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206화 (206/210)

◈ 206.

눈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머리는 불을 붙인 것처럼 뜨거웠고,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 누군가 못을 박아 놓은 듯 꼼작할 수가 없었다.

츠즈즈즈─!

그 사이 여신과 프로메테우스 사이의 세계는 생성과 소멸을 수없이 반복했다.

검을 휘두르거나 마법을 쓰며 우위를 가루는 조악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권능을 발하며 세계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세계의 근원」

대현자의 눈이 맹렬하게 활성화하며 그 구조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얼마간 자리에 북 박힌 채 있자니 머릿속에서 무언가 끼워 맞춰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조각 조각이 모여 구조를 이뤘고, 굳게 닫힌 자물쇠를 풀어낼 열쇠를 만들어냈다.

팍!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너무 과욕이었던 걸까.

과열된 왼쪽 눈이 터져 나가며 시뻘건 피가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꽉 깨문 이빨 사이로 소리 없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동시에 이진한은 남은 시야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시간의 유예가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줄어 들어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3214:52:14】

【1749:13:49】

【324:05:58】

.

.

.

【00:00:59】

수천 시간의 유예가 눈 깜빡할 사이에 1분도 채 되지 않은 숫자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그 자리에 고정된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무엇이 일어나려는 것일까.

50, 40, 10. 마침내 유예가 여섯 개의 0으로 뒤덮였을 때.

[네 번째 메인 스토리가 해금됩니다.]

◈ 구시대의 몰락

◈ 신시대의 영웅들

◈ 창궐하는 마계

→ ◈ 천년의 대계

[데이터를 동기화합니다.]

[세계의 근원에 대한 정보가 업로드되었습니다.]

[영원의 결정 - 수집률: 15.8%]

[트리거가 발동합니다.]

콰직.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다량의 정보가 뇌리 가운데로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해있던 여신과 프로메테우스는 신경조차 쓰지 않을 정도로 작은 변화. 그 막막함에 몸을 휘청거리던 이진한은 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정말 여신이 우릴 배신한 거야?

-이런 씨팔! 악신을 쓰러뜨리면 돌려보내 준다면서!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이곳에서는 고대 영웅이라 불리는 자신의 동료들이 각자 일그러진 표정으로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럼 영영 못 돌아가는 거야?

-차원을 넘는 건 신격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우리를 불러온 것이 여신이었으니 돌려보내는 것도 여신만이 가능하겠지.

-이 빌어먹을….

장면이 바뀐다. 함께 있던 이들은 사라지고, 홀로 남은 자신의 어깨로 진하율이 머리를 기대왔다.

-솔직히 나는 어찌 되든 상관없어. 저쪽이든 이쪽이든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치료제는 개발 중이다. 아슬아슬하게 때에 맞출 수 있을 거야.

진하율은 병에 걸렸다.

초월지경에 이르러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초월자가 무슨 병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초월자의 몸을 내부로부터 썩어들게 할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다.

-…그래.

-그래. 내가 반드시 치료할 거다.

이진한은 이때의 자신이 때에 맞추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좋은 곳으로 갔을 거다.

장면이 또 바뀌었다.

먹구름으로 물든 날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이들이 하나의 무덤을 둘러싸고 있다. 자신이 그 앞에 서 있자 누군가 다가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두드렸다.

-…이게 정말 맞는 걸까.

-맞는 일이 어디 있겠냐. 이 세계로 온 순간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손에서 불을 내뿜고 검을 휘둘러 바다를 베어버리는 힘을 손에 넣었다고 할지라도 그저 장기판 위의 기물일 뿐이다. 사랑하는 이조차 지켜내지 못하며 무력하게 죽어가는 것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허무함이 전신에 팽배했다.

-다들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괜히 붙어 있어도 좋은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으니까. 너는 어쩔 셈이지?

-나도 돌아갈 거다. 근원의 마탑으로.

-그런가.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아.

자신을, 동료들을 이렇게 만든 여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니, 뒤틀린 세상의 흐름을 바로잡기 위해.

