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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200화 (200/210)

◈ 200.

전장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비유나 감상 따위가 아니다. 널따랗게 퍼져나간 짙은 어둠은 곧 하늘까지 뒤덮으며 주위를 시커멓게 물들였다.

“프레이.”

“네.”

이진한의 부름에 프레이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대륙은 긴 역사 가운데 수 없이 마계와 전쟁을 벌여왔다.

특히 신성 왕국에는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었고, 마계의 침공 방식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지도 후대를 위해 남겨두었다.

척.

성벽 곳곳에 있던 신성 왕국의 사제들이 두 손 가운데로 성물을 꽉 쥐었다.

하나둘 치솟은 빛무리가 허공에서 맞물리며 술식을 이루기 시작한다. 마계 군세에 대항하기 위한 신성 왕국의 대단위 신성 마법이 펼쳐진 것이었다.

츠즈즈즈─!

성호가 새겨진 장막이 닥쳐오던 어둠을 가로막았다.

마치 거센 파도를 부서뜨리는 방파제처럼 굳건히 자리를 지킨 빛의 장막은 하늘을 침범하던 사악을 물리치며 성벽 위에 선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와아아아!

거룩한 기적에 너 나 할 것 없이 환호를 지르는 이들이 각자 무기를 쥐어 올렸다.

군세를 움직이기에 가장 적절한 순간은 사기가 최고조로 치솟아 오른 바로 지금.

망루 앞으로 나선 한 인영이 좌중을 바라보며 우렁찬 외침을 토해내었다.

“총원 전투 준비-!”

전선의 총사령관을 맡은 리베라 제국의 라즈베리 대장군이었다.

사실 총사령관의 직함은 이진한에게 제일 처음 먼저 왔었다.

용사라는 상징성과 더불어 일신의 무력이나 마계와의 교전 경험까지 생각한다면 그보다 적임자가 없었다.

‘말도 안 되지.’

하지만 이진한은 단호히 거절했다.

혼자 싸우면서 날뛰는 거라면 몰라도 대군을 이끌며 작전을 펼치는 건 자신이 지닌 능력의 범주에서 한참은 벗어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 대체자로 리베라 제국에서 가장 명장이라고 알려진 라즈베리 대장군이 총사령관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어어.

전장 대부분을 뒤덮은 건 하급 마물이었다.

그 원초는 제국의 시민들로, 이미 이성을 잃은 채 부패한 몸을 이끌며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발걸음을 나아올 뿐이었다.

“….”

치솟아 올랐던 사기는 곧 들끓는 분노가 되었다.

저들 역시 얼마 전까지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기에 오염되거나 마족에게 농락당한 끝에 마물이 되어 죽은 것만도 못한 신세가 되었다.

성벽 위의 곳곳에서는 심약한 자들이 내뱉는 헛구역질이나, 이빨을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러나지 마라! 저들의 안식을 위해서라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검을 휘둘러라!”

중간중간 위치한 기사들이 그런 병사들을 다독이며 전의를 불러일으켰다.

곧 마물들이 지척까지 닥쳐왔다. 움직이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몇십만 아니 몇백만이라고 추정한 게 과장이 아닐 정도로 막대한 규모였다.

척!

라즈베리 대장군이 손을 들어 신호하자 성벽 위에 있던 궁병들이 일제히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성벽 위로 긴장감이 가득 찬 침묵이 감돌았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저마다 기도를 올리거나, 각오를 다잡으려 두 눈을 부릅뜨는 이도 있다.

망루 위에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던 라즈베리 대장군은 마침내 개전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해 힘껏 손을 휘둘렀다.

쏴사사사─!

일시에 몇천 발에 달하는 화살이 허공으로 솟아올라 전장 위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지상에도 대단위 신성 마법이 펼쳐지며 화살에 맞은 마물들에게 추가 적으로 타격을 꽂아 넣었다.

-그, 어어.

마물 군세의 전열이 파죽지세로 무너졌다.

하지만 후미에 있던 녀석들은 제 동료의 시신을 밟으며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왔고, 숱한 방해에도 성벽에 도달해버리고 말았다.

