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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201화 (201/210)

◈ 201.

마물은 끝없이 밀려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을까. 처음엔 그것에 분개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들 무뎌져 갔다.

푹! 콰직!

마치 바닷일을 하는 어부처럼 자연스럽게 창과 칼을 내밀어 적을 분쇄했다.

쌓인 시신이 높다란 성벽을 위협할 때가 되면 잔해에 불을 붙여 마물들이 타고 오르지 못하도록 불을 놓았다.

어찌나 탄내가 진동하던지 갑옷에는 마물의 악취보다 시체 타는 냄새가 더 짙게 밸 정도였다.

그리고 그 지루하디 지루하던 흐름은 닷새째가 되던 날 끝이 났다.

쐐애액─!

검게 물든 지평선 끝에서부터 무언가가 맹렬한 기세로 쏘아졌다.

제일 먼저 눈치챈 것은 기감에 민감한 기사들, 그중에서도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 움직이며 성벽을 노리는 그것을 막아내려 했다.

“다들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하지만 그런 기사들을 만류하는 이가 있었다.

근래 초월지경에 올라 휘몰아치는 불꽃 기사단의 단장으로 승격한 헨더슨이 수하들을 물리고는 직접 검을 뽑아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전장의 하늘을 꿰뚫으며 날아온 것은 한 자루의 기다란 창이었다.

성벽 앞쪽에 서린 몇 개의 배리어를 단숨에 부순 그것은 이내 자신을 막아선 핸더슨과 충돌했다.

콰아아앙!

일순간 성벽이 들썩거릴 정도의 폭음이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서려 있음은 알고 있지만, 설마 이 정도라니.

핸더슨은 핏발선 두 눈을 부릅뜨며 어떻게든 창의 기세를 떨어뜨리고자 이를 악물었다.

툭.

“…?”

하지만 그보다 먼저 창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사그라들며 힘의 방향이 반전되었다.

뒤쪽으로 쑥 물러난 창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주인의 손안으로 감겨들었다.

“벌레들이 많구나.”

허공을 딛고 선 존재가 오만한 눈으로 발아래를 괄시했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머리 위에 솟은 두 뿔과 등 뒤에서 펄럭이고 있는 한 쌍의 검은 날개는 그가 마족이라는 걸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

마치 벌레가 기어 다니는 꼴을 보듯 성벽 위를 훑던 마족은 왼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딱였다.

우웅─.

새빨간 파멸의 마기가 그 끝에 서렸다.

찰나 공간이 일그러질 때까지 응집되는가 싶더니 그 누구의 인식보다 더 빠른 속도로 허공을 꿰뚫으며 쏘아졌다.

“누구 마음대로!”

망루 위에 나선 프레이가 두 손을 모았다.

동시에 그녀의 등 뒤에도 두 쌍의 백익이 펼쳐지며 신성한 가호를 발한다. 마치 지상 위에 천사가 강림한 듯한 모습에 마족은 코웃음을 쳤다.

“성왕인가. 이 지옥 대공 앞에 나선 것을 후회하게 해주리라.”

지옥 대공 알로켄.

마르바스 휘하 마계 군세를 이끄는 대장군으로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자신들의 힘을 대륙에 똑똑히 각인시키기 위하여 손수 전선의 앞으로 나아왔다.

츠즈즈즈─!

프레이가 발한 신성의 가호가 파멸의 마기를 상쇄시킨다. 하지만 서로 간에 막대한 격차가 있는지 종래에는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리며 손끝을 잘게 떨었다.

“가야 할 길이 멀다. 놀아주는 것은 여기까지니 그만 죽어라.”

척.

흑색 창끝이 프레이를 향해 겨눠졌다.

성벽의 난간을 박차고 떠 오른 핸더슨이 매서운 기세로 알로켄을 덮쳤지만, 그는 가볍게 왼손을 내저은 것으로 치워버리고는 창을 내질렀다.

쉬아아악!

검은 궤적이 무한히 늘어났다.

창이 늘어난 건지 마기가 솟구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프레이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부탁드려요.”

하지만 그녀는 알로켄의 공격을 피하지 않은 채 그렇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턱.

창끝이 미간을 꿰뚫기 전,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그것을 잡아 세웠다.

창대가 손안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며 저항했지만, 핸더슨때와는 달리 이진한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드디어 기어 나왔나.”

조금 전까지 자다 나왔는지 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품을 내뱉었다.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도달하던 차였다.

