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후우웅─!
두 개의 거대한 그림자가 제국 위를 가로지르며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드래곤의 본체로 돌아간 크루시아와 나탈 리가 이진한 일행을 등에 태운 채 제국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와!”
크루시아 쪽 등에 탄 다른 이들은 생전 처음 맛보는 비행에 환호를 질렀다.
밑으로 보이는 풍경과 그리 어울리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또 한 번의 위기를 무사히 넘겨온 만큼 사뭇 가벼워진 분위기였다.
반면 홀로 나탈리의 등에 탄 이진한은 침묵한 채였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녀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마르바스는 순순히 자신들을 보내 주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고, 나탈리는 그동안 어디에 갔었던 것일까.
-….
나란히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던 크루시아가 둘 사이에 감도는 진지한 분위기를 파악하곤 눈치껏 거리를 벌렸다.
이제 그 위에 있는 것은 이진한, 그리고….
-삐이!
줄곧 로브의 후드 속에 숨어 있던 까망베르였다.
그 격한 싸움에서도 용케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듯 멀쩡한 모습으로 교태를 부려온다. 이진한이 귀엽다는 듯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나탈리가 슬쩍 시선을 보내왔다.
-테이밍한 몬스터인가요.
“「쿠르슈엘라」라고 알아? 태초의 와이번이라고 창공의 군주라고 불리던데.”
“창공의 군주? 그 존재를 만나셨습니까?”
“나르마치 왕국에 간 적이 있었는데 어떤 미친놈이 그 알을 탈취해서 숨겨놨더라. 거의 수십은 될 법한 와이번떼랑 함께 왔는데, 「쿠르슈엘라」만 해도 큰 성이랑 비견될 정도의 크기였지.”
크루시아나 나탈리의 본체보다도 몇 배는 더 큰 몸집을 지녔으니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어림짐작할 만했다.
-…정멸 별 인간이 다 있군요.
“알을 찾았는데 그대로 부화하더라고. 깨어난 직후 앞에 있던 게 나라서 인게이지 된 것 같아.”
-흔히 있는 현상이죠. 사실 드래곤 역시 비슷한 습성을 가지고 있어요. 물론 자신보다 못한 격을 지닌 이에게는 끌리지 않지만요.
“그런가.”
-그나저나 태초의 와이번이 알을 낳았다, 라.
“뭔가 아는 게 있어?”
-태초의 존재들이라는 건 이 세상이 창조될 때 함께 만들어진 각 종족의 기원이나 마찬가지예요. 와이번 뿐만 아니라 인간, 엘프, 그리고 수많은 몬스터, 그리고 저희 드래곤까지 전부 존재합니다. 다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죠.
“그럼 새끼를 낳는다는 건….”
-수명이 다했거나 무언가 문제가 생겨서 그 기원을 계승하려는 거겠죠.
“태초의 존재라고 해도 영원히 살 수 있는 건 아닌가.”
-네. 비약적으로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도 생명체인 이상 한계는 있죠. 기나긴 삶 끝에 수명이 다함을 깨닫고 그 와이번처럼 후계를 준비하는 거겠죠.
신적인 존재가 아닌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잠시간 까망베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이진한은 이동하던 중 못내 궁금하던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그래서, 그간 어디에 다녀왔지? 크루시아도 네가 연락이 안 된다고 질질 짜던데. 제국 내부까지 들어온 것도 다 너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하.
나탈리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잠시간 대답을 고민하는 듯싶더니 솔직히 대답하겠다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마계에 다녀왔어요.
“마, 뭐?”
-명색이 수호자를 관리하는 위치잖아요. 그래서 여신님의 말을 받들어 마왕들과 교섭을 하러 마계에 내려갔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이진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크루시아와 함께 한 예상으로는 제국 쪽을 탐색하러 나왔다가 저들에게 사로잡히거나 아니면 다른 좋지 않은 일이 생겨 당장 운신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마계를 갔었다니.
‘여신인가.’
