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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97화 (197/210)

◈ 197.

“…이런.”

크루시아를 필두로 한 현자의 동료 일행과 싸우는 도중, 뒤쪽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에 칼슈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칼슈아 뿐만이 아니었다.

레이첼, 가니온 역시 모두 무언가를 깨달은 듯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 배를 넘지 말라고 했는데.”

“…그만큼 현자가 강하다는 거겠죠. 사실 어느 정도 예정된 미래였다는 거 다들 알잖아요?”

레이첼은 살짝 체념이 서린 목소리로 어깨를 으쓱였다.

각자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다리우스의 손을 잡고 그 밑으로 들어간 것이었지만, 지금의 신세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찬란했던 명성과 원탁의 자긍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고, 욕망에 사로잡혀 남은 인간성마저 제물로 바친 초라한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자조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되니.”

칼슈아는 가볍게 고개를 젓는 것으로 동료들의 미련을 잘라내었다.

이미 가문을 버리고 여기까지 왔다. 되돌아가기에는 한참이나 늦었기에 올라탄 흐름을 거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요. 부디 그가 현자의 이름을 꺾길 바라야죠.”

레이첼이 그곳을 바라볼 당시, 다리우스의 몸에서는 큰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직전까지는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인간이기조차 포기한 듯 전신이 농밀한 마기로 뒤덮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몸이 두 배는 될 듯한 크기로 부풀었고, 손과 발이 길쭉하게 자라나며 기다란 손톱을 자아냈다.

“…이건.”

마기의 증폭 수치가 비정상일 정도로 치솟아 올랐다.

마검 하나만 의지해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그것에 대항하려면 바포메트의 강림을 사용하거나 성검을 함께 꺼내 들어야 할 듯싶었다.

‘강림은 아직 후유증이 적지 않다.’

이전처럼 기진맥진해서 뻗어버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굳이 궁지에 몰린 상황도 아닌데 벌써 최후의 수를 꺼내들 이유가 없었다.

스릉.

방향을 정한 그는 악마화를 해제하고는 왼손으로 아스칼론을 뽑아 들었다.

곧 신성과 마기가 서로 균형을 이루며 팽배하게 맞선다. 요지는 그 반발력을 자신의 힘으로 이용하는 것.

이진한이 준비를 끝냈을 때 다리우스는 거의 짐승처럼 변한 상태로 이성을 잃은 채 이쪽을 향해 흉포한 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크허어엉!

고막을 찢을 듯한 포효가 천지에 울렸다.

동시에 이진한은 땅을 박차고 나가 아스칼론과 그라나다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있는 힘껏 휘둘렀다.

쿵─!

일순간 지반이 움푹 꺼져 내릴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 그 위를 강타했다.

다리우스는 두 팔을 교차해 무리 없이 그것을 막아내고, 시커먼 기류를 흩뿌리며 순식간에 모습을 지워냈다.

쐐애애액!

그 뒤로는 미친 듯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다만, 이전처럼 유려한 검술은 없고 본능에 충실한 투박한 공격만이 허공을 가득 채웠다.

“추하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남자였나.”

1초 남짓한 찰나에 펼쳐진 수십 번의 공격을 일말의 상처 없이 전부 막아낸 이진한은 입가를 이죽거리며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검성의 후계자라면서 평생을 익혀 온 검을 잊어버릴 정도로 마기에 심취하다니.

이성을 잃어버렸던 다리우스는 그 말을 듣고 일순간 정신을 차렸는지 제자리에서 포효하며 소리를 질렀다.

-네놈만 아니었으면!

스승인 검성에게 버림받을 일도 없었고, 이대로 그 측근으로서 대계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승승장구를 달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단 한 번의 패배는 모든 것을 앗아갔고, 다시 재기할 발판마저 치워버렸다.

사실 카이낙이 건네준 마룡의 힘이 담긴 씨앗을 먹게 되면 이리될 거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뾰족한 수가 없기에 제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것이었다.