이대로 저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직접 이 마물 군세를 넘어 지평선을 뒤질 생각이었던 찰나에 이렇게 손수 나와주다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검은 머리카락, 마르바스 님께서 말씀하신 검은 현자인가.”

“어. 지금은 용사도 겸하고 있다.”

“고작 천년의 세월을 가지고 우리와 맞먹으려 드느냐.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창이 가루가 되어 흩어져 내렸다.

단숨에 창을 회수한 알로켄은 다섯 손가락을 활짝 피며 가볍게 허공을 두드렸다.

“알량한 용사의 이름 따위. 네놈의 무력함에 좌절하며 짓뭉개져라.”

이미 그는 안중에도 없다는 언사였다.

동시에 알로켄의 앞에서 맹렬한 마기가 휘몰아치며 수백 갈래로 나뉘어 성벽 위로 떨어져 내렸다.

“컥!”

“피해! 뒤로 물러나!”

“성벽 위에서 이탈해라!”

그 하나하나에 가늠할 수 없는 기운이 서려 있다.

마법사들은 배리어를 펼치려 했지만, 그보다 더 상위 경지인 마도사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모양새.

초월지경에 오른 대마도사들은 알로켄이라는 마족의 강대함에 아연실색한 상태였다.

‘궤를 달리하는 강함.’

진짜 마족과 처음 마주하는 원초적인 공포.

마기의 폭격이 성벽 위에 떨어지기 직전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쓸려 눈을 감았다.

파아앗!

그런 가운데 「삼라만상」이 활성화했다.

다각형을 이룬 술식이 형태를 이루며 구성되었고, 성벽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크기의 방패를 형성해냈다.

현상개변 · 「아이기스」

모든 것을 막아낸다는 신화의 재림이었다.

파멸의 빛이 자아내는 폭격이 그 위에 부닥치자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파를 내뿜었다.

하지만 성벽 위는 단 하나의 피해도 없이 견뎌내었고, 혼비백산해 있던 병사들은 자신들 가운데 우뚝 서 있던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와.”

“와아아아아아!”

“용사님이 함께 하신다!”

술렁였던 사기가 단숨에 치솟아 올랐다.

성벽 위를 휘감은 황금빛의 방패는 그처럼 휘황찬란한 것이었다.

툭.

이진한은 가볍게 성 난간을 박차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곧 알로켄이 있는 궤도와 같은 자리에 서고는 나란히 시선을 맞추며 아스칼론을 뽑아 들었다.

“지옥대공이라고?”

번쩍─!

일순간 허공으로 섬광이 터졌다.

밑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이들에게는 단순히 그렇게 느껴졌겠지만, 알로켄은 자신의 손등에 난 기다란 상처를 바라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찰나라 부를 수 있을 때 벌어진 초고속의 경합. 그 가운데서 손해를 본 건 자신이었다.

“…과연. 이곳으로 날 보내신 이유가 있는가.”

알로켄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모르겠는데. 마르바스 본인이 직접 나올 줄 알았거든. 하다못해 검성이라도 말이야. 겁이라도 먹었나보네.”

말은 번드르르했던 것과 달리 직접 모습을 비추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가 있을까.

이진한이 마르바스를 거론하며 이죽거리자 알로켄은 두 눈을 사납게 치떴다.

“우습기 짝이 없구나. 용사라는 이름 때문에 정말로 네가 대적자라도 된듯싶더냐. 네놈은 당장 마계 최하위 서열의 마왕조차 대적하지 못한다. 여신이 이 세계에 개입하기 위한 장치 주제에 건방지게…!”

“어디 그런지 보자고.”

이진한은 더 말을 보태는 것 없이 아스칼론을 휘둘렀다.

알로켄 역시 그를 죽일 기세로 닥쳐왔고, 곧 허공에서 미칠 듯한 기세의 싸움이 이어졌다.

파가가각─!

정작 피해를 본 건 전장 위에 선 마물들이었다.

지반이 가라앉고 짓뭉개지고 신성과 마기의 격돌에 터져나간 여파에 휩쓸려 가히 수만은 될 법한 손실이 발생했다.

“….”

그런 거친 싸움 가운데 이진한은 마물의 끄트머리, 저 지평선 너머에서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던 마계 군세의 본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들이 전부 스러진 뒤 진짜 전쟁이 시작될 터.

그래도 닷새면 예상보다 더 오래 버텼다고 할 수 있었다.