자신들을 이 세계로 불러낸 원흉.
날이 갈수록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이름이다. 종래에는 그 존재와 마주할 수 있게 될까.
-….
나탈리는 무언가 더 할 이야기가 남은 듯 잠시간 말을 머뭇거렸다.
이진한이 인내심을 가지고 침묵한 채 기다리자, 서서히 그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사실 중간계를 향한 마계의 침공은 일정 주기마다 일어나는 구조에요. 세계의 고인 흐름을 솎아내고 새로운 변화를 주기 위해서죠.
“변화라.”
-이상하게 들리는 건 알고 있어요. 고작 그런 이유를 위해 수많은 이가 죽거나 다쳐야 한다는 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죠. 당장 저조차도 전부 이해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면 이번 침공도 여신이 의도한 거라고?”
-…아니요. 이번엔 예정이 없던 침공이었어요. 그래서 여신께서 저를 보내 마왕들에게 말을 전하셨죠.
이진한은 팔짱을 꼈다.
일방적으로 공격해오지 않은 마르바스의 태도를 생각해본다면 조금 희망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을 눈치챈 듯 나탈리는 어림없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왕들과 대면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은 모르쇠란 태도를 취했습니다. 자신들은 정해진 흐름에 따라간다며 말이죠. 전쟁은 저들이 선포했던 예정대로 진행될 거예요.
그 말 한 편에 이해할 수 없다는 감각이 서려 있다.
이진한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고대 신 쪽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흠.”
이진한은 침음성을 흘렸다.
나탈리에게도 속사정을 털어놓고 향후 방향성에 대해 상의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프레이 이상으로 여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심지어 드래곤이라는 위치상 대행자라는 역할을 맡고있는 것 같기에 섣불리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꺼내기는 부담스러웠다.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다른 드래곤들도 대부분 동면 중이고. 이때까지 이런 일은 없었는데.
천년을 살아온 드래곤에게도 사뭇 낯선 일인지 푸념 섞인 한숨을 내쉰다. 이진한 역시 그것에 공감하듯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은 끝을 향해 귀결되고 있었다.
선택을 내려야 할 때가 머지않았음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우스운 것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냐는 선택지 또한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어렵네.”
-그러게나 말이에요.
세찬 바람 소리에 서로 다른 감정이 서린 한숨이 부서져 나갔다.
***
오스칼 제국에 자리 잡은 마계의 군세가 진군을 선포한 날짜까지 이틀.
대륙 의회는 동대륙의 왕국들과의 상의 끝에 마경을 넘어와 제국을 빙 둘러싸는 경계선 구축에 합류했다.
설사 이곳이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마경 쪽에 세워둔 그랜드 라인이 남아 있다.
그곳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두고 앞으로 나와 동대륙의 왕국들과 함께 싸우는 편이 피해가 적으리라 예상되어 내린 판단이었다.
“….”
제국에서 귀환한 이진한 일행은 각자 전쟁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특히 원탁과의 싸움으로 적지 않은 깨달음을 얻어 그것을 흡수하는 데 집중했고, 그 가운데 가장 큰 성취를 보이는 것은 일레이나였다.
웅웅─.
그녀의 막사 안쪽은 「사계」로 구축된 영역 아래 있었다.
본래 방 한 칸 정도의 크기였던 물리적 한계에서 벗어나 널따란 초원이 되었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명상 중이었다.
초월지경.
얼마 전까지 마도사 중상급에 이르렀던 일레이나는 레이첼과의 싸움으로 인해 다음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다.
애초에 레이첼은 같은 이터널의 학파로 《영원》의 발자취를 걸어가는 선배와 같은 격이었다.
아니, 마족과 손을 잡고 타락한 시점에서 선배라고 부르기도 싫었지만, 그녀가 펼치는 마법에는 배울 점이 많았다.
