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반신은 불사(不死)의 속성을 지녔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상처를 입히는 것도, 천 년 전처럼 봉인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마르바스는 레반테인의 특수한 성질과 네 마왕의 힘을 흡수해 반신 격에 준하는 힘을 얻은 상황.
그가 발하는 마기는 반신의 고유인 권능에 가까워졌다.
사실 마르바스는 그것까지 알지 못했지만, 생각보다 묘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욕심을 낸 것이었다.
“크윽….”
내부를 헤집는 마기에 일순간 운신이 힘들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
프로메테우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손을 휘두르자 푸른 불꽃이 일어나 제 몸을 좀먹은 마기와 부정한 기운을 태우며 순식간에 마르바스에게로 도달해갔다.
-…!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는 황급히 레반테인을 놓고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의 불꽃은 순식간에 그 몸을 집어삼키며 살을 태워 갔다.
-커억!
반신 격에 준하는 힘을 얻은 마왕조차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그 틈을 타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있는 레반테인을 뽑아냈을 때, 마르바스는 절규를 토해내며 앞쪽에 있던 「세계의 근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것만 얻으면…!
“…이런!”
설마 마르바스가 이렇게 저돌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기에 프로메테우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허공을 뛰어넘어 「세계의 근원」에 다다른 마르바스의 몸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어느 곳을 기점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가로막혔다.
“한심하네.”
“…!”
사뭇 늘어진 여신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프로메테우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자신에 의해 신격에 훼손당하는 큰 상처를 입어 당분간 운신이 불가할 터.
그렇다면 이 여유로운 음색은 무엇인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자 그들 머리 바로 위에 떠 있는 구름에 걸터앉아 다리를 꼰 채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던 여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파스스─.
이제껏 그녀를 흉내 내던 분신의 형태가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여신이 등 뒤로 열여섯 쌍의 날개를 펄럭이자, 하늘에서부터 수백에 달하는 천족이 내려왔다.
척.
프로메테우스의 등 뒤로도 검성을 필두로 한 수십의 사도가 존재를 드러냈다.
그리고 겨우 자신의 몸을 좀먹는 불꽃을 털어낸 마르바스 역시 제 휘하의 마족들을 거느리며 자리에서 우뚝 섰다.
“베르너 님!”
마왕성에 있던 원정대 역시 이쪽에 합류했다.
천족과 마족, 그리고 반신까지.
무슨 상황인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세 세력의 첨예한 대치에 압도되어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
제일 초라한 건 단연 이진한 쪽이었다.
원정대의 숫자는 고작 수십 남짓.
전체적으로 프로메테우스 쪽과 비슷한 규모였지만, 프로메테우스의 신력을 물려받은 사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프로메테우스. 네가 천 년 전에 내게 패배한 이유를 알아?”
가장 압도적인 건 여신을 필두로 천족.
순백의 색으로 뒤덮은 그 가운데, 여신은 제 손톱을 쓰다듬더니 후 불었다.
“미련하고 멍청해. 앞만 볼 줄 알지 옆과 뒤를 살필 줄 모르지. 여신으로서 세상의 순리와 흐름을 주관하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좀 웃기지만, 설사 상식적으로 지난 천 년 동안 주신 자리에 있었던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기다렸을 것 같아?”
여신이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곧 손을 털어내고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그 신호를 기점으로 주위가 새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무너져가는 도시, 신음을 토해내는 대지, 형형색색의 기묘한 무늬를 띠며 일렁거리는 하늘까지.
모두 순백색으로 덧씌워졌다.
“…이건.”
이진한의 옆까지 다가온 일레이나는 그 익숙한 현상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삼라만상」의 기조와 비슷하나, 그것을 아득히 넘어선 경지다. 자신의 눈으로는 그 일부를 해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일단 자격도 안 되는 벌레들을 먼저 좀 지울까?”
딱.
여신이 손가락을 튕기자 마족들이 새하얀 불꽃에 휩싸여 순식간에 소멸했다.
-이 무슨…!
마르바스는 괴성을 내지르며 저항했다.
하지만 반신 격에 가까운 마왕의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몸은 너무나도 허무히 다른 마족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
수천의 마족이 타죽었음에도 재조차 남기지 않았다.
오직 마르바스가 서 있던 자리 위에 주먹만 한 검은 구체만 덩그러니 떠 있을 뿐이었다.
여신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검은 구체는 천천히 허공을 가로질러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그녀는 구체를 매만지며 작게 웃음을 토해내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멍하니 있던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너희 세상에서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고들 하지? 하지만 이 세상에는 따로 있어. 모든 존재는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역할을 부여받지. 흔히 말하는 인과나 운명 같은 것 말이야.”
마왕은 처음부터 마왕으로,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으로, 드래곤은 처음부터 드래곤으로.
각자 헤어나올 수 없는 굴레에 속해져 있다.
“저런 별종을 제외하곤 말이야.”
여신은 희고 가는 손가락을 들어 프로메테우스를 가리켰다.
갑작스럽게 지목당한 태초의 반신은 서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여신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너는 처음부터 주신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냐.”
“그래. 그러니까 천 년 전에 너를 이기고 「세계의 근원」을 손에 넣었지. 지금도 봐봐. 네가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야?”
여신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하늘을 뒤덮고 있던 천족들이 자신의 날개를 펄럭이며 지상으로 돌격했다.
곧 사도들과 맞붙으며 순백의 세상이 피로 물든다. 서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싸움이었지만, 실상은 승자가 패자를 유린하는 능욕이었다.
“….”
프로메테우스는 이를 악물었다.
부활만 한다면 어떻게든 천 년 전의 싸움을 재현할 수 있노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여신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을 깨뜨리지 못한 것만으로도 승패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거친 소음만이 뒤덮인 공간 가운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때까지 멍한 얼굴로 침묵하던 이진한이 숨을 토해낸 것이었다.