‘이틀 정도만 더 시간을 끌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애초에 자신들은 이곳에서 사생결단할 생각이 없었다.

이 그랜드 라인은 말 그대로 전초기지.

전쟁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마계 군세를 묶어둘 포승줄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알로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자신을 앞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걸 알아차린 것이었다.

쐐애애액!

검은 창끝이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운 파공성을 흘리며 그의 목덜미를 날카롭게 찔러갔다.

이진한은 한쪽 눈을 찡그리고는 귀찮다는 듯 성검을 다잡았다.

“성질이 급하네.”

파아앗!

아스칼론의 출력이 확연하게 올라갔다.

몇 배는 될 법한 신성이 마치 기둥처럼 치솟았고, 순식간에 알로켄의 몸을 뒤덮으며 그 어깨를 거칠게 물어뜯었다.

“…!”

순식간에 팔 한 짝을 잃은 알로켄이 경직된 낯빛으로 물러난다. 이진한은 내친김에 전장을 까마득하게 매운 마물 군세를 조금이나마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콰아아앙!

무식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지상이 짓뭉개지며 그 아래 깔린 것들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척.

하늘 높이 뻗은 손가락이 수식을 그리자 초월 마법의 발동을 준비한다. 이제는 대마도사의 너머 그 경지를 바라보는 가운데 조금의 딜레이도 없이 하늘 위로 막대한 여파가 발생했다.

쿠우우웅─!

태양이 떨어져 내림과 더불어 자색 뇌전 수십 줄기가 지상을 강타했다.

지상은 울렁거리며 시뻘건 용암을 분출했고, 그 반대편에서는 녹일 수 없는 냉기가 주위에 있는 것을 모조리 얼려버렸다.

“시원하네.”

가볍게 손을 털은 이진한은 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알로켄은 마기가 풀풀 피어오르는 상처를 부여잡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만 막으면 끝날 줄 아느냐. 전진하는 군세뿐만 아니라 네놈들의 등 뒤에서도 우리를 추종하는 이들이 일어날 것이다.”

“개싸움이 될 건 이미 각오한 바였지. 이쪽이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만 보냈을 거라고 생각한 거면 실망스럽네.”

“하지만, 앞으로의 싸움에서 네가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다. 네놈은 이곳을 넘어서지 못할 터이니.”

파아앗!

휘몰아치던 마기가 알로켄을 감쌌다.

각성이라도 하는가 싶더니, 이내 몸집을 부풀리며 새로운 형태로 모습을 뒤바꾸기 시작했다.

“…본체로 돌아가는 건가.”

메피스토 때와 같았다.

그때의 자신은 바포메트에게 힘을 빌릴 뿐인 무기력한 존재였지만, 지금은 악마에게 갈구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 강함을 손에 거머쥐었다.

콰아아앙!

아스칼론이 힘껏 휘둘러지며 알로켄의 머리를 후려쳤다.

동시에 녀석의 몸이 땅 깊숙이 처박히며 전장 위로 자욱한 먼지를 자아낸다. 그것도 모자라 온갖 마법과 화살, 그리고 스킬을 꽂아 넣은 뒤에야 공격을 멈췄다.

“어이, 살아있어?”

제법 진심을 담아 퍼부은 공격이었다.

이걸 견딘다면 그래도 쭉정이는 아니라고 인정해줄 심산으로 슬쩍 크레이터 안쪽을 향해 묻자, 시커먼 궤적 하나가 어둠을 꿰뚫으며 치솟아 올랐다.

핏-!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비틀어 그 공격을 피해냈다.

깊은 크레이터 가운데 이전보다 몸집이 다섯 배는 더 커진 듯한 알로켄이 전신에 흑색 갑주를 입은 채 손에 쥔 창을 내질러온 것이었다.

-언제까지 그리 기고만장한 태도로 날뛸 수 있을지 보자꾸나.

“…뭔가 단단히 착각한 것 같은데.”

툭.

알로켄과 마찬가지로 그의 손에 한 자루의 푸른 창이 쥐어졌다.

우르릉─.

시커멓게 물든 하늘 위로 심상치 않은 뇌성이 울려 퍼진다. 이진한은 높게 들어 올린 용아청성창을 가볍게 휘저으며 울부짖는 뇌성을 지상에 겨눴다.

용아청성창 전용 스킬 만운천뢰

“왜 자꾸 자기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자색 뇌전이 지상 한가운데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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