‘《영원》의 마법만으로 따지자면 내가 훨씬 우위에 있었어. 그러니 그녀가 만든 영역을 잡아먹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
레이첼의 마법은 초월지경의 이해도로 《영원》의 마법을 이해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원초인 「삼라만상」도 아니면 자신처럼 열화판인 「사계」도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발현은 질적으로 많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레이나 역시 이진한을 만나 그에게 심득을 전수받지 못했다면 마찬가지인 신세일 터.
아니, 아직도 경지에 가로막혀 마도사 하위 경지에서 전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배울 점은 있어.’
마도사를 뛰어넘는 초월지경의 경지다.
자신처럼 「삼라만상」의 이해도도 없이 그 마법을 현실에서 재현해냈다는 것부터가 레이첼 역시 불세출의 천재라는 것을 의미했다.
츠즈즈즈─.
「사계」의 술식이 활성화되며 그녀의 앞에 떠 올랐다.
처음 이진한에게 도움을 받아 만들어졌을 때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로 진화했고, 유기적인 연결은 더욱 짜임새를 지녀 설사 초월지경의 대마도사라 할지라도 단번에 간파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이에 다다랐다.
“후우.”
짤막하게 숨을 토해낸 일레이나는 두 눈을 뜨며 명상을 끝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네.”
어느덧 이 반년 사이 몰라보게 성장해 초월지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경지가 되었다.
레이첼의 마법을 본 것으로 막연한 느낌을 얻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허울과도 같아 언제 도달할 수 있을지 요원한 일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러 가야지.”
하지만 무엇이 문제겠는가.
당장 자신의 옆에 고대 영웅 중 한 명이자 마찬가지로 초월지경에 도달한 검은 현자 본인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깨닫고 경지에 올라야 한다며 말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대충 팔에 매달려 조르면 못 이기는 척 방법을 알려줄 터.
“…아니면 나도 엘레오노라처럼 확 덮쳐버려?”
“뭘 버려요?”
“…!”
상념에 빠져 있던 일레이나가 흠칫 놀랐다.
자신의 영역에 드나들 수 있도록 패스를 심어준 덕분에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한 엘레오노라가 문가에 서서 의아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었다.
“어, 언제 왔어?”
“방금요. 집중하는 것 같아서 방해 안 하려고 했는데, 버릴 게 있으면 도와줄까요?”
“아니, 괜찮아.”
그녀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일레이나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초원 위로 티테이블이 세팅되었다.
「사계」의 숙련도가 낮을 때는 단지 그 형태를 흉내 낸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홍차나 디저트 같은 음식들의 구현도 가능해져 실제로 먹는 것과 진배없는 느낌을 받았다.
“미르엘은?”
일레이나는 그녀의 뒤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항상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백금색 머리카락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유리아랑 대련하고 있어요. 정말, 요즘에는 저보다 그녀를 더 많이 붙어 있는 것 같아요.”
“아하.”
소드 마스터와 팔라딘의 관계였다.
더군다나 유리아는 이단심문관인 도미니온으로 활동하며 적지 않은 전투 경험을 쌓지 않았는가.
서로 대련하며 실력을 기르기에는 안성맞춤인 상대일 터였다.
“이리아는 베르너 님께 템페스트를 다루는 방법을 전수받는다고 함께 갔고, 저만 덩그러니 남았네요.”
“수련은 잘 돼 가?”
“그럭저럭요. 일레이나나 미르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느릿느릿 따라가고 있어요.”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봐. 그 남자만큼은 아니지만, 어지간한 건 알려줄 수 있을 테니.”
일레이나는 여유로운 미소로 그리 말했다.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그녀다. 완전히 친해진 지금 동생들을 돌보는 것 같기에 한결 마음이 너그러워진 상태였다.
“…아.”
그러던 도중 무언가를 떠올린 일레이나가 살짝 몸을 움찔했다.
“왜요?”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얼마든지요. 도움받은 게 얼마인데.”
“그….”
일레이나는 살짝 머뭇거리면서도 꼭 물어봐야겠다는 태도로 그 말을 입에 담았다.
“남자를 잘 꼬시려면 어떻게 해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