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앞서 말했다시피 제일 중요한 건 정신력이야. 지금 네 수준에서는 당연히 정령왕을 소환하는 건 무리겠지만, 이전처럼 템페스트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진한은 이리아에게 정령사로서의 팁을 가르쳐주는 중이었다.
사실 정령사에 특별한 이론이나 지식 같은 건 그리 필요하지 않다. 제일 중요한 것은 흔히 알려졌다시피 정령 친화력이었고, 두 번째가 무리한 반동을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이었다.
《창조》의 혈통을 이은 이리아는 정령 친화력 쪽은 말할 것이 없었다.
정령왕인 실피드 본인이 얼마 지나지 않으면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정령사가 될 것이라고 공인까지 하지 않았는가.
지금 필요한 건 그 시기를 조금 앞당겨주는 것으로, 온갖 버프와 아이템, 그리고 영약을 섭취하게 하여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루게 했다.
‘이리아는 이 정도면 됐고.’
이진한은 자신이 건네준 장비를 낑낑거리며 착용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일레이나는 어느덧 초월지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적 마도사 경지에 있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로 장족의 발전이 아닌가 싶다. 더군다나 《영원》의 마법을 개량해 자신만의 오리지널로 바꾸는 것으로 비슷한 경지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깊이를 손에 거머쥐었다.
실제로 초월지경이자 같은 계파를 이은 레이첼이 펼친 마법이 그녀의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던 걸 생각해본다면 일레이나가 대마도사가 되는 건 정말로 머지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성장 역시 훌륭한 기세였다.
특히나 원탁을 상대로 밀려나지 않은 채 맞서 싸운 것은 고평가할 일이었다.
‘문제는 나인데….’
진하율은 때가 된다면 본래 힘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말했다.
그렇다면 그 ‘때’라는 건 언제인가.
도대체 천 년 전의 자신은 무엇을 계획했기에 스스로 기억을 지운 채 깨어나게 한 것일까.
“휴.”
머리를 굴려도 결론이 나지 않는 의문들이었다.
이진한이 한숨을 내쉬며 어깨 위로 툭 머리를 올려놓은 까망베르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을 찰나, 유리아가 그를 맞이하러 왔다.
“베르너 님. 의회가 곧 있을 예정입니다. 성왕 폐하께서 부디 함께 자리해주시길 바라셨습니다.”
“안내 부탁하지.”
마경을 넘어 온 서대륙의 병력은 동대륙의 왕국들과 손을 잡고 오스칼 제국을 둘러싸는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했다.
물론 시간이 촉박했기에 30% 정도는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성과였다.
“내부 분위기는 어때?”
“…그리 좋지 않습니다. 저희가 제국 내부를 조사하는 동안 열강끼리 기 싸움이 팽팽하다고 들었습니다.”
“있을 법하네.”
쓴웃음을 지은 이진한은 곧 의회가 진행되는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에 맞추어 왔다고 생각했건만, 이미 가벼운 토론이 진행 중이었던 듯 내부의 분위기는 사뭇 날카로운 감이 있었다.
“흠.”
이진한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바라보며 배정된 좌석에 착석했다.
용사 베르너.
마경에서 드래곤 슬레이어의 업적을 달성함과 동시에 숱한 마족과 악마를 쓰러뜨리고 마왕과 대적까지 한 유일한 인물.
모두가 약속하기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호기심, 질투, 경원, 갖가지 감정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베르하임 국왕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운 얼굴로 아는 채를 해왔다.
이진한 역시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장을 맡은 리베라 제국의 1황자, 레이먼 폰 리베라를 바라보았다.
회의를 시작하라는 시선에 알겠다는 듯 헛기침을 내뱉은 레이먼은 좌중을 향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의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오스칼 제국을 둘러싼 포위망 구축의 진척도에 대해서입니다. 진척도 등과 관련해 보고해야 할 사항이 있으신 곳이 있다면 발언해주십시오.”
마계 세력이 점거한 오스칼 제국은 동대륙 최북단, 북부 지방에 있었다.
리베라 제국처럼 중심지에 있었다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겠지만, 다행히도 이쪽이 대비하기엔 지리적 요건이 좋았다.
문제라면 포위망 구축 쪽에서 여러모로 애를 먹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알리치 왕국 쪽의 일이 아직이오. 욕심을 조금만 버리면 진즉 진행되었을 것을.”
“욕심이라니. 우리는 정당한 권리를 주장했을 뿐이네.”
화제의 중심에 있던 건 알리치, 베이넌, 그리고 디글까지 세 왕국이었다.
알리치 왕국은 오스칼 제국이 마계 군세에 점령당한 틈을 타 바로 옆에 있던 소국인 디글 왕국의 영토를 침범해 그 대부분을 점령해버렸다.
마찬가지로 베이넌 왕국 역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선수를 빼앗겨 닭 쫓던 개의 신세가 된 상황.
마왕 마르바스가 대륙을 향해 선전포고까지 한 가운데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한탄스럽기 짝이 없군. 마계 군세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가운데 땅덩어리에 욕심을 내다니.”
“욕심이라니.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하세. 자네들 역시 군사를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는가.”
“부정하진 않겠지만, 마계가 대륙을 침공한 가운데 우군을 공격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네.”
알리치와 베이넌의 대표로 의회에 참석한 두 공작이 치열하게 서로를 물어뜯었다.
그 가운데 선 디글 왕국의 백작은 초췌해진 얼굴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본 왕국이 점령한 영토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어야만 의회에 협력할 수 있겠소. 마계와 싸우는 와중에 뒤통수를 맞는 건 사양이니.”
알리치 측 공작이 팔짱을 끼며 그리 말했다.
“….”
