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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204화 (204/210)

◈ 204.

이진한과 마르바스가 서로를 응시했다.

그 가운데 대전의 양옆에 깃든 어둠 사이로 시뻘건 눈동자를 지닌 존재들이 솟아올랐다.

마왕의 곁을 지키는 고위 마족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퍼뜩 정신을 차린 원정대는 황급히 앞으로 뛰쳐나가 이진한의 주변을 지켰다.

“모두.”

스릉.

마검 그라나다가 천천히 뽑혀 나오며 그 흑백 검신을 드러냈다.

이진한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일행을 보며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진지한 표정으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죽지 말도록.”

쿵─!

힘껏 땅을 박찬 그는 권좌에 앉아 있던 마르바스에게로 몸을 날렸다.

첫 일격으로 목을 벨 수 없는 건 알고 있다.

적어도 초반의 주도권은 이쪽으로 가져와 뒤쪽에서 싸우는 원정대와 멀리 떨어뜨리려는 목적이었다.

쉬아아악!

그라나다에서 터져 나온 마기가 게걸스럽게 이빨을 벌렸다.

마르바스 역시 자리를 박차며 뒤로 물러났고, 곧 둘은 황궁을 부수고 뛰어올라 도시 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우선 가볍게 놀아볼까.”

마르바스는 옅은 미소와 함께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마기가 그 주인의 의지에 반응해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며 이진한을 찍어 눌렀다.

쐐애애액!

마치 인간과 자연이 싸우는 듯한 불리한 모양새다.

어지간한 실력자라 할지라도 촌각을 버티지 못한 채 전신이 짓이겨졌겠지만, 이진한은 마기를 온몸에 갑옷처럼 두르며 그 무게를 견뎌내었다.

“다들 용사라고 하면 싸움의 귀재나 투사 같은 이미지를 상상하지만, 아쉽게도 지금껏 내가 만나온 용사들은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

웅웅웅.

새하얀 손가락이 허공을 훑자 흩어져 있던 마기들이 다시 응집되며 나선 형태로 맹렬하게 회전하는 가시들을 만들어냈다.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특별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겠어. 그 깐깐한 여신은 이미 완성된 그릇을 자신의 장기 말로 선택하지 않거든.”

푹!

수십 개의 가시가 이진한의 몸을 꿰뚫었다.

그 하나하나가 드래곤이 뿜어낸 브레스와 같은 위력으로, 아무리 바포메트의 힘을 빌렸다곤 하나 쉬이 막기 힘든 것이었다.

뚝, 뚝….

가시의 끝을 타고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이진한은 온몸이 꿰뚫린 상태에서 피를 토해내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 약한데.”

“그런 꼴로 말하기에는 너무 추한 것 같지 않은가.”

“개소리. 그때의 너는 지금처럼 물렁물렁하지 않았어.”

마룡의 기운을 흡수한 것으로 몇 배나 증폭된 가운데 마왕의 격이 강림했다.

단순히 정면에서 맞서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뭉개질 것만 같은 여파였다. 대전에 들어갔을 때 역시 비슷한 감상을 받았으나, 그때만큼은 아니었다.

“하.”

마르바스는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직접 그 목을 꺾어버리려는 듯 손을 뻗어왔지만,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군.”

콰아앙!

악마화(惡魔化).

바포메트의 마기가 미칠듯한 기세로 터져 나오며 그 몸을 뒤덮었다.

곧 이진한의 몸을 꿰뚫은 가시들을 한입에 집어삼키더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시켰다.

“흠.”

마르바스는 침중한 눈빛으로 손을 뗐다.

근본이 없는 악마라곤 하지만, 용사와 붙어먹으면서 유례없는 성장을 보였다.

지금에 와서는 하위 마왕과 비슷한 수준으로, 잠재력을 보자면 그 이상도 가능해 보였다.

“그렇다고 한들.”

콰직.

마르바스는 거칠게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공간이 찢어지며 한 자루의 검이 그 손에 들렸고, 시커먼 마기를 휘몰아치며 미증유의 참격을 날려 보냈다.

“태곳적부터 존재한 악마여, 자네 앞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잊지 말도록.”

하지만 마르바스는 서열 최상위의 마왕이었다.

순수하게 싸운다면 아무리 고대 악마라 할지라도 상대가 될 리 만무한바.

이진한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등 뒤로 꺼내든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이번엔 이쪽 차례지?”

두 손이 화살을 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시커먼 마기가 몰려들며 활과 화살을 만들어냈고, 그 끝을 마르바스가 선 지상으로 겨누었다.