“고작 그 정도로 버림받을 거라면 애초에 그것밖에 안 되었다는 거다. 네가 버린 소모품들처럼 말이지. 뭐, 후계자라고 해서 특별할 줄 알았어?”

이진한이 검성을 만난 건 딱 한 번, 그것도 아주 잠깐뿐이었지만, 검성이라는 인물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검성의 후계자라서 이름이 알려진 거지, 이 넓은 대륙에는 네 정도 수준의 검사는 흔하게 널려 있다.”

대접받는 삶을 살고 싶었더라면 검성이 마족과 손을 잡으려 할 때 말려야 하지 않았겠는가.

-닥쳐!!

다리우스의 손이 길게 휘둘러지자 그 꼬리를 물며 짙은 마기가 날카로운 궤적을 그려냈다.

이진한이 성검과 마검을 교차해 그것을 쳐내자 애꿎은 도시가 휘말리며 그나마 남아있던 잔해조차 건사하지 못하는 형국이 되었다.

쿠우웅.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는 가운데도 다리우스의 몸에서 샘솟는 마기의 증폭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어느 선에 다다라서는 성검과 마검으로도 힘에 부치게 되어 바포메트의 강림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이상해. 이 정도 시간을 끌었으면 제힘을 버티지 못한 채 터져버릴 때도 됐는데.’

인간은 저마다 받아들이는 힘의 총량이 있다.

당연히 경지가 높아지면 그 용량이 늘어났겠지만, 다리우스의 경지로 여기까지 도달한다는 것은 큰 무리가 있었다.

-크르르르.

이미 본능과 이성의 경계가 무너져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버린 그가 어떻게 그 방대한 마기를 제어하겠는가.

“….”

불현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등골을 스쳐 지나갔다.

원탁과 싸우던 뒤쪽 역시 도시에서 몰려드는 마물을 모두 쓰러뜨린 엘레오노라와 유리아가 합류한 것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이뤘다.

승부의 행방은 이곳으로서의 싸움으로 결정될 터.

콰직.

검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더는 공간이 버티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마기가 그 구역에 내려앉은 것이었다.

그 여파로 본인조차 움직이기 힘들어진 것인지 다리우스의 다리가 땅에 박힌 채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거기까지가 한계인가.”

이진한은 두 검의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

단숨에 그 목을 쳐내고 잔여 마기를 흡수할 요량이다. 마룡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그라나다가 각성하기에는 충분한 여건이 갖춰줄 터.

그렇게 앞쪽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디뎠을 찰나, 하늘에서부터 시커먼 무언가가 다리우스에게로 내리꽂혔다.

-지금! 지금 당장 목을 베어야 합니다!

묵묵히 성검의 보조를 도와주던 로네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쳐왔다.

이진한 역시 그것을 직감해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지만, 불쑥 솟아 나온 두 팔에 의해 궤적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

마기에 절여져 큰 몸집을 지닌 마수처럼 부풀려 있던 다리우스의 몸 위로 새빨간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파열음과 함께 그 마기의 외피가 조각조각 깨져나가더니, 낯선 존재가 안쪽에서부터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창백한 안색의 미남자다.

머리는 새하얀 백발이었고, 두 눈은 은은히 빛나는 청록색인 것이 마치 에메랄드를 심어놓은 듯했다.

일전 만티코어가 잠들어 있던 던전에서 보았던 몰락한 검의 구도자, 카라반과 비슷한 형태의 외모였다.

하지만 풍기는 기세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이 예사로운 존재가 아닌 듯싶었다.

-…아.

귓가로 로네의 짤막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이미 저 존재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해보였다.

남자는 깊게 숨을 들이쉬는 것으로 바깥 공기를 한껏 음미하고는 가늘게 뜬 두 눈과 함께 입을 열었다.

“천년도 넘었는가. 중간계의 공기를 직접 들이마시는 이 감각은.”

“….”

처음 들어본 목소리였지만, 왜인지 익숙했다.