그 배짱 넘치는 모습에 레이먼 황자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서대륙의 패자인 리베라라 할지라도 동대륙에까지 개입하는 건 여러모로 무리가 뒤따랐다.
당장 거센 압박을 가해 저 기고만장한 콧대를 찍어누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툭.
서로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대화가 쳇바퀴를 구르듯 계속 같은 양상을 반복할 때, 누군가 회의장의 탁자 위를 두드렸다.
“내가 지금 이해가 안 가서 물어보는 건데.”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이진한이 회의가 시작되고 나서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었다.
“뭘 믿고 그리 기고만장하지?”
“…허?”
알리치 왕국의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귀족에게는 귀족의 대화와 예법이 있다.
다소 날카로워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절대 원색적인 비난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귀족이 아니던가.
‘용사라고 해도 결국 싸움꾼. 수준이 떨어지는군.’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용사라더니, 본 왕국을 핍박할 셈이오?”
“아니, 나는 이해가 안 가서. 전 대륙이 힘을 모아 막아내도 겨우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데 말이야. 의회 쪽은 이미 왕국들이 다 초토화된 상태에서 후속 계획도 짜놓았지?”
“…그렇습니다.”
이진한의 시선을 받은 레이먼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병력을 더 보내달라고 애원해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당당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
하지만 공작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리 왕국은 제국과 전쟁을 하는 데 지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에 있소. 우리가 무너진다면 마계 군세가 사방으로 뻗어 나갈 발판을 마련하는 꼴이 될 터인데 감당할 수 있겠소?”
“감당은 너희가 해야지. 의회의 이름으로 알리치 왕국의 욕심으로 마계 군세에 맞서 싸울 계획이 무너졌다고 발표할 건데.”
“…뭐라?”
“뭐라는 반말이고. 역사에도 길이길이 남도록 기록해주마. 주변 왕국들의 원망은 덤이겠지. 마계와의 전쟁이 끝나고 과연 왕국을 재건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
“….”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은 공작은 입을 닫았다.
‘마계의 군세라고 해봤자 이쪽의 숫자가 더 많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로 자신들이 무너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전선에 모인 군대만 하더라도 백만은 가볍게 넘어가는 규모다. 마계 군세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이것을 돌파할 수 있을까.
“다들, 세상 물정이 어둡군.”
공작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우군의 우세를 점치는 듯한 표정이었다.
짧게 혀를 찬 이진한이 눈짓하자 프레이가 마도구를 조작해 허공으로 영상을 틀었다.
오스칼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데르구비아.
지금은 이진한에 의해 정화되었지만, 마도구에는 그 이전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어어어.
도시 전반에 족히 수백만은 될 법한 마물이 바글바글했다.
도망치지 못한 시민이 대부분으로, 이성을 잃은 채 거리를 배회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할 분이었다.
“맙소사….”
“신이시여. 부디 저들에게 안식을.”
회의장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관련 보고는 많이 받았겠지만, 이런 적나라한 자료는 처음인 듯 모두 충격받은 얼굴이다. 더러는 미간을 감싸 쥔 채 자리에 주저앉아 심호흡했다.
“오스칼 제국 도시 대부분이 저렇다. 즉, 우리가 싸워야 하는 존재는 마계 군세뿐이 아니라는 것이겠지.”
오스칼 제국의 인구는 적게 잡아도 억 단위였다.
많은 이들이 피난했다고 할지라도 도망치지 못한 채 휘말린 이들 역시 적지 않을 터.
“저들과 같은 꼴이 되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다.”
이진한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자, 그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마르바스가 선포한 순간까지 채 몇 분이 남지 않은 상황 가운데, 제국이 있는 방향으로부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로 전날까지 전선은 드높은 사기로 뒤덮여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 가운데 직접 그 현장에 있다는 분위기에 취해 공포와 두려움을 잊었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다는 열망에 도취해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코앞으로 닥쳐온 죽음의 그림자를 보자 뜨거웠던 전의는 위태로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저 밑바닥에 처박혀 있던 부정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네요.”
성벽 위에서 전장을 살피고 있던 프레이가 표정을 굳혔다.
아직 본격적인 싸움이 채 일어나기도 전이다. 시간이 흐른다면 온몸에 피가 돌아 긴장이 풀리고 전장의 분위기에도 적응하겠지만, 초장부터 이렇다면 적지 않은 피해가 예상되었다.
“기도라도 해주는 건 어때.”
“기도라면 충분히 하고 왔어요. 이제 해줄 시간도 부족할 테니까요”
“흠.”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었다.
마왕을 위시한 마계의 군세, 저쪽은 마왕이란 뚜렷한 상징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선 연합군은 모두 다른 곳에서 온 중구난방의 출신들. 하나로 엮이기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쓸데 없이 나서긴 싫지만, 어쩔 수 없지.”
“잠깐, 뭘 하려고요?”
“이 사람들한테도 알려줘야지. 너는 혼자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스릉.
순백의 검신을 지닌 성검이 뽑혀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용사와 성왕이란 이름 때문에 쏠리던 시선의 농도가 짙어지며 수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어모았다.
“사기를 높이려면 이 정도 퍼포먼스는 해줘야겠지.”
파아앗─!
성벽 위로 눈 부신 빛의 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전장에 서린 불안과 두려움을 종식하는 밝음이었으며, 경직된 적막을 깨부수는 파동이었다.
“….”
전선의 거의 모든 이가 자신을 바라봐왔다.
내친김에 그럴듯한 연설이라도 해줄까 싶었지만, 이진한은 옅은 조소를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럴 틈도 주지 않겠다는 건가.”
전장의 앞.
널따랗게 펼쳐진 평야 위로, 어둠의 군세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