파바바밧-!

쉴 새 없는 폭격이 대지를 강타했다.

도시의 구조가 급변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 자욱히 피어오르는 먼지가 걷히기도 전에 새로운 공격이 그 위로 들이닥치며 마르바스를 타격했다.

쉬아아악!

마르바스 역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자신의 마검, 레반테인을 휘두른 것으로 거대한 방벽을 만들어내어 이진한이 퍼붓는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종래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가운데 모습을 드러냈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하늘 위에 선 그를 바라보았다.

“수백 년 만에 성사된 마왕과 용사의 싸움이다. 조금 더 즐기자꾸나.”

“계속 그렇게 여유 부려봐. 단숨에 목을 쳐낼 줄 테니까.”

“재밌군. 그것 아는가? 애초에 자네는 내 계획 가운데 안중에도 없는 요소였다.”

“그런 것 치고는 꽤 많이 피해 본 것 같은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로군. 헌데 짜인 판 위에서 노니는 줄도 모르고 날뛰는 모습은 정말로 우습기 짝이 없어.”

짜인 판.

돌연 튀어나온 말에 이진한은 목에 가시가 걸린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전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내가 천 년간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아?”

기세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오히려 그쪽에서 허세를 부렸고, 그 모습을 본 마르바스는 가늘게 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좋다.”

쿠웅─!

마르바스는 꽉 쥔 주먹을 하늘 위로 올렸다.

그러자 지상으로부터 마기가 솟구치며 하늘을 꿰뚫은바. 청명한 그 색을 물들이며 삽시간에 어둠으로 뒤덮었다.

-어디 한 번 그 잘난 솜씨를 보도록 할까.

진정한 마왕의 강림이었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만으로 피부가 저릿해지며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온 몸이 시커멓게 뒤덮인 마르바스의 몸이 비대해지며 그 머리 위로 세 개의 뿔이 삐죽 솟아 올랐다.

이전에 있었던 다리우스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뒤바뀐 모습이었다.

-왜 그러지? 당황한 듯한데.

“…!”

일순간 마르바스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목덜미를 훑는 뜨거운 숨에 이진한이 두 눈을 부릅떴을 찰나, 막대한 힘이 전신을 찍어 눌렀다.

콰아앙!

그의 몸이 그대로 떨어져내리며 땅 깊숙이 파고들자 도시의 반절이 순식간에 뭉개지며 큰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위치.

마르바스는 하늘을 부유하며 작은 점이 되어버린 그를 보며 조소를 흘렸다.

-여유는 누가 부리고 있는지 모르겠군.

“….”

이진한은 무너진 잔해를 해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악마화를 했음에도 타격이 작지 않다. 과연 마왕은 마왕인 듯 이제껏 만났던 모든 적보다 더 미칠 듯한 강함을 보이며 막막함을 선사했다.

웅웅.

돌연 그라나다가 옅게 진동하며 울음을 토해냈다.

어깨를 들썩이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던 이진한은 경직된 얼굴로 마검을 들어 올렸다.

흑색 검신 위로 옅은 균열이 나 있었다.

설마 지금까지의 충격으로 금이 간 것인가 가슴이 철렁였지만,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마기에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마검의 각성.

‘월드’에서는 마검을 쥔 적이 없기에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이들의 플레이 영상으로 몇 번 봐왔다.

지금의 그 모습은 각성 때와 똑같은 모습.

대현자의 눈이 순식간에 해석을 마치며 새로운 진명을 그 앞에 새겨넣었다.

“타올라라, 마화에 휩싸인 검이여.”

「심연으로부터 피어난 불꽃이여,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불태우라」

마검(魔劍) 그라나다(Granada)

수많은 역경과 싸움을 넘어온 끝에 진명이 개방되었다.

균열이 일어난 조각들이 파스스 부서져 내리며 새로이 조합된다. 매끄러운 광택이 감도는 흑색 검신 위로 뜻을 알 수 없는 황금색 각인디 새겨졌다.

곧 바포메트를 상징하는 새파란 마화가 그 위를 휘감으며 완전한 개화를 알렸다.

-…!

지옥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불꽃에 마르바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본래라면 중간계에 존재하는 것조차 용납받지 못할 종류였지만, 이진한이라는 계약자 때문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너 님. 성검도 반응하고 있어요.

“아스칼론이?”

그라나다가 각성을 끝냈을 때, 로네 역시 성검이 변화하고 있다며 말해왔다.

아직 성검은 마검에 비해 조금 모자른 상태.