“…베르너 님!”
뇌가 과열된 영향으로 터져버린 왼쪽 눈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그 심한 상처에 엘레오노라가 기겁하며 다가갔지만,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접근을 막았다.
쓱.
가볍게 얼굴을 매만지자 눈이 재생되었다.
포션도 마법도 쓰지 않은 신기. 눈동자에 깃든 빛이 이전과는 다르다. 대현자의 능력이 극한까지 활성화되며 세상 모든 정보가 그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흠.”
여신은 발을 까딱이며 정신을 차린 이진한에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잘해주었어. 천 년 전에도, 지금도.”
다른 차원의 존재를 불러온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묘수가 아닐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일이 손쉽게 풀린 건 아니다. 이 세계와 같은 게임을 저쪽 세상에 구현하고, 그곳의 랭커들을 넘어오게 하는 건 자신에게도 큰 도박수였다.
“미안하게 생각해. 다른 차원에서 불러와 놓고 내버려 두다니. 원래는 너희가 왔던 세계로 돌려보내 주려고 했는데 반쪽짜리 「세계의 기원」 때문에 완전한 주신이 되지 못해서 말이야. 지금은 된다고 해도 좀 시간이 걸릴 텐데….”
여신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인간의 몸으로 그 세월을 버틸 수 있을진 모르겠네.”
이진한은 고개를 들었다.
“태생부터 존재의 쓰임이 정해져 있다고?”
“그래. 네 주위에 있는 모든 인간 역시 지금의 순간을 위해 준비된 운명이야. 뭐, 자신들은 몰랐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좀 틀린 것 같네. 운명을 부정하는 별종은 프로메테우스만 있는 것이 아니야.”
봉인된 기억을 불러오는 트리거는 완전한 「세계의 근원」이었다.
그 가운데 이진한은 천 년 전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것을 보았고, 그때의 기억을 모두 흡수했다.
지금 이 자리까지 도달한 것은 모두 자신의 계획대로였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진짜 계획의 시작이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대현자, 그리고 그 하위 클래스.
검, 마법, 창, 활, 권각술, 악마화, 신성….
수십에서 수백 가지의 능력.
그중 오로지 딱 하나, 이 공간을 넘어 여신에게 닿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츠즈즈즈─!
《영원》의 「삼라만상」
대현자의 개화로 인해 극한의 운용에 다다른 「삼라만상」의 현상 개벽이 순백의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흑색으로 뒤덮어갔다.
“…그걸 사용할 줄 안다고?”
여신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진한이 자신의 영역 아래로 장악할 수 있었던 범위는 전체에서 고작 2할 정도. 그마저도 여신이 프로메테우스를 견제하고 있어서 그렇지, 마음먹고 나선다면 이 2할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 무너져버릴 것이었다.
“놀랍긴 한데, 그것으로 끝이네. 더 숨겨놓은 것 없어?”
여신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였다.
이진한 역시 조급한 기색 없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두 눈을 사납게 떴다.
애초에 밀릴 것은 알고 있었다.
「삼라만상」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해도 어찌 되었든 술식과 마나로 짜인 마법이었다.
그 경지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고 해도 신격이 발하는 진짜 권능에는 미치지 못할 터.
하지만 어느 정도 대등하게 싸움이 성립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태곳적부터 내려온 고서 한 권이 있었지. 그것에는 하얀 새를 쫓아 숲을 돌아다니는 소녀에 대해 적혀 있었다.”
그 말에 여신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시대에는 잊힌 여신의 모태가 되는 기원의 이야기다.
그녀 역시 처음부터 여신이 아니었다. 프로메테우스가 태초의 반신이라는 건, 여신은 그 이후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었다.
…혹은 다른 굴레를 초월해 반신의 격에 올랐던가.
“하얀 새는 진리였고, 숲은 세상이었다. 여신이여, 너는 세상 가운데에 처음으로 진리를 찾아낸 것으로 반신의 격에 올랐지.”
프로메테우스가 태초의 반신이었다면, 여신은 태초의 현자였다.
오늘날 세상에 정립된 모든 마법의 기조는 그녀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로메테우스가 태초의 반신이라는 존재로 반신의 격을 인정받았다면, 여신은 태초의 현자라는 것으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으로 신과 대등하게 맞서 싸운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업적이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그 원초는 수많은 악마 그리고 마족과 마수를 넘어온 용사. 고대로는 악신을 쓰러뜨린 원정대의 일원으로 현세에 영웅이라 불리며 평범한 인간의 굴레를 진작에 뛰어넘었다.
“「세계의 근원」이어. 이 정도로는 부족한가?”
이진한, 《지혜》의 검은 현자는 씩 웃으며 「세계의 근원」을 향해 대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졌다.
[「세계의 근원」이 당신의 공로를 인정합니다.]
[종족의 굴레를 벗어납니다.]
[속성 ‘불사’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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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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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외에도 수많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여신, 그리고 프로메테우스. 그 둘과 동일선상인 반신 격에 서는 것이 천년을 기다린 계획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여신이 말했던 대로 그녀는 주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적지 않은 힘을 비축했다.
그러니 이진한은 고개를 돌려 유일하게 아군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프로메테우스, 태초의 반신이여.”
“….”
태초의 반신이 옅은 웃음을 토해내었다.
“미래를 읽을 수 있는 내 눈으로도 지금의 광경은 보지 못했다. 설마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새로운 반신의 탄생.
자신처럼 온 세상이 축복하지도, 여신처럼 위대한 발견을 한 것도 아니다.
“나를 도와라. 그리하면 여신과 맞서 싸울 수 있다.”
그저 담담히, 천년이란 세월을 기다려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받아낸 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