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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203화 (203/210)

◈ 203.

“본대가 집결하기 시작했다는 연락입니다.”

사방으로 흩어진 연합군의 본대는 코랄 산맥을 중심으로 집결해 건곤일척의 전면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엄청난 사상자가 날 것이다. 어쩌면 이때까지 발생한 것보다 더 많은 숫자가 그 차디찬 전장 위에 몸을 누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도 출발한다.”

이진한을 비롯한 50인의 원정대는 가라앉은 분위기 가운데 조용한 출정식을 마쳤다.

땅을 때리는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두드리며 자욱한 먼지를 자아낸다. 하지만 곳곳에 펼쳐진 전장은 제일 작은 규모가 수천 단위다. 고작 50명의 이동 따위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

이진한은 말고삐를 쥔 채 빠른 속도로 들판을 질주하며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북부로 올라갈수록 뒤늦게 찾아온 겨울의 여파가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원정대 사이에선 새하얀 입김이 치솟고 급습한 추위가 옷 사이를 파고들었다.

‘여기에 온 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천 년 전의 기억을 되찾지 않은 이상, 자신이 이 세계에서의 삶을 시작한 건 근원의 마탑에서 깨어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만났을 때부터였다.

얼떨결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모험을 하고, 앞길을 가로막는 사건들을 해결도 하고, 졸지에는 용사가 되어 이제 대륙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게 되었다.

스스로 의도해서 이리 만든 상황이긴 했으나, 솔직히 부담감이 많이 느껴졌다.

사실 아직 세계의 소멸이니 뭐니 하는 건 너무나도 막연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제껏 함께 웃고 떠들던 이들이 죽는다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도망치지도 못하니 과거의 자신을 믿고 이 앞으로 쭉 펼쳐진 흐름을 따라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대체 천 년 전의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계획한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알 수 없었다.

생각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졌을 때, 슬쩍 말을 몰며 옆으로 다가온 이리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정령을 움직여 직접 말을 전달한 듯 바람에 묻히지 않은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이제 어떻게 될까 싶어서.”

“잘 될 거예요. 다른 분들도 그렇고 저도 베르너 님을 힘껏 도와드릴 테니까요.”

그녀는 물망초 빛깔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도 힘내라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

이진한은 잠시 미소를 지었다.

칙칙한 전장의 분위기와는 다른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진하율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에 잠시간 눈길이 이끌린 것이었다.

그 기특한 마음에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말을 타고 달리는 와중이라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흐트러졌던 정신을 다잡았다.

“곧 첫 번째 분기점입니다.”

연합군의 본대가 후퇴했다고 할지라도 곳곳에 산발적으로 남은 세력이 있었다.

원정대는 그들과 유기적으로 연락을 취했고, 이동이 끊기지 않게 말과 물자의 보급을 부탁했다.

“무운을 빕니다.”

반나절을 달려간 끝에 그들을 기다린 기사가 옅은 미소와 함께 오십 필의 말고삐를 건네주었다.

초췌한 얼굴과 더불어 전신에 남은 크고 작은 상처를 보아하니 이때까지 격전을 치러온 듯싶다. 기사와 함께 온 다른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다들 눈빛 속의 전의만은 잃지 않은 채 그들의 앞길을 축복해주었다.

예정된 분기점은 약 일곱 개.

그중 세 개를 더 지나 리베라 제국에 진입한 원정대는 다섯 번째 분기점에서 코랄 산맥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군의 피해가 벌써 20만이 넘어간답니다. 집계된 것만 해도 그 정도이니 실상은….”

분기점을 관리하고 있던 블랙 워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최소 수십 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더는 밀릴 수 없기 때문이라곤 하지만, 원초적인 이유는 자신들이 수월하게 적진을 파고들 수 있게 이목을 끌려 한 것 아닌가.

“….”

원정대 사이로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진한은 건네받은 말 위에 바로 올라타고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서두르지.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다면.”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약 이틀 뒤.

최대한 시간을 아껴가며 이동하기를 쉬지 않은 원정대는 마침내 오스칼 제국 수도에 도달했다.

