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에 온 건 다리우스뿐이 아니었다.
곧 그의 뒤를 따라 에우리스테우스의 이탈과 조니악의 죽음으로 이제 셋밖에 남지 않게 된 원탁이 닥쳐와 크루시아를 덮쳤다.
“수고를 덜었네. 그렇지 않아도 기회가 온다면 치워버리려 했는데.”
“자신감이 넘치시는군.”
“자신감이 넘치는 건 누군지 모르겠군. 또 위기에 처하면 스승이 나타나 구해주겠지?”
이진한은 조소를 지었다.
성검의 힘을 끌어다가 도시를 정화했다고 해도 그리 소모가 크지 않았다. 물론 검성을 상대로 싸운다면 부담이 되겠지만, 전처럼 허무히 밀려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날카로운 투지를 불태웠다.
“스승님께서는 오지 않으신다. 애초에 네놈에게 신경 쓸 필요조차 없으니 말이야.”
“무심한 스승이로군. 제자가 사지로 들어가고 있는데도 관심이 없다니.”
“과연 그럴까.”
캉!
검을 거칠게 쳐낸 것으로 훌쩍 물러난 다리우스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원탁 역시 마찬가지로 거리를 벌렸고, 그와 같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더니 어찌할 새도 없이 입안에 털어 넣었다.
“…!”
검성도, 다른 마왕도 나오지 않는다면 저들이 무엇을 믿고 자신 앞에 나왔을까.
틀림없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일 터. 그렇기에 크루시아에게 눈짓하며 땅을 박차고 앞으로 쇄도해나갔다.
콰아아앙─!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다리우스의 몸 위로 시커먼 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어찌나 강력한 기세인지 달려나가던 이진한의 몸이 그 격류에 휘말려 뒤로 밀려났을 정도. 다리우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원탁의 일원 역시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강대한 마기를 뿜어냈다.
“…이건!”
두 팔을 교차해 그 여파를 막아내던 크루시아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진한이 시선으로 무엇이냐 묻자,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오래전 타락한 마룡의 기운입니다. 마계로 넘어갔다고 들었는데, 설마….”
“마룡과 계약했을 리는 없고, 그 심장이라도 빼서 먹었나 본데.”
앞으로 내민 아스칼론이 신성을 뿜어내며 몰아치는 마기에 저항한다. 하지만 어찌나 그 여파가 거센지 성검조차 덜덜거리며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쯧.”
이진한은 아스칼론을 다잡았다.
강함이나 경지의 우위의 체계는 복잡하다. 단순히 힘의 출력이 증가한다고 해서 서로의 격차가 좁혀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 정도로 규격을 벗어날 정도로 거대한 힘이라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졌다.
“….”
일순간 크루시아와 시선을 맞추는 것으로 생각을 나눴다.
싸움의 구도는 다리우스가 이쪽을, 그 이외의 인원이 크루시아를 노리고 있었다.
느껴지는 힘의 크기는 저들 중 다리우스가 제일 크다. 그러니 자신이 맡아 빠르게 처치하고 크루시아 쪽에 합세한다면 균형을 이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을 터.
쿵.
상의를 마친 이진한과 크루시아가 거의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각기 앞에 있는 적을 향해 여력을 아끼지 않은 채 쇄도했고, 이진한 역시 단숨에 목을 쳐낼 작정으로 아스칼론을 휘둘렀다.
턱.
“…!”
하지만 찬란한 빛을 뿜으며 허공을 베어 가르던 성검은 가볍게 뻗어진 손아귀에 붙잡히고 말았다.
신성과 마기가 충돌하며 거센 스파크를 튀어 올린다. 그럼에도 다리우스는 성검을 놓지 않았고, 마기에 물들어 거뭇거뭇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것인가. 이게 바로 스승님이 보고 계신 풍경인가.”
그는 카이낙의 말대로 딱 세 배의 마기를 얻은 후 증폭을 멈췄다.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더 많은 힘을 뽑아낼 수 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눈앞의 영웅 따위는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전능감이 전신에 차오르지 않는가.
굳이 제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기에 옅은 미소와 함께 황홀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알량한 힘으로 스승님께 대적하려 했느냐. 네놈은 나조차도 넘어서지 못할 것이야.”
“…도핑으로 강해진 놈이 큰소리치긴.”
