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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205화 (205/210)

◈ 205.

쩌저적─.

허공이 찢어지며 균열이 생겨났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본능적으로 그가 이전에 맞서 싸웠던 검성 요하넬임을 알 수 있었다.

“….”

검성은 덤덤한 표정으로 주위를 훑었다.

마르바스, 그리고 그와 대치하고 있는 세 마왕, 끝으로 멀찍이 떨어져 가시 돋친 고슴도치처럼 자신의 움직임에 하나하나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는 이진한까지.

“생각보다 이르군. 조금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용사의 힘이 예상보다 훨씬 더 강했다. 덕분에 꽤 고생 좀 했지.

마르바스는 제 팔을 들어 올렸다.

거친 싸움으로 군데군데 깨지고 부서진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것들도 조금 전 아몬을 흡수한 덕분에 점차 회복되며 제 상태를 되찾아갔다.

-마르바스. 당장 설명하라. 대륙 정복이라는 과업 앞에서 네놈의 야욕을 드러내는 것이냐.

-바알 님과 아가레스 님이 가만 계시질 않을 것이다. 그분들이 두렵지도 않으냐!

아스타로트와 아스모데우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마르바스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지난 수천 년간 보신을 위해 제 마왕성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겁쟁이들을 내가 왜 두려워해야 하지? 그리고 명색이 마왕인 놈들이 자신보다 상위 서열의 이름을 들먹이며 겁박하는 꼴이 우습지 않으냐.

-네놈!

-내가 그러니 마왕의 숫자를 줄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같은 마왕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조차 수치스러운 놈들.

마르바스는 균열을 찢고 나온 검성을 향했다.

-아몬의 힘을 흡수했어도 용사와의 싸움에서 생긴 소모가 적지 않다. 뒷일은 부탁하고 싶은데.

“알겠다. 그것이 서로의 거래였으니 말이야.”

파지직─.

어느새 뽑아 든 검이 검성의 손 위에 들렸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적색 스파크가 튀며 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이건.

-설마 마르바스 네놈, 저들과 손을 잡은 것이냐!

-정보가 늦어도 한참이나 늦군. 수하들이 떠먹여 주는 것에 익숙해진 얼간이들이.

이진한 역시 두 눈을 부릅떴다.

검성이 마왕과 결탁한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황실 쪽은 마계 세력이 지배당한 지 오래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검성이 발한 기운은 대체 무엇인가.

파각.

한 줄기의 붉은 스파크가 그에게 부닥쳤다.

신성과 마기로 이루어진 결계가 그것을 막아냈지만, 가벼운 충돌로도 깊은 충격을 일으키며 그 위에 실금을 자아냈다.

“허.”

고대 신의 기운.

봉인된 잔재와 한 치의 다름없이 일치하는 힘이었다.

검성이 고대 신의 사도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의 제자를 마르바스의 제물로 삼은 것일까. 설마 그것까지 다 계산하고 저들과 손을 잡은 것인가.

사도는 천여 년,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온 존재들.

검성이란 이름을 만들고 제국 황실을 타락시키며 이 모든 것을 준비해왔단 것일까.

짜인 판.

이진한은 그제야 마르바스가 했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뒷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설령 이곳의 화신체를 쓰러뜨려도 마계에서 우리를….

-혀끝이 길구나. 어차피 이쪽 일이 모두 끝나면 네놈들 모두 내 발 앞에 조아려야 할 것이다.

저저적─.

마르바스가 코웃음을 침과 동시에 마왕들의 몸 위로 모두 시뻘건 궤적이 그려졌다.

조금의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조각들로 전락한 피륙들이 흩어져 내린다. 마르바스는 그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 현자여.”

검을 거둔 검성이 이진한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잠시간 자신의 턱을 붙잡더니 이내 얼굴과 목소리를 바꾸며 언젠가 만났던 사도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진한은 그것을 보며 허탈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감쪽같이 속았네. 설마 검성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부끄러워할 것 없다. 너는 훌륭하게 제 몫을 다해주었으니.”

