큰 소리로 퍼트려 주었지.”
프로메테우스는 창백한 얼굴로 씩 웃었다.
반신의 격을 대부분 포기했기에 여신은 더 이상 자신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그 정도 기예를 부릴 힘은 남아 있기에 여신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은밀히 사도를 움직여 목소리를 퍼 나른 것이었다.
“…그렇다 한들 바뀌는 건!”
무려 여섯 배에 달하는 압도적인 숫자다.
그 차이가 순식간에 메꿔지는 일은 쉬이 일어나지 않을 터.
하지만 이진한은 고개를 저었다.
“작은 균열이 커다란 댐을 무너뜨리지. 굳이 나에게 마음을 돌리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은 그저 널 의심하는 마음이 든다면.”
툭, 투둑.
여신을 향한 실이 하나둘 끊기기 시작했다.
곧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더니 눈에 보일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름을 알리길 잘했네.’
마계의 군세가 움직이기 직전까지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활약하던 것이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여신의 말대로 인간은 어리석기 그지없다.
그러니 그저 허공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만으로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며 이렇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무신론자들의 선이 대부분 이진한에게로 연결된다. 여신에게서 옮겨온 이들은 일부였지만, 지금 당장 그녀를 지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짝!
이진한은 여세를 몰아 공간을 장악해나갔다.
검은 별빛이 영역을 뒤덮었고, 순식간에 세를 부풀리며 여신을 압박해나간다. 하지만 그녀 역시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 않았다.
“그간 뭘 꾸미는가 싶더니, 잘도 이런 짓을 계획했네.”
열여섯 쌍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주신으로서 쌓은 존재감을 사방으로 떨쳤다.
이진한은 처음으로 권능을 사용하는 것이었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애초에 대현자는 신격을 다루기 위해 설계한 것이니.’
여신이 남긴 인세의 흔적을 그러모아 조합했다.
거기에 《영원》의 「삼라만상」을 조합해 완성도를 높여 지금에 다다른 것이었다.
세상을 자신 아래 두었다.
영역이나 사정거리 같은 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정말로 그 공간 자체를 자신의 지배하에 둔 것이었다.
삼라만상을 통해 현상 개벽을 이룬 것처럼 현실의 법칙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었다.
“그래. 본래라면 성립조차 하지 않은 싸움이었겠지. 하지만 네가 완전하지 못한 것을 탓해라. 이쪽은 천년이나 기다려왔으니까.”
빛과 어둠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 싸움이 절정에 달했을 때, 「세계의 근원 」이 공명하며 여신과 이진한을 둘러싸는 불길을 토해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진한은 이를 악물었다.
반신의 격에 오르고, 프로메테우스의 신격을 전해 받고, 여신의 신앙을 훼손해 자신이 있는 곳까지 끌어내렸다.
…하지만.
파가각.
빛이 어둠을 갉아먹었다.
한 발자국, 딱 한 발자국이 부족했다.
조금 전까지 일그러진 얼굴로 신격을 뿜어냈던 그녀는 이제 사뭇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사력을 다했겠지. 하지만 그 아주 조금의 간극이 내가 말한 존재의 이유다. 네 역할은 나를 돋보이게 해주는 감초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여신은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문득 좋은 생각이 난 듯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알려줄까?”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 형태가 무너지며 다른 얼굴로 뒤바뀌기 시작한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선명한 형상에 이진한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너희는 《영원》이라고 불렀던가. 꽤 재밌었어. 이방인을 내가 원하는 길로 이끌기 위해서 즉흥적으로 시작한 연극치고는 제법 즐겼지.”
자신들의 동료이자, 같은 영웅 중 한 명인 《영원》이 사실은 모든 일의 흑막이었던 여신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이진한은 큰 동요를 드러냈다.
그를 둘러싼 권능이 흔들리며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고, 여신은 그 틈을 타 앞을 향해 나아갔다.
「세계의 근원」에 도달하기 직전.
그녀는 자신의 움직임을 얽매는 무언가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뭐? 반신이 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