그 뒤로 수백 년, 홀로 고독함을 곱씹으며 끊임없이 연구했다.

대륙 각지를 돌아다니며 방법을 갈구하고, 익힌 클래스의 한계를 돌파해 새로운 경지를 탐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여신의 손아귀 아래 놓인 것이니 무언가 새로운 요소를 집어넣지 않는다면 뚜렷한 타개책이 되지 못했다.

-역시.

이 세상 가운데 유일하게 여신의 손에 있지 않은 단 하나의 요소.

「세계의 근원」

차원 자체를 구성하는 그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여신이 악신을 쓰러뜨리고 얻은 근원이 반쪽짜리임을 알고 있다. 그 탓에 자신들을 원래 세계로 돌려 보내줄 수 없다며 구구절절하게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는가.

남은 반쪽은 봉인된 악신이 지니고 있다.

다시 봉인을 풀고 악신을 깨워 「세계의 근원」을 하나로 합친다면.

-…그렇다고 한들, 여신이 또 배신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거래해야 할 대상이 바뀌었다.

이진한은 악신을 섬기는 사도를 찾았다.

원정대의 일원이자 영웅 중 한 명인 자신은 그들에게 있어서 철천지원수. 처음에는 찢어 죽일 듯 닥쳐왔지만, 오히려 이진한 쪽에서 수십을 죽인 후에야 겨우 대화가 성립되었다.

-천년이다. 천년 뒤의 주기에 네놈들의 신을 봉인한 결계의 반감기가 닥칠 것이다. 시기를 놓치면 결계는 다시 단단해지겠지. 그러니 정확한 때를 노려야 한다.

-…그걸 우리보고 믿으라는 것인가. 그 더러운 손으로 신을 봉인한 네놈의!

-믿지 않으면 어쩔 거지? 피차 여신을 적으로 두고 있는 건 같지 않나? 빈약한 너희가 다시 부흥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인데.

사도들은 이진한을 의심했지만, 그가 정말로 도움을 주자 차차 경계를 거두었다.

그렇게 약 백여 년. 연인이었던 진하율을 덮친 병마가 그에게도 닥쳐왔다.

끝끝내 치료제를 만들지 못했던 병이다.

이진한은 죽음을 직감했지만, 자신이 세운 계획을 이룰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었다.

-앞으로 천년. 나는 나를 봉인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병은 사라지지 않는다. 봉인에서 풀려난다면 그 병 역시 다시 움직일 텐데?

-봉인된 상태에서 시간을 거스를 거다. 이 세계로 온 뒤의 어느 시점으로 옮겨가면 피해낼 수 있겠지.

-깨어 있는 상태로는 불가능한가?

-세포 단위를 바꾸는 일이다. 조금의 움직임도 허락되지 않아. 시간도 오래 걸리고 위험성이 많이 따라서 깨어 있는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마탑의 관리는 오스칼 제국 측에 맡길 생각이다. 어차피 자신을 뛰어넘는 경지의 대마도사가 나올 리도 없으니 봉인이 풀릴 때까지 자신을 깨울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내가 가진 힘 역시 대부분 소실되겠지.

-그렇다면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 아닌가?

-아니. 나라면 분명 빠르게 이곳까지 다시 도달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이진한은 두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과거를 보여주는 기억을 건너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진하율이 말한 해방의 조건은 완전한 「세계의 근원」을 보는 것. 지금 그것을 눈앞에 두자 심층 의식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던 술식이 해제되어 그간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파가각─!

그 사이 눈앞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시작부터 우위를 점하던 여신이 어느 기점을 계기로 얼굴을 찌푸리며 주춤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큭….”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에 프로메테우스는 당연하다는 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세상을 움직이는 데는 많은 힘이 들어가지. 세계의 근원이 완전하지 못했으니 힘의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터. 그에 반해 나는 지난 천 년간 막중한 힘을 비축했다.”