“마르바스와는 언제부터 손을 잡았지?”

“처음부터. 그는 마왕의 숫자를 줄이고 싶어 했다. 여신과는 애초에 대적하는 사이이니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지.”

-정말로 잘해주었어. 덕분에 예정보다 더 빨리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마왕들의 기운을 모조리 흡수한 마르바스의 머리에는 새로운 뿔이 하나 더 돋아나 있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아까보다 최소 서너 배는 더 강대한 것으로, 그 한계는 대현자로서도 가늠할 수 없었다.

“검은 현자여, 이제 봉인을 해제해라. 지금 이곳은 신성과 마기의 충돌로 여신의 눈이 가려져 있다. 그러니 보험으로 성검의 각성을 서두른 것이겠지. 우리의 신이 부활한다면 다시 한번 여신에게 도전할 것이고, 마왕은 전쟁을 끝낸 채 마계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너는 네가 바라는 소망을 이룰 수 있겠지.”

“…만약 내가 거부한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뿐이다. 다른 방향으로 우회해서 돌아가야겠지만, 바뀌는 건 없다.”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검성, 아니 사도가 전부를 말하지 않은 것쯤은 안다. 하지만 이 상정하지 못한 상황 가운데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나는 솔직히 자네가 거부해줬으면 좋겠어. 용사의 힘까지 흡수한다면 정말로 상위 서열의 마왕에게 도전할 만하거든.

“맹세해라. 내가 여기서 봉인을 해제하면 너희가 말한 대로 하겠노라고.”

“우리의 맹세는 아직 유효하다.”

사도는 손을 들어 올렸다.

서로의 손목을 옭아맨 붉은 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세계의 시스템으로 엮인 것이기에 부정하는 순간 그 역풍을 맞게 될 터.

이진한이 시선을 돌려 마르바스를 바라보자, 그 역시 아쉽다는 듯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 마르바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봉인을 해제하면 더는 중간계를 공격하지 않겠다.

이진한은 침음성을 흘렸다.

검성 하나 뿐으로도 힘든 상대일뿐더러 지금의 마르바스는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강함을 얻었다.

이대로 싸움이 계속된다면 자신은 둘째치고 함께 온 일행은 전부 죽을 것이 자명한 사실.

대현자의 눈도 승률을 0%의 소수점 자리까지 떨어뜨리며 교전하지 않을 것을 추천해왔다.

절그럭.

곧 이진한은 품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검성과 마르바스의 시선을 받으며 그 안으로 마력을 불어넣은 그는 짤막한 말을 내뱉었다.

“듣고 있지?”

-네, 말씀하세요. 베르너 님.

“봉인 전부 해제해.”

-…알겠습니다!

호에엥은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자신을 믿겠다는 듯 힘찬 대답을 해왔다.

그렇게 잠시 뒤, 이 자리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대륙 각지에서 선명한 힘의 격류가 터져 나오며 지평선 위를 물들였다.

“오오.”

사도는 황홀한 표정으로 두 손을 들었다.

그러곤 마치 기도하듯 꽉 맞잡으며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천년! 무려 천년을 기다려왔다! 우리의 신이시여! 불쌍한 종들의 비명에 응답하여주소서!”

대륙 각지에 존재하는 사도들이 제 목을 그으며 신을 불러낼 준비를 마쳤다.

검성 역시 제 손목을 잘랐고, 방울진 핏방울이 하늘로 솟구치며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파아앗!

돌연 허공이 일렁거리며 굵은 사슬에 온몸이 결박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방된 잔재에서 발해진 빛이 사슬을 녹였고, 사도들이 바친 피가 양분이 되어 썩어가던 몸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파스스─.

천년 전 주신의 자리를 건 쟁탈전을 승리로 장식한 여신이 걸어놓았던 주박이 모조리 풀려나갔다.

