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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96화 (196/210)

◈ 196.

쿵─!

전신을 백색의 갑주로 뒤덮은 미르엘이 묵직한 충격파와 함께 일레이나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진한이 만들어준 무구로, 결전 형태인 3단계를 한계까지 활성화한 상태였다.

츠즈즈즈─!

프로스트의 끝으로 얼어붙은 오러 블레이드가 찬란히 피어올랐다.

‘완숙에 이른 소드 마스터인가. 하지만 내 검을 막기엔 부족하다.’

순식간에 상대의 전력 분석을 마친 칼슈아는 단칼에 그녀들을 베어 넘길 작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마기에 찌든 리히테나워 가문의 절기가 검은 궤적과 함께 터져 나오며 그녀들을 한 번에 베어버리려는 듯 매서운 기세를 떨쳤다.

“….”

마치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는 것처럼 숨 막힐 듯한 존재감이었다.

휩쓸리게 된다면 전신이 부서지며 잔해조차 남게 되지 못할 터.

미르엘은 짧게 한숨을 토해내는 것을 끝으로 온 정신을 한 점에 집중한 채 자신이 체득한 최강의 기술을 준비했다.

분광십이검 오의 「천류만섬(天流萬閃)」

본래는 분광십이검을 모두 대성해야 사용할 수 있는 오의였다.

하지만 이진한이 가르쳐 준 심득 덕분에 그보다 한 발자국 먼저 천류만섬을 익힐 수 있었고, 그것이 지금 진가를 발휘했다.

파아아앗!

눈 부신 빛과 함께 새하얀 잔영이 소낙비처럼 거세게 쏟아져 내렸다.

하나하나가 분광이라는 이름답게 쪼개진 빛을 투영했으며, 각기 열두 번의 회전을 거치며 날카롭게 선회했다.

빛의 섬류가 쉴 새 없이 지상을 폭격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칼슈아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이건!”

그가 속한 리히테나워 가문의 기원은 고대 영웅 중 한 명인 《정의》의 한 유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칼슈아가 익힌 검술 역시 《정의》의 것을 표방했고, 레이첼처럼 그 발자취를 뒤쫓으며 계승자가 되고자 밤낮없이 검을 갈고닦았다.

그렇기에 칼슈아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정의》의 검인 것을.

계승자를 자처한 자신들의 검은 고작 그 일부를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 서로 간의 경지 차이는 아직 채울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일순간 검사에게 가장 중요한 부동심이 흔들린 칼슈아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큭.”

물론 그 경합 가운데 밀려난 건 미르엘 쪽이었다.

서로 간의 격차는 기술로도 메꿀 수 없는 것. 그렇기에 내상을 입어 피가 차올랐지만, 결전 형태의 갑주는 순식간에 그 상처를 치유하며 그녀를 완벽의 상태로 되돌려주었다.

“…괜찮아요?”

“과연 「무광」, 역대 리히테나워 가문의 검사 중 최강이라 불릴 만하군요. 그래도 이 정도면 버틸 만합니다.”

미르엘은 단 한 번의 격돌로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했다.

하지만 이진한이 만들어진 이 갑주가 그 차이를 조금이나마 메꿔주며 다시 검을 들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니 쓰러지기 전까지는 일레이나의 앞을 지킬 작정이었다.

쿠우웅─!

마정령이 하늘 위로부터 두 팔을 떨궜다.

그것만은 영웅의 힘을 계승한 일레이나와 미르엘 일지라도 막아낼 수 없는 종류의 공격.

저항할 수 있는 건 이진한과 크루시아 같은 특별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부류뿐.

그마저도 아니라면 같은 정령사밖에 없었다.

“「실피드」 바람의 정령왕이여. 계약의 대리인으로서 원합니다. 내 부름에 응답해주세요.”

하늘 위로 들어 올려진 템페스트에서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이리아는 휘청거리면서도 끊임없이 마나 포션을 마셨고, 종래에는 시뻘건 피를 토해냈다.