콰지직─!
둘은 제자리에 선 채 한치의 물러남 없는 힘의 경합을 겨뤘다.
폭발적으로 뿜어진 신성과 마기의 기운이 주위 대지를 찢으며 무너뜨렸고, 공간의 왜곡조차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뒤, 크루시아는 자신에게 닥쳐온 세 인영과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쉬시시식!
칼슈아가 휘두른 검격이 검은 궤적을 뽐내며 쉴 새 없이 그를 압박한다. 뒤쪽에선 가니온이 소환한 마정령이 거침없이 손을 뻗어왔고, 사방은 레이첼이 만들어낸 마법으로 둘러싸인 상태였다.
‘원탁.’
대륙에서 최강을 자처하는 인간들의 모임 정도야 이미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더욱이 나탈리가 그 일원으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렇다 한들.”
파지직─.
시뻘건 전격이 주위를 휩쓴다. 족히 몇천 년 전에 존재했던 고대 마법으로,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현상을 찢어발기며 적들에게 내달렸다.
“인간은 아니군.”
“엘프 같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하나밖에 없네. 설마 드래곤과 맞서 싸우게 될 줄이야.”
칼슈아와 가니온이 내뱉은 말에 레이첼은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카이낙이 건네준 씨앗을 먹은 것으로 미증유의 힘을 손에 얻었다. 이 정도라면 그간 경지가 부족해 사용하지 못했던 《영원》의 마법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을 터.
“칼슈아. 전위를 부탁해요.”
“맡겨주십시오.”
쿠웅─!
닫혀 있던 칼슈아의 두 눈이 열리며 샛노란 안광을 뿜어냈다.
동시에 이전보다는 몇 배 더 빠른 속도로 땅을 박차고 달려나가며 정말 빛에 가까운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크루시아는 몸에 붉은 뇌전을 감은 채 거의 모든 공격을 쳐냈다.
하지만 간간이 닥쳐 들어온 마정령의 손길에는 붉은 뇌전조차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에 일순간 공백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던 차.
곳곳에 자상이 생겨나며 점차 그 의복이 피에 물들기 시작했다.
쿠웅.
하늘 위로 복잡한 수식이 새겨진 보랏빛 마법진이 떠오른다. 그 가운데 서 있던 레이첼은 가늘어진 눈으로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크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딱 한 번, 기회를 줄게요.”
“…뭐?”
“인간으로 폴리모프 한 드래곤의 목을 자르면 죽지 않는 대신 마법이 풀린다죠? 지금 당신의 목을 베는 건 쉽지만, 그래서야 《영원》의 이름을 계승했단 체면을 살지 않거든요. 그러니 시간을 드릴 때 폴리모프를 해제하세요.”
“이 미천한 것들이 주제를 모르고….”
천지간에 수십 줄기의 벼락이 내리쳤다.
크루시아는 그들을 갈가리 찢어내려 했지만, 마룡의 힘을 온전히 받아들여 다리우스와 마찬가지로 3배 증폭해낸 원탁은 이전처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쉽네. 드래곤으로서 온전히 쓰러뜨리고 싶었는데.”
짝!
레이첼이 손뼉을 치자 그것을 기점으로 주위를 뒤덮고 있던 마법들이 일시에 활성화되었다.
레이첼은 일평생을 《영원》에 바쳤다.
마도의 길에 서서 그 발자취를 따라갔고, 그 마법을 재현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거듭했다.
물론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세상에는 그녀의 원석 같은 재능을 보고 탐내거나 시기, 혹은 질투하는 우매한 자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모든 역경을 디디고 올라 마침내 마도의 정점이라는 대마도사에 이를 수 있었으니.
‘그래도 그것으로는 부족했지.’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전신에 가득 차오른 마룡의 힘이 이제껏 없었던 충만함을 채워주며 새로운 경지를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웅웅웅─.
마나가 필요한 술식은 마기로 대체되었다.
마기 역시 마나의 성질이 가변해 재구축된 종류 중 하나. 마법의 구성을 이루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삼라만상은 구현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해.”
도화지에 물감이 퍼지듯 새카만 운무가 허공을 뒤덮어간다. 인상을 찌푸린 크루시아가 땅을 박차며 그 범위 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사로잡힌 뒤였다.
쿵.