하지만 그에게는 성검과 링크된 로네가 있었다.

-공명하라, 신성의 검이여.

「지상에 떨어진 빛이여, 그 광휘로 어둠을 비추라.」

파아앗!

성검의 순백색 위로 찬란한 적광이 비췄다.

진명이 개방된 마검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신성이 솟구치며 주위에 물든 어둠을 밀어냈다.

-으하하하! 이제껏 내가 봐왔던 용사 중 그 누구도 네놈 같은 녀석이 없었다. 참으로 재미있구나!

마르바스는 그 꼴이 그토록 우스울 수가 없었다.

용사란 존재가 여신과 악마 둘 모두의 선택을 받아 진명 개방까지 각성하는 꼴이라니.

쉬아아악!

한 번 놀아보자는 듯 그는 레반테인을 거칠게 휘두르며 허공으로 막대한 참격을 뿜어냈다.

“흡!”

이진한은 양 손에 쥔 두 검을 휘둘렀다.

왼손의 마검이 휘둘러지자 공간이 부르르 떨리며 그 궤적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불타 스러졌다.

오른손의 성검이 휘둘러졌을 땐 최후의 날을 심판하듯 지상으로부터 솟구친 빛이 자신에게 닿는 모든 것을 정화했다.

콰아악!

X자로 교차 된 빛과 어둠의 궤적이 레반테인의 참격과 충돌하여 상쇄되었다.

단순한 출력으로 마르바스의 힘과 맞먹을 정도라는 것의 반증.

하지만 이진한의 끝은 여기까지가 아니었다.

퉁.

성검과 마검이 충돌했다.

한껏 산뜻한 공명음이 차올랐지만, 그 여파는 이제껏 없었던 파괴력을 내며 온전히 마르바스를 향해 쇄도했다.

-윽!

성검과 마기의 반발을 이용한 공격.

마르바스는 레반테인을 당기며 방어했음에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참으로 재미있어.

두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적극적으로 이진한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국의 수도는 이미 원형을 잃고 폐허가 되어버린 지 오래.

싸움은 곧 절정에 달했고, 주위는 흘러나온 마기와 신성에 뒤덮여 극히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쿠르릉─.

시커멓게 물든 하늘 위로 뇌성이 울려 퍼졌다.

이진한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마르바스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위를 올려다보았다.

-…슬슬 인가.

“한눈팔 여유 따위는!”

여세를 몰아 그 목을 베어버리려던 이진한은 두 자루의 검을 힘껏 휘둘렀다.

하지만 마르바스에게 닿기 찰나, 둘 사이로 시퍼런 뇌광이 떨어져 내렸다.

“윽?!”

단순한 벼락이었더라면 그토록 당황하지 않았을 터.

문제는 그 뇌광을 타고 지상에 떨어진 남다른 존재감들 때문이었다.

-성대하게 벌리고 있었군.

이진한의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마르바스와 같은 마계의 왕들이었다.

7위 아몬, 16위 제파르, 29위 아스타로트, 32위 아스모데우스.

그 면면을 훑은 마르바스는 제 목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먼저 온 건 넷뿐인가.

-아무래도 인과율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말이지. 우리만으로도 게이트가 찢어질 뻔했다.

-솔직히 우리가 나설 이유가 있는가? 이미 혼자의 힘으로도 대륙 반절을 먹어 치운 것 같던데.

이진한은 거칠게 숨을 들썩이며 몸을 낮췄다.

성검과 마검의 각성을 이룬 것으로 겨우 마르바스로부터 우위를 잡았다.

하지만 아직 서로 모든 패를 꺼낸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마왕의 출현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악의 상황이었다.

‘각각 다른 마왕들이 마르바스에 준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면….’

가망이 없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일행이 후퇴할 시간이라도 벌어야 함이 옳았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이진한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을 찰나.

마르바스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을 벌였다.

촤아악!

그 입이 기다랗게 찢어지더니 가까이 있던 아몬의 머리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삽시간에 그것을 씹어 넘긴 그는 남은 몸뚱어리의 마기마저도 게걸스럽게 탐하고는 제 기운을 두 배 정도나 부풀렸다.

뒤늦게 마르바스의 배신을 깨달은 다른 마왕들은 두 눈을 부릅뜨며 고성을 질렀다.

-마르바스! 이게 대체!

-이 미친 작자가! 설마 이러려고 우리를 청한 것이냐!

하지만 마르바스는 그들에게 대답지 않고, 옅은 미소를 품은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슬슬 어떤가. 때가 무르익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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