그녀는 며칠 전 호수에서 자신의 몸을 통해 동료인 《창조》를 만나셨다는 이후로 템페스트를 건네받았다.

바람의 가호가 깃든 그 검을 지닌 것만으로도 모든 능력이 월등히 향상되었지만, 진정한 힘은 바람의 정령왕인 「실피드」와 직접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딱 한 번, 베르너 님께서는 딱 한 번 내가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

그마저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부족한 마나는 비상용으로 챙겨 두었던 마나 포션으로 충당했고, 금방이라도 뇌가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은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견뎌내었다.

-고생했다. 《창조》의 후손이여.

다행히 헛된 수고가 아니었는지 귓가로 시원한 바람과 함께 웅혼한 깊이를 지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힘없는 목소리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읊었다.

“…부디, 도와주세요. 저희를.”

-그대의 뜻대로.

웅웅웅─!

세찬 바람이 그녀들 머리 위로 응집되었다.

기존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달리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바람은 두꺼운 벽을 만들어내더니 떨어져 내리던 마정령의 두 팔을 막아내었다.

-가련하구나. 이지를 잃고 타락해버린 마정령이여.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정령왕의 책임을 다해 네놈을 정화해주겠노라.

쉬아아악!

단순히 방어해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허공에서 응집된 실피드의 바람은 곧 마정령의 두 팔을 갈가리 찢으며 허공에 생겨난 균열에 다다랐고, 폭발적인 여파를 일으키며 그 안을 헤집어놓았다.

“…컥.”

하지만 이리아도 무사하지만은 않았다.

실피드가 그 부담을 대부분 자신 쪽을 받아들였다고 한들 술자인 그녀 역시 최소치는 충당해야 했다.

이미 정령왕을 소환함으로써 한계치를 뛰어넘은 이리아는 정말로 위험할 정도의 피를 토해냈고, 바닥에 고꾸라지며 거뭇거뭇해진 눈가로 바닥을 짚었다.

-…이런.

실피드는 두 눈을 찡그렸다.

이진한이었더라면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감당해내었겠지만, 아직 어린 자신의 계약자로서는 매우 벅찬 듯했다.

그렇기에 찢어진 균열을 노려보며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저 균열을 닫는 것으로 만족해야겠군.

츠즈즈즈─.

몰려든 바람이 차원의 균열을 고쳐갔다.

뒤쪽에 있던 가니온은 더욱 세찬 마기를 뿜어내 그것을 막았지만, 아무리 마룡의 힘을 흡수했다고 할지라도 정령왕의 의지를 거스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엘레오노라 님과 유리아 양은 마물 군세 쪽을 막아내느라 이곳에 합류하긴 힘들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든 우리끼리 버텨야 한다는 거네요.”

일레이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미소 지었다.

초월지경의 강자가 셋이다. 이리아의 활약으로 마정령을 마계 너머로 되돌려보냈다고 할지라도 저들의 전력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 명이라도 삐끗한다면 전부 일시에 쓸려나가게 될 터.

그중 가장 실력자인 일레이나의 책임감이 막중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잘 버텨주었다.”

파아앗─!

레이첼의 마법에 속박된 상태에서 칼슈아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당했던 크루시아가 그로기 상태에서 회복했다.

폴리모프를 해제하자 사지가 잘린 인간의 육신으로부터 다시금 본래의 거대한 육체를 되찾았고, 레드 드래곤의 위용을 떨치며 자신 앞에 선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각오하거라. 드래곤을 능멸한 값을 톡톡히 받아낼 것이니.

한편 그 무렵.

“….”

이진한은 머리부터 땅속에 처박혀 있었다.

원인은 일레이나 쪽이 걱정되어 아주 잠깐 신경이 흐트러진 것 때문이었다.

마룡의 힘으로 강해진 다리우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고 빛살 같이 달려들어 그의 안면을 쥐어 잡은 채 바닥에 내리꽂았다.

“아직도 네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허.”

이진한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토해냈다.

꼼수를 써서 잠깐 강해졌다고 해서 정말로 자신이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마룡의 힘을 빌렸다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저런 수단으로 강해지는 것은 부작용이 없을 리가 없다.