고대 신은 다시금 원래 모습을 되찾았고, 이내 천천히 지상으로 강림하며 그 모습을 돋보였다.

“아아.”

검성은 그 발아래 부복하며 발등에 입을 맞췄다.

“…오랜만이로구나.”

메마른 음성이 그에 화답한다. 검성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을 때, 담담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르바스가 입을 열었다.

-약속은 지키시리라 믿소.

“걱정하지 말아라. 내 아이가 한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였다.

정말 신이라는 존재일까.

이진한이 잠시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찰나, 고대 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천년이란 시간은 그리 길지 않구나. 아이야, 네 검이 내 가슴을 꿰뚫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래서 복수라도 하시려고?”

“그것 또한 주신이 되기 위한 시련이었으니. 사도의 입을 빌려 한 말은 거짓됨이 없도다. 뒤틀렸던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으며 원래의 흐름을 되찾을 것이다.”

말을 마친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사방을 뒤덮고 있던 자욱한 마기가 물러나며 하늘이 다시금 그 청명함을 되찾았다.

“나, 태초의 반신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세계의 근원이여 응답하라.”

별다른 마나의 흐름은 없었다.

그저 원래 있던 자연스러운 현상인 듯 하늘이 열리며 새카만 미지의 공간으로부터 무언가가 지상을 향해 내려왔다.

「해석 불가」

대현자의 눈으로도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얼핏 보면 「삼라만상」이나 「사계」의 형태와 닮은 듯했지만, 그 내부는 차원이 다른 술식을 띠며 온갖 다채로움을 망라했다.

바라보던 이진한이 일순간 시력을 상실했을 정도로 고차원의 것. 하지만 고대 신, 프로메테우스는 별 어려움 없이 그것을 손에 쥐며 고개를 들었다.

“세계의 근원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것을 가져야만 진정한 주신의 자격을 얻을 수 있지.”

-…그러면 된 것이 아닌지.

“아니. 이건 반쪽에 불과하다. 다른 반은 그 가증스러운 여신이 지니고 있지.”

프로메테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치열했던 싸움이었다. 궁지에 몰리던 그녀는 묘수를 짜냈지. 다른 세계에서 이방인을 소환해 그들의 힘을 빌리겠다는 것이었다.”

“…이방인.”

이진한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승리는 했지만, 세계의 근원은 절반밖에 인정해주지 않았지. 그렇기에 이처럼 부활해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않겠어. 내가 그렇게 되길 바랐기에 네가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

어깨를 짚는 손길에 이진한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찬란한 백금색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새하얀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이제껏 이 세상에서 보아왔던 그 어떤 여성보다 아름답고 고귀했으며 신성했다.

펄럭.

등 뒤에 피어난 열여섯 쌍의 날개만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정신을 놓고 있었으리라.

여신은 고혹적인 미소로 이진한의 뺨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손을 들어 프로메테우스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근원을 소환했다.

파아앗!

두 개의 근원이 반응하며 서로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여신과 프로메테우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서로에게 이끌린 근원은 곧 하나로 합쳐지며 온전한 모습을 보였다.

“잘해주었어요, 용사여. 이제부터는 제게 맡기세요.”

“가증스럽기 짝이 없구나. 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토록 이용하였으면서 또 그 끝없는 굴레에 빠뜨리려는 것인가. 여신이란 작자가 참으로 잔혹하구나.”

둘은 한치의 밀림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 세계가 휘몰아치며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뉘었다.

각자 하나로 합쳐진 세계의 근원을 끌어당기기 위해 엄청난 기운을 뿜어내며 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렸다.

-…크윽.

마왕들의 힘을 흡수해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진 마르바스조차 견디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났을 정도의 여파였다.

이진한 역시 마찬가지로 물러났지만, 그의 두 눈은 여신과 프로메테우스의 중심에 있던 세계의 근원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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