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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202화 (202/210)

◈ 202.

-가소롭다!

알로켄은 자신의 창을 거칠게 휘둘렀다.

여의봉이라도 되는 것일까. 순식간에 크기를 키운 그것은 떨어져 내리던 낙뢰를 받아내어 땅 밑으로 흘려버렸다.

-오너라, 나의 군세여!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인지 군세를 호출했다.

하늘을 뒤덮으며 수많은 마족 군세.

알로켄을 따르는 휘하인지 끝이 없는 물결이 이곳을 향해 닥쳐왔다.

쉬아아악─!

마창의 끝이 다시금 날카롭게 허공을 꿰뚫었다.

이진한이 가볍게 피하며 뒤로 물러서자 알로켄은 겨우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태세를 가다듬었다.

-진짜 싸움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싸움이라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군. 네놈들은 절규가 섞인 단말마밖에 내뱉지 못할 테니 말이야.

광택이 흐르는 흑색 갑주 위로 짙은 마기가 서렸다.

알로켄은 이전까지 입은 상처를 단번에 회복해버린 듯 다시금 멀쩡해진 모습으로 자신의 기세를 떨쳤다.

“…그렇다면.”

이진한은 용아청성창을 놓은 채 마검을 뽑아 쥐었다.

알로켄의 것에 뒤지지 않은 폭발적인 마기가 솟구치며 전장에 서린 기운을 게걸스럽게 탐하더니 이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초월스킬 백야극광

검은 궤적이 천지를 집어삼켰다.

바포메트의 힘뿐만 아니라 이곳에 서린 마기를 탐하면서 몸집을 부풀린 덕인지 마검의 송곳니는 순식간에 가늠할 수 없는 피해를 내며 마계 군세에 들이닥쳤다.

-근본도 없는 악마 따위!

“근본도 없다니. 마르바스 같은 마왕 나부랭이보다 더 좋은 악마인데.”

흑창과 마검이 쉴 새 없이 맞부딪쳤다.

둘이 허공에서 격한 싸움을 벌이는 사이 백야극광을 딛고 선 마계 군세는 기어코 성벽에 도달했고, 진짜 전쟁이랄 수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기사들 앞으로!”

“막아라! 성벽에 도달하지 못하게!”

“여신이여, 미약한 우리를 도우소서!”

연합군 역시 아껴 두었던 전력을 선보이며 마계 군세의 공격을 저지했다.

하지만 그 엄청난 공세에 성벽 전체가 출렁이며 큰 충격을 받았고, 이전까지의 전투로 인해 손상되었던 구역 일부는 한계를 맞이했는지 균열이 일며 무너져 내렸다.

“…쯧.”

이진한은 혀를 찼다.

급조한 전선으로 닷새를 버틴 것도 잘한 일이었지만, 이틀 정도만 더 시간을 끌 수 있었으면 좋았을 터였다.

-저 성벽을 보아라. 처참히 무너진 잔해는 네놈들의 운명을 가를 시초가 될 것…….

“아 더럽게 시끄럽네, 진짜.”

쿵.

일순간 이진한의 마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올랐다.

악마화도, 성검과의 혼용도, 다른 초월스킬도 그 이외의 여러 패를 쓰지 않은 채 싸움을 질질 끌었던 건 전장의 흐름 자체를 길게 끌어가기 위해서였다.

이곳 제국을 둘러싼 포위망은 전초 기지와도 같다. 저 뒤쪽으로 있을 수많은 왕국의 시민들을 대피할 시간과 새로이 구축하고 있을 몇 겹의 그랜드 라인의 말미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마음 같아선 혼자라도 이곳에서 저 군세를 막아내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라 해도 수백만에 달하는 숫자를 혼자 틀어막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성벽 한쪽이 무너졌으니 곧 물에 젖은 모래사장처럼 다른 곳들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입을 터.

이미 이곳에서 전장이 갖는 의미가 끝났다는 걸 느낀 이진한은 급진적으로 허공을 박차며 알로켄에게로 쇄도했다.

-어림 없…!

흑창을 휘둘러 그 공격을 막아내고 자신의 전력을 터트려 역공에 나서려던 알로켄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콰직!

수없이 늘어나고 줄어들기를 반복했던 그의 애병이 불길한 소리와 함께 창대째로 짓이겨졌다.

황급히 몸을 뒤로 내빼며 그 여파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이진한이 꽉 쥔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더 빨랐다.