정석적인 공략법은 저들이 알아서 자멸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눈앞에 즐비했던 시체들과 그 참혹한 풍경에 눈에 아른거리기에 기꺼이 그 도발에 응해주기로 했다.

웅웅─.

아스칼론이 역소환되고 그 손에 그라나다가 쥐어졌다.

다리우스 역시 성검 보다는 마검 쪽을 경계하고 있었는지 땅을 박차고 훌쩍 물러나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좋아, 해보자고.”

마룡의 것보다 더 정순하고 밀도가 높은 심연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피어올라 주위에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악마화를 이룬 이진한은 거칠게 그라나다를 들어 올리며 샛노란 동공으로 다리우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쾅!

눈 깜짝할 사이의 움직임이었다.

얼마간 거리를 벌리고 떨어져 있던 둘은 그 중간에서 경합을 벌였고, 맞댄 검 사이로 시선을 마주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반응할 수 있는지 볼까.”

“누가 할 소릴.”

다리우스의 속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 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시종일관 압도적인 무위를 떨치며 거의 폭격에 가까운 공격을 가했다.

“으하하하!”

스승인 검성을 제외하고 이 땅 위에서 그 누가 자신을 상대할 수 있을까.

검을 휘둘러도 휘둘러도 끊임없이 샘솟는 마기에 그는 큰 웃음을 터트렸다.

“야만적이군. 도원경에서 그리 볼품없이 제힘에 취해 날뛰었다간 10초도 버티지 못한 채 목이 잘려 나갔을 거다.”

“허세는 그만 부리…컥!”

상대의 공격을 모두 쳐낸 이진한은 마기가 응집된 시커먼 팔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다리우스는 곧바로 흑색 궤적을 떨치며 그 팔째로 이진한의 몸을 베어 가르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휘둘러진 검은 단단한 것에 가로막힌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일단 한 대.”

“…!”

그대로 그 큰 몸을 들어 올린 이진한은 자비 없이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 충격으로 지반이 움푹 가라앉으며 부서진 토사의 균열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찰나 전신에 엄습하는 막대한 충격에 의식을 잃었던 다리우스는 재차 떨어져 내리는 그의 주먹에 헛바람을 토해냈다.

‘…어떻게든 피해야!’

콰앙─!

운석이 떨어지는 듯한 무거운 일격이 다시금 그 위로 부닥쳤다.

이전보다 한층 더 깊어진 크레이터 가운데 이진한은 몇 번이고 주먹을 내질렀고, 다리우스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을 때가 돼서야 이마의 땀을 닦으며 허리를 들었다.

“귀찮게 하고 있어.”

“….”

마기로 몸뚱이가 강화되어 겨우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얼굴의 윤곽은 완전히 뭉개진 상태였다.

잠시간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손끝을 까딱였다.

“아직 안 죽은 거 아니까 빨리 일어서라. 그대로 뒤지고 싶지 않으면.”

이왕 이렇게 된 것 곱게 죽일 생각은 없었다.

들어야 할 이야기도 많았으며, 검성이 무슨 의중을 지녔는지도 궁금했다.

파지직.

땅에 처박힌 다리우스의 몸 주위로 한 줄기 검은 스파크가 튀었다.

이진한은 그것을 경계했지만, 순간적으로 허공에 응집된 마기가 총알처럼 쏘아지며 그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쿵─!

마검을 세워 그것을 막아낸 이진한의 몸이 몇 발자국 밀려났다.

손아귀에서 오는 묵직한 충격에 두 눈을 가늘게 뜬 그의 시야에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다리우스가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

두 눈이 텅 비어 있다.

마치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그저 서 있기만 한 것 같았지만, 그 가슴에서부터 시작된 이질적인 파동이 전신을 향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툭.

안정을 위해 설정해놓았던 리미트가 깨어져 나갔다.

다리우스의 두 눈은 순식간에 범접할 수 없는 마기에 물들었고, 이내 천천히 고개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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