“한 놈도 올라오게 두지 마!”

“베기보단 짓이긴다는 느낌으로 싸워라! 녀석들의 몸은 부패해있어서 약해!”

성벽 위에 선 병사들이 악을 쓰며 창과 둔기를 휘둘렀다.

마물들의 머리를 깨부수고 짓이기며 떨어뜨렸고 준비한 함정을 발동시켜 무수한 사상자를 내었다.

“…뭐야, 별거 없잖아.”

“호들갑 떨더니 할 만한데?”

일선에서 싸우던 병사들은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숫자야 많았지만, 적당히 체력을 조절해가면서 싸워도 될 정도였다.

기껏해야 팔을 휘두르거나 다 삭은 이빨로 깨물어올 정도였으니 터무니없는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그리 위협될 일도 없었다.

“방심하지 마라! 상대의 본대는 아직 나서지도 않았다!”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고 물자를 아껴. 장기전이 될 것이니.”

마물이나 마족과의 전투 경험이 있는 이들이나 상대적으로 지식이 풍부한 기사들이 곳곳에서 외쳤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선 위로 비슷한 생각들이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했다.

쿵.

그때 전장 위로 이전과는 사뭇 다른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하급 마물들이 뭉쳐 만들어진 거대한 살덩이 형태의 키메라 옴(Ohm)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숫자는 대략 십여 기.

어지간한 공성 무기보다 커다란 몸집을 지닌 녀석들이 땅을 박차며 달려오자 늘어져 있던 전장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읏!”

“모두 성벽에서 물러나!”

병사들은 짐짓 당황하는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물론 당황한 건 병사일 뿐, 라즈베리 대장군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수하들을 통해 즉각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 앞으로.”

툭.

열댓 명의 기사가 성벽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기사라고 해서 다 같은 기사가 아니다. 어중간한 이들은 감히 얼굴도 비추질 못할 수준으로, 그 한 명 한 명이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 각지에서 이름을 날리는 강자들이었다.

파아앗!

눈부신 오러 블레이드가 부패한 살덩이를 시원하게 베어 갈랐다.

혹여나 그 가운데 무슨 수작을 부렸는가 싶어 다들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다행히도 쓰러진 옴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펄럭!

그때 적색 깃발이 첨탑 위로 올라갔다.

마법사들 측에서 대단위 마법의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 그것을 본 기사들은 즉시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는 성벽 위로 복귀했다.

마물에게 가장 효과적인 공격은 신성이었다.

하지만 가장 가성비가 좋고 효과적인 건 단연 ‘불’.

쏴아아아─.

성벽 위의 하늘로부터 불의 파도가 휘몰아치며 전장으로 쏟아져 내렸다.

성벽을 타고 흐르던 마물들이 일시에 휩쓸려 나가며 한 줌의 재조차 남기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아군에게 일절 피해를 주지 않는 절묘한 조절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네.”

“그러게요. 마물 정도는 얼마가 죽어도 신경 쓸 가치는 없다는 거겠죠.”

난간에 기대 전장을 바라보는 이진한의 옆으로 일레이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바로 직전까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전쟁 마법에 손을 보탰다.

《영원》을 독자적으로 변형해 발전시킨 「사계」는 기존 마법과 궤를 달리한다. 그 효용 덕분에 전쟁 마법의 화력을 1.3배 증폭하는 데 성공해 수많은 마법사의 놀람을 일으켰다.

같은 효율로 이미 완성된 마법의 출력을 건드리는 것은 초월지경에 오른 대마도사들도 감히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었지만, 일레이나는 별일이 아닌 듯 담담한 표정으로 그 옆에 있을 뿐이었다.

“다른 애들은?”

“이리아는 정령 기사단과 함께 싸우고 있고,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아하.”

그녀의 시선이 성벽 한쪽으로 향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오스칼 제국 출신의 이들을 규합해 새로운 세력을 일궈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궈냄을 당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리라.

오스칼 제국 출신의 기사단, 강자, 그리고 여러 조직까지.