“일단 한 방.”

콰아앙!

알로켄의 몸이 다시금 지상에 내리꽂혔다.

아까와 같은 모양새였지만, 다른 점이라면 더 많은 숫자의 마족이 휘말리고 이전보다 몇 배는 큰 크레이터가 새로 생겨났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버티면 인정해주마.”

-…!

깊숙한 크레이터의 가운데.

마검에서 피어오른 시퍼런 마화를 본 알로켄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질렸다.

***

성벽은 채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엿새하고도 한나절만의 일. 그래도 연합군은 미리 계획했던 대로 후퇴 절차를 밟았고, 최초 병력의 5%의 손실만을 남긴 채 최소 피해로 전장을 이탈ㅍ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버티고 버티는 전쟁의 시작이었다.

제국과 가까운 국가들의 피난은 이미 끝났다.

도시는 거점이 되었고, 각지에 남은 자원은 전쟁 물자로 차출되었다.

수많은 곳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그럴 때마다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적들의 기세가 예상치를 한참이나 웃돕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가망이 없습니다.”

연합군 총사령관 라즈베리 대장군은 엄숙한 태도로 선고했다.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쟁으로 인해 모이기 힘들었던 의회가 가까스로 성립된 와중 나온 첫마디였다.

“….”

다들 전쟁 초기와는 달리 한껏 피폐해진 모습이다. 고작 보름 만에 이 꼴이라 비웃을 수 있겠지만, 적은 인간이 아니라 밤낮 가리지 않은 채 진군해오는 괴물들이었다.

기존 전쟁 전술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고, 굳게 믿고 있던 상식이 배신당하는 일도 허다했다.

탁.

라즈베리 대장군은 두 눈가를 꾹꾹 누르며 지휘봉으로 벽에 걸린 대륙 지도를 가리켰다.

“처음 계획을 구상할 때 적들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2선을 돌파당하는 건 한 달은 지나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3선을 돌파당했고, 4선도 간당간당하지요.”

4선의 한 구역을 담당하고 있는 장군이 골머리를 앓는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이제 막 5선이 구축되었고, 6선의 완성도는 넉넉히 잡아줘도 50% 채 되지 않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른다면 파멸로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6선이 돌파당한다면 작전이고 뭐고 끝이었다.

서대륙은 금세 마경을 점령당할 터이고, 동대륙은 더는 저들을 막을 저지선을 구축하지 못해 파죽지세로 밀려 나갈 것이 분명했다.

“이쪽의 정보가 시시각각으로 새어 나가는 것도 한몫하고 있소. 용사님께서 전장을 맡아주신다고 해도, 고위 마족을 비롯한 적의 주 전력은 교묘히 그곳을 피해 나가니 말이야.”

“흠.”

이진한은 침음성을 흘렸다.

실제로 2선이 무너진 순간 상황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느낀 그는 적극적으로 전장에 개입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최전선에서 활약한다고 할지라도 함께 싸우는 이들이 버티지 못한 채 나가떨어진다면 그라도 답이 없었다.

제대로 맞붙고 싶어도 저들이 자신을 피해가며 싸워주지 않으니,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간의 준비가 덧없어지는군. 뭐 때문에 그리 아등바등하며 했는지.”

“덧없다니. 그 덕분에 지금 상황에서도 이 정도로 틀어막고 있는 걸세. 당장 이렇게 전선이 넓게 퍼진 가운데 수백만에 달하는 마물들과 맞섰다고 생각해보세나.”

“큼.”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1차 포위망에서 제국 시민들로 이루어진 수백 만의 마물 군세를 막아내지 못했더라면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심각했으리라.

“제가 판단하기에 여기가 마지노선입니다. 이 뒤로 더 밀린다면 분위기를 바꾸려 해도 이미 늦습니다.”

“대장군의 생각은 어떠시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대대적인 반격을 통해 저들의 본대를 화력으로 밀어버리던가, 아니면.”

라즈베리 대장군은 입술을 씹으며 슬쩍 이진한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적의 근원을 노리는 겁니다.”

“적의 근원?”

“…마왕이로군.”

사람들의 시선이 이진한에게로 몰렸다.

연합군에도 강자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많았다. 더불어 한 손을 보태기 위해 이름 없는 실력자들이 대거 등장했고, 각각 전장에서 이름을 날리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지옥 대공 알로켄 같은 경우에는 그 말고 대적자 없었기에 마왕이란 이름 앞에서도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적의 본대를 물고 늘어짐과 동시에 별동대를 보내 그 본진을 직접 타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승산이 있는가?”