다리우스가 아닌 건 명백한 상황 가운데 이진한은 심중으로 떠 오르는 가설을 정리했다.

‘마룡?’

마룡이 사냥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 일부를 나눠준 것으로 인간의 몸을 장악한 것이라면.

아스칼론을 든 손이 움찔거린다. 여차하면 용살검을 꺼내 들어 단번에 진명 개방을 펼칠 생각이었으나,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서린 그 기운에 자신이 착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르바스!”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낡아빠진 영웅이여.”

마왕 마르바스가 씩 웃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그 몸에서 터져 나온 마기는 오래전 미들턴과 근래 리베라 제국의 수도에서 맞붙었던 때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것이었다.

기긱, 기기긱─.

감당할 수 없는 힘의 여파에 공간이 일그러지며 신음을 토해냈다.

여기서 손이라도 휘둘렀다간 저것들과 함께 그대로 소멸해버릴 듯싶었지만, 이진한은 이를 악문 채 자신의 전력을 끌어올렸다.

파아앗!

악마화가 다시 개방되며 짙은 마기가 전신에 둘렸다.

바포메트 역시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것인지 이전보다 더 폭발적인 마기를 공급해주어 마르바스의 격에 대항할 수 있게 했다.

동시에 성검 위로 눈 부신 빛이 차올랐다.

작금 도시를 정화한 것으로 적지 않은 힘을 소모했지만, 천 년간 신성한 호수에 머물며 흡수한 신성이 적지 않게 남아있었다.

적어도 이 한 번의 싸움은 버텨낼 수 있을 터.

“좋다. 이 정도는 되어야지. 사실 이때까지 용사와의 싸움은 전부 싱겁게 끝났거든. 그놈의 인과율이 뭔지 말이야. 하지만 천년 전에 네놈들 덕분에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되어서 말이지.”

“…뭐?”

천년 전.

쉽사리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눈앞에 닥쳐온 마르바스의 힘을 버텨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웅웅웅─!

파멸의 마기가 다시금 그 손가락 끝에 모였다.

마르바스는 가볍게 몸을 풀어낼 심산으로 표출해낸 마기인 듯 부담이 없는 표정이었지만, 이진한으로서는 충돌 직전의 여파를 감당해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부서질 각오를 해야 했다.

“흡─!”

사력을 다해 기합을 토해낸 것과 함께 성검과 마검을 동시에 휘둘렀다.

그러자 미칠 듯한 반발력이 그 중앙에서 터져 나오며 쏘아진 파멸의 마기와 충돌했다.

기이이잉─!

기묘한 공명이 사방을 잠식했다.

눈 부신 빛과 쉴 새 없이 터지는 폭음이 내려앉는 가운데, 이진한은 자신의 몸이 원래 자리보다 한참은 멀리 밀려나 잔해 더미에 파묻혀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파삭.

팔다리 위에 얹혀진 잔해들을 밀어내고 다시 몸을 일으킨다. 기적적으로 상처를 입지 않았지만, 거친 야수처럼 일렁이던 마르바스의 기운이 어느덧 안정을 되찾았다.

이격 째.

과연 자신은 저것을 막아낼 수 있을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두 검을 들어올렸을 찰나, 하늘 위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지상에 드리웠다.

“…나탈리!”

그 익숙한 형태에 이진한은 상황도 잊은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탈리는 지상에 내려앉으며 인간으로 폴리모프했고, 다소 수척해진 모습으로 마르바스를 바라보았다.

“마왕이여.”

“…쯧. 알고 있다. 귀찮게 하기는.”

마르바스는 한쪽 눈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이진한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오늘 싸움은 여기까지 인듯하군. 네 떨거지들을 데리고 여기서 꺼지거라.”

“….”

알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이진한은 작게 어깨를 들썩였다.

“약속의 날까지 사흘이 남았다. 그때에는….”

마르바스는 그런 그를 청록색 눈동자로 꿰뚫듯 바라보며 입가를 비틀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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