제국의 비호 아래 있던 그들은 졸지에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본래라면 어디에 몸을 의탁한다고 할지라도 남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았을 터이지만, 현 사태의 원흉이 제국으로 꼽히는 와중인지라 섣불리 다른 곳에 발을 담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세력의 집합만 할지라도 어지간한 왕국보다 규모가 크다. 다른 열강 측은 그들을 위험 분자라 분류하고 구속 혹은 억류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진한은 그들이 엘레오노라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대하는 것을 보고는 의회를 움직여 일시적으로 보류한 상태였다.

“황실에 배신당해 그 꼴이 되었으면서도 그 핏줄에 집착하는 건가요.”

“제국의 상징성이니까. 그리고 마침 핑계도 좋잖아. 엘레오노라는 그들의 음모를 파헤치다 실각했으니까.”

“…뭐, 속사정은 어찌 되었든 억울함은 풀려서 다행이네요. 이전보다 얼굴도 나아진 것 같고.”

엘레오노라는 다시금 황녀로서의 위엄을 되찾았다.

손가락 하나로 수많은 이를 부리며 전장의 선두에서 지휘했고, 실추된 제국의 명예를 다시 되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베르너 님.”

“어, 대장군.”

전장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라즈베리 장군이 이곳으로 건너왔다.

장정 두 명은 합쳐 놓은 듯한 장대한 기골에 대머리인 험악한 인상이었지만, 그는 이진한 앞에서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왔다.

“이거 참, 베르너 님이 검은 현자님이라는 게 아직도 익숙지 않군요. 거기에 용사까지 하시다니.”

“겉치레는 됐어. 상황은 잘 보고 있다.”

“예. 아무래도 물량전을 통해 이쪽의 전력을 소모하려나 봅니다. 실질적인 전력은 꺼내 들지 않는군요.”

“그러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지?”

“준비는 꽤 오래전부터 한 덕분에 여유는 있지만, 당연히 장기전은 좋지 않습니다.”

하루 단위로 사용하는 물자만 천문학적인 단위다. 아무리 비축을 많이 해왔다고 할지라도 전쟁 준비 단계에서부터 여기까지 이어져 왔으니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보통 전쟁이란 시작과 끝의 대략적인 계획을 세우고 들어가는 법이지요. 물자를 비축해 상황을 가늠하고, 일정이 미뤄지거나 어긋날 때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기약이 없는 전쟁인데다가….”

“협상이나 협정 따위를 맺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지.”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승리 혹은 죽음. 마계는 패배의 치욕을 곱씹을 시간 따위를 줄 만큼 너그러운 상대가 아니었다.

“물자는 무한하지 않습니다. 곧 겨울이 닥쳐오고 그 뒤에는 봄이 오겠죠. 농경의 계절에 제때 밭을 일구지 못한다면 연 단위로 고생한다는 건 기초 전쟁학에도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대장군의 말을 요약하자면 무리를 해서라도 이쪽이 치고 나가야 한다?”

라즈베리 대장군은 자신이 총사령관을 맡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선제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수성의 이점을 버리고 전쟁을 펼칠 이유도 없을뿐더러,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은 왕국들의 결사반대로 무산되고 말았으니.

“예. 다들 기피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들 깨달을 겁니다. 이대로는 답이 없다는 것을요.”

“…맞아요. 가장 큰 화력을 내는 마법사도 결국엔 인간이니까요. 대단위의 위력을 내는 전쟁 마법은 일반 마법보다 몇 배는 더 큰 소모를 불러일으켜요.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시간이 갈수록 피폐해지겠죠.”

일레이나는 선제공격에는 동조하지 않았으나, 비슷한 견해를 지니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여왔다.

“그래. 결국엔 마르바스를 쓰러뜨려야 끝나는 싸움이겠지.”

이 전쟁의 행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나, 결국엔 그들과 결착을 보아야 하리라.

더군다나 그 이후 여신과 고대 신이라는 분기점의 또 다른 선택지까지 남아 있는 상황. 다시금 성벽의 난간을 잡은 이진한의 두 눈은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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