“마계 군세의 중심은 이미 본진인 오스칼 제국의 수도로부터 한참이나 남하했습니다. 대단위 텔레포트 게이트 같은 걸 사용하지 않는 이상 쉬이 돌아가긴 어렵겠지요.”

“더군다나 우리가 그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면 말일세.”

전면전으로 붙는 만큼 큰 피해를 보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수밖에 없었다.

저지선을 돌파당한다면 이런 작전도 펼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릴 터니.

“….”

잠시간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이진한은 짤막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지금부터 반나절. 마왕을 치러 갈 원정대를 모집하겠다.”

어찌 되었든 결착을 내야 할 문제였다.

진하율이 말했던 자신의 본래 힘과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오스칼 제국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착을 낸다.’

의회의 회의 직후 마왕을 쓰러뜨릴 용사 파티의 원정대가 모집되었다.

물론 극비리에 진행된 일로, 최소 초월지경에 근접한 강자들만이 그 원정대에 참가 신청이라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약 반나절 후, 이진한은 수많은 신청자 가운데 직접 옥석을 가려내며 함께 마왕을 공략할 원정대를 선출했다.

우선 원래 자신의 파티였던 일레이나, 엘레오노라, 미르엘, 유리아.

신성 왕국에선 프레이, 그리고 유리아 같이 팔라딘으로 이루어진 성기사단, 그리고 추기경 집단.

이터널 학파장인 호베르투가 이끄는 정예 마도사들도 합류했고, 휘몰아치는 불꽃의 기사단장인 핸더슨을 필두로 한 초월지경의 강자들 역시 따라붙었다.

그리고.

“제가 빠지면 섭섭하지요.”

베르하임 국왕은 씩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검은 현자의 완벽한 하위호환으로 초월지경에 오른 그라면 큰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에 대륙 각지에서 활동하던 악명 높은 블랙 워커까지 모조리 쓸어왔으니 고기 방패는 충분하다며 가슴을 두드렸다.

“죽으라고 하시면 죽겠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멓게 무장한 블랙 워커들은 베르하임 국왕과 같이 가슴을 두드리며 충성을 맹세했다.

천 년 전의 영웅이 뭐 그리 좋은지 모르겠지만, 낭만이니 뭐니 하는 말에 니들 좋을 대로 하라며 이진한은 고개를 끄덕여줬을 뿐이었다.

“베르너 님.”

그렇게 원정대가 마지막으로 정비를 하며 제국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 도중,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크루시아와 나탈리가 그를 찾아왔다.

나탈리는 기력을 회복했는지 멀쩡해진 안색으로 제일 먼저 아쉬운 말을 전했다.

“드래곤은 이번 전쟁에 관여하지 않을 거예요. 여신께서 그리 명하셨거든요.”

“솔직히 저도 무슨 생각인지 이해되질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가. 아쉽게 되었네.”

이진한은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천 년 전에 했던 것처럼 함께 공동 전선을 펼친다면 훨씬 수월하게 저들을 격퇴할 수 있겠건만, 빌어먹을 여신은 무슨 생각인지 드래곤의 움직임을 막은 듯했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 너희 복장은 싸울 생각이 만반인 것 같은데?”

“드래곤은 나서지 말라고 하셨지만, 휘말리면 맞고만 있으라곤 하지 않으셨어요.”

“저희는 유희 중인 신분으로 참여하는 겁니다. 설마 그것까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다가 목숨이 위험해지면 본체로 돌아가서 싸우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미련한 자식들.”

크루시아와 나탈리는 이해되지 않는 명령에 따르기보단, 그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제 가슴팍에 들어 있는 수정구를 매만졌다.

그 수정구는 북쪽 숲의 세 자매와 연결된 것이었다.

이진한은 그녀들을 통해 각지에서 다른 봉인을 지키고 있는 가디언들과의 연락 체계를 만들었고, 신호 한 번이면 고대 신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끝내 놓았다.

‘여차하면.’

마계와의 전쟁이 일어나면 다시 찾아오겠다는 고대 신의 추종자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왜인지 마왕을 향해 가면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직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자신은 이 선택의 기로 가운데 과연 무엇을 바래야 할까.

그렇게 열두 시간 뒤.

결전의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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