“황궁 쪽에서 거대한 기척이 느껴지는 군요.”

“마르바스의 것이다. 뭘 하는진 모르겠지만, 단순한 꿍꿍이는 아니겠지.”

프레이의 말에 이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 군세가 진군해온 이후부터 가장 궁금했던 사실이 바로 마르바스의 거취였다.

마왕을 필두로 총력전을 펼쳐 왔다면 지금보다 더 손쉽게 대륙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진한 역시 그것을 기다리며 힘을 비축했지만, 마르바스는 끝끝내 군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예상한 대로 수도에도 적지 않은 마족이 남아있군요. 족히 수천은 될 것 같습니다.”

“이들 하나하나를 쓰러뜨리고 돌파하기엔 무리일 것 같은데….”

그 사이 적의 지원이 오거나 황궁 쪽에서 마르바스를 비롯한 고위 마족이 튀어나와 공격해온다면 오히려 이쪽이 위험질 수도 있었다.

“양동은 저희 휘몰아치는 불꽃의 기사단의 기사들이 해줄 겁니다. 그러려고 함께해온 것이니까요.”

휘몰아치는 불꽃의 기사단장 핸더슨이 가슴을 두드리며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그 자신은 용사와 함께 마왕성인 황궁으로 들어가야겠지만, 수하들은 남아서 그 앞을 가로막은 마족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능력을 지녔다.

“마도사들 역시 함께하겠소.”

“이쪽의 팔라딘과 추기경도 일부 합류하겠어요.”

“블랙 워커 일부도 지원하겠소이다.”

호베르투가 휘하 마도사들에게 눈짓하자 프레이와 베르하임 국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말이 양동이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끽해야 스무 명으로 수천 마족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부탁하지.”

“그러면, 용사님을 비롯한 원정대 여러분께 무운을.”

양동을 맡은 이들이 말머리를 돌려 그들의 반대편으로 떠나갔다.

최대한 멀리서 이목을 끌어모아 남은 원정대가 수월하게 수도를 돌파할 수 있게 하려 함이었다.

“….”

핸더슨은 잔뜩 힘을 준 손으로 말 고삐를 움켜쥐었다.

마지막이 될 수하들의 모습이다. 적어도 잊지 말고자 두 눈을 부릅뜨자, 옆에선 호베르투가 턱을 쓰다듬으며 허허 웃었다.

“저 치들도 자랑스러울 거네. 자네 같은 단장 밑에서 기사로 있을 수 있었으니.”

“…자신을 사지로 밀어 넣는데도 말입니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숲을 보도록 하세. 그렇게 따지면 지금 가장 부담되고 힘든 건 저분일 터이니.”

이진한은 조용히 장비를 점검했다.

곧 마왕과의 일전이 벌어진다. 서로 모든 것을 쏟아붓는 처음이자 마지막 싸움.

물러날 곳도 없었고, 물러날 생각도 없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다음도 어떻게 되지 않겠냐는 생각은 이제 없다. 죽더라도 이긴다. 그러기 위해서 그 수라장을 넘으며 강해지지 않았는가.

콰아아앙!

저 멀리서 커다란 폭발이 터졌다.

잔잔하던 수도의 흐름을 뒤바꾸는 것이었고, 거리를 노닐던 마족들은 그 소란에 이끌려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진입한다.”

가볍게 손을 휘둘러 성문을 박살 낸 이진한은 원정대와 함께 도시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소란이 일어나도 움직이지 않은 마족들이 더러 있었다. 그것들은 원정대를 보자마자 이빨을 날카롭게 세우며 들이닥쳐 왔다.

촤아악!

물론 이진한에게도 닿지 못한 채 그 주위를 지키는 원정대원에게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소멸했을 뿐이었다.

“용사님께 털끝 하나 닿게 하지 마라!”

제국의 수도인 만큼 도시의 규모는 상당했다.

양동으로 반대쪽에서 시선을 끌었다고 했지만, 남은 녀석들도 가볍게 일 천이 넘어가는 숫자.