그 뒤로 가니온의 마정령이 굵직한 두 팔을 짓눌러왔다.
크루시아는 몸에 붉은 뇌전을 두른 채 그것을 밀어내고는 자신 앞에 닥쳐온 칼슈아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마정령과 더불어 온몸을 옭아매는 검은 운무에 의해 움직임이 정지되어 무방비한 상태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서걱─!
한 번의 피륙음 직후 크루시아의 사지가 동시에 잘려나갔다.
몸뚱이만 남은 그는 운무에 의해 허공에 고정되며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에게 닥쳐온 적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빌어먹을…!”
자존심이 상했지만, 폴리모프를 해제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크루시아는 막대한 마력을 떨치며 자신의 본체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 직후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놀란 표정이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내 영역 아래에서는 설사 드래곤일지라도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무슨…!”
“마법으로서는 그 종주인 드래곤조차 뛰어 넘었다던 《영원》의 마법이다. 한낱 성룡 따위가 범접할 수 있을까.”
레이첼은 조소를 흘리며 다시금 수결을 맺었다.
주위를 뒤덮은 시커먼 운무가 움직이며 족히 수천 개는 될 법한 가시를 만들어낸다. 그 앞으로는 칼슈아가 다시금 번뜩이는 검광을 뿜어내고 있었고, 마정령은 여전히 그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짓누르는 중이었다.
‘위험하다.’
폴리모프 상태로 죽게 된다면 본체라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게 된다. 하지만 그 뒤로도 폴리모프 상태가 풀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치명적인 결과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
크루시아가 필사적으로 제 몸을 옭아맨 마법을 해석하려 했지만, 레이첼의 말대로 《영원》의 마법을 단시간에 파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탈리…!’
죽음을 직감한 채 두 눈을 질끈 감자 먹먹해진 시야로 아직 찾지 못한 그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뭐야, 이 어설픈 개변은.”
그 뒤편에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내뱉어진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거의 동시에 있던 일이었다.
“…!”
질끈 감겨 있던 크루시아의 두 눈이 뜨였다.
그 직후 시커멓게 물들어 있던 운무가 조각조각 깨어져 나가며 잿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레이첼은 경악했다.
드래곤조차 파훼하지 못한 자신의 마법이 어째서 통제를 벗어나는가.
곧 그 너머에서 보랏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새로이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이 있었다.
“「발푸르기스의 마녀」 레이첼 프리하리슈인가. 스승님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같은 이터널 학파의 출신으로 저보다 앞서 《영원》의 연구에 대한 선구자였다는 걸.”
“그 보랏빛, 「애머시스트」 일레이나 유클리드인가.”
“제 이름을 알고 있다니, 영광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꼴을 보아하니 그런 마음도 들지 않네요.”
일레이나는 마기로 물든 레이첼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면 더 노력하는 걸로 한계를 깨부수면 될 것을 마족과 손을 잡다니. 《영원》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자가 부끄럽지도 않아요?”
“우리 꼬마 아가씨께서는 뭘 모르네. 더 높은 경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갈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마도의 길이지. 그리고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적법한 계승자다. 이터널의 그 고리타분한 놈들과는 달리.”
“글쎄요. 지금은 할머니께서 아시던 시대와는 조금 달라졌거든요. 고대 영웅이 깨어나고, 진짜 적법한 영웅의 후손들이 그 곁을 따라다니며 파티를 이뤘죠. 천 년 전과 같이.”
“…네가 진짜 《영원》의 계승자라고?”
“보다시피.”
「사계」의 마법이 활성화되었다.
「삼라만상」이나 「사계」 같은 매개체 없이 《영원》의 술식을 어설프게 흉내 낸 개변 따위는 순식간에 잡아먹히며 레이첼이 장악했던 영역을 순식간에 잿빛으로 물들여가기 시작했다.
“칼슈아!”
“…말하지 않아도!”
위기감을 느낀 레이첼이 그 이름을 부르자, 칼슈아 역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듯 폭발적인 속도로 땅을 박차고 나갔다.
일레이나가 아무리 재빠르게 현상개변을 펼친다고 할지라도 초월지경의 검사가 뻗는 일 검보다는 빠를 수 없다.
그녀 역시 그것을 모를리 없을 테지만, 사뭇 여유로운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르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