중간계와 마계를 잇는 게이트와 마왕 소환에 쓰인 기운이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크기였다.

프로메테우스는 곧 권능의 우세를 떨치며 장악한 영역을 점차 넓혀가기 시작했다.

여신의 신성이 뒤덮은 성역이 점차 깨어져 나갔고, 그 사이로 적색의 기운이 가득 채우며 비중을 넓혀갔다.

신을 추락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격을 훼손하는 것이다.

마침내 여신을 궁지에 몰고 간 그는 열여섯 쌍의 날개 중 가장 위에 있던 한 쌍을 꽉 잡으며 힘을 가했다.

찌이익!

순백의 깃털이 흩날리며 날개가 찢어졌다.

여신은 충혈된 두 눈을 부릅뜨며 반항하려 했지만, 프로메테우스의 권능을 막아 세우는 것이 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오늘부로 네 세상은 끝이다. 가증스러운 여신이여.”

순백의 날개는 여신을 상징하는 신격.

그것이 직접적으로 훼손되었으니 주신이라는 위치가 흔들리며 세계의 근원을 잡아당기는 주도권이 프로메테우스에게로 다가왔다.

“…오오.”

프로메테우스는 처음으로 감정의 변화를 드러냈다.

천년? 우습기 짝이 없다.

태초의 반신으로서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까마득한 시간을 지나왔다.

그 가운데 겨우 목표가 눈앞에 다가왔는데 얼마나 감개무량한 순간이겠는가.

여신은 그 격을 훼손당해 당장 움직이기 힘든 상황.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는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품이 나올 정도의 과정이로군.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에 들어갔던 고생을 생각해보자면. 아니, 항상 그랬다. 너는 마무리에서 허술했지.”

「세계의 근원」

그 찬란한 빛이 다가오자 프로메테우스는 그것을 움켜 쥐었….

푹.

그 가슴을 뚫고 레반테인이 삐죽 솟아올랐다.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붉은 피가 검신을 타고 사방으로 솟구쳤고, 프로메테우스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뒤를 바라보았다.

“…놈!”

한옆에서 넋을 잃은 채 자신의 신을 바라보고 있던 검성이 눈이 뒤집힌 채 닥쳐왔다.

마왕들을 단숨에 베어낸 날카로운 검이 다시금 세상에 강림했지만,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진 마르바스는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파각!

단 일격으로 검성의 검을 튕겨내고 그 가슴을 뭉개버린 것으로 격퇴한 마르바스는 씩 웃으며 프로메테우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신이라 할지라도 그 피는 붉군.

“…어째서?”

프로메테우스는 의문을 지녔다.

대업의 달성이 목전의 일이다. 주신의 격에 오른다면 그와 약속했던 대로 마계를 평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텐데.

-생각해보니 말이야, 내가 직접 주신이 된다면 그보다 손쉬운 일은 없지 않겠어?

“마왕이여, 맹세를 잊었는가.”

서로 존재를 걸고 맹세를 맺었다.

이렇게 배신한다면 그 역시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들 터.

하지만 마르바스는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

-내가 마왕의 혼을 잡아먹게 해둬선 안 됐어.

맹세의 개연성은 조금 전 흡수한 마왕의 혼들이 감당할 것이다. 물론 자신 역시 피해가 아예 없지 않겠지만, 주신의 격을 차지할 수만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설령 그렇다 한들 날 죽일 수는 없다.”

-그래, 반신은 기본적으로 불사의 존재니 말이야. 그러니 천 년 전의 여신도 죽이지 못한 채 봉인해둔 것이겠지. 하지만.

콰악!

마르바스는 레반테인을 쥔 손을 비틀었다.

뼈가 끊어지며 상처가 점점 벌어진다. 프로메테우스는 창백한 안색으로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검을 밀어내려 했지만, 마르바스는 어림도 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왕을 넘어선 마신이 눈앞에 있었다.

이 천여 년 동안 물밑에서 준비한 것은 프로메테우스 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야말로 신세계의 신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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