슬슬 둘러싸이기 시작하는 형국에 원정대원들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스릉─.

더 시간이 지체되면 위험해진다.

이진한은 빠른 판단을 내리고는 성검을 뽑아 자신의 앞을 향해 휘둘렀다.

파아아앗!

눈부신 신성의 궤적이 터져 나오며 그 앞길을 가로막은 마족을 쓸어버렸다.

일순간 수백에 달하는 덩어리들이 소멸 되 적잖은 공백이 생긴다. 원정대는 그 틈을 타 앞으로 달려나갔고, 마침내 가장 큰 마기가 느껴지는 황궁에 도달했다.

“일단 인사부터 해야겠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했으니 더는 여력을 아낄 이유가 없었다.

호베르투는 자신의 마력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리며 하늘 위로 손을 뻗었다.

쿠구구궁!

초월 마법 진홍의 보옥.

새빨간 태양이 하늘에 떠올라 황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적들에게 큰 피해를 주진 못해도 그 거점인 황궁은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그렇게 여겼건만, 황궁의 하늘 위로 새카만 장막이 펼쳐졌다.

파지지직!

진홍의 보옥과 장막이 충돌하자 검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얼마간 그렇게 서로 힘 싸움을 하는가 싶더니 종래에는 둘 다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황궁의 성문이 돌연 양쪽으로 벌어지며 열리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내부에 이진한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들었다.

“밖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고 들어오라 이건가.”

적을 자신의 안방으로 불러들이다니 참으로 대단한 자신감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할까요?”

엘레오노라가 자신의 완드를 꽉 움켜쥐며 물었다.

미르엘, 일레이나, 이리아, 프레이, 핸더슨, 그리고 베르하임 국왕 이외에 남은 원정대가 대답을 기다렸다.

“….”

성검을 내린 이진한은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싸움. 진하율이 말한 자신의 기억과 잃어버린 모든 걸 되찾을 새도 끝나버릴 지도 몰랐다.

“가자.”

검은 망토가 펄럭인다. 천 년 전, 고대 신을 쓰러뜨리기 위한 원정대 역시 이처럼 비장한 분위기가 흘렀을까.

그들 모두가 문턱을 넘었을 찰나 성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마치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는 것 같았지만,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마왕을 쓰러뜨리기 전까지 홀로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똑, 똑….

황궁 역시 온전하지 못했는지 이곳저곳이 파괴되어 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거친 싸움의 흔적이 보인다. 그 익숙한 풍경에 새겨진 이질적인 흔적에 엘레오노라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과거를 되새겼다.

이윽고 그들은 굳게 닫힌 대전에 도달했다.

곳곳이 파괴된 궁의 풍경과는 달리 그 새빨간 문에는 흠집 하나 조차 없다.

“….”

다른 점이라면 문틈과 이음새 사이에서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농밀한 마기가 풍겨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정대 사이로 침묵이 감돌았다.

이 뒤에 자신들의 숙적인 마왕이 있을 것은 분명한바. 곧 이진한이 앞으로 나가 천천히 그 문을 밀었다.

끼이익.

소름 끼칠 정도로 높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천천히 그 빨간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부서진 대전의 천장 위로 시퍼런 달빛이 스며 들어 내부를 비춘다. 분명 황궁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태양빛이 짱짱한 낮이었거늘, 언제 밤이 되었는가.

그러한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모두의 시선이 대전의 가장 높은 자리, 권좌에 앉아 있는 한 존재에 닿았다.

-이곳까지 오는 것도 참으로 오래 걸렸구나.

마치 제국의 황제처럼 화려한 망토와 의복을 몸에 두르고 있는 마르바스는 그곳에 앉아 다리를 꼰 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마르바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기세였다.

다른 원정대원들이 질식할 것만 같은 얼굴로 제자리에 얼어붙은 가운데 이진한은 홀로 발걸음을 옮겨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붉은 융단 위에 서서 서늘한 빛을 발하는 마르바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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