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회의를 끝낸 이진한은 곧바로 크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그 역시 회의 내용을 듣고 있었는지 이진한이 입을 열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떠나셔도 상관 없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뭐?”
“객관적으로 생각하자면 저들의 말에 틀린 것이 없습니다. 제국을 조사하는 것으로 정보를 많이 얻었으니 이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야 함이 옳습니다.”
“저쪽에는 강한 녀석들이 많다. 설령 네가 드래곤일지라도 감당하기에는 힘들 테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 한 몸 숨기고 도망치는 것쯤은 어렵지 않겠죠.”
크루시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중간계의 수호자이자, 절대적인 포식자였던 드래곤의 위치가 참으로 초라하게 되었다.
“나탈리는 말괄량이였어도 제 동생과 같은 아이입니다. 갑작스럽게 관리자가 되었을 때 분에 넘치는 직책을 맡게 되어 걱정했었죠. 아마 그 책임감 때문에 제국의 동향을 살피려 이쪽에 오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허공을 훑었다.
제국 내부로 들어갈수록 나탈리의 자취가 짙게 남아 있었다.
그 끝이 어디로 이어진 것인지는 명백한 일.
크루시아는 그녀를 찾기 전까지 절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마왕이 말한 전쟁까지는 이제 열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충분하니 일행과 함께 돌아가십시오.”
“….”
이진한은 입을 닫았다.
냉정히 생각해보자면 그의 말이 백번 맞았다.
이곳으로부터 제국의 국경까지 대략 닷새 정도 거리다. 이제는 정말 아슬아슬할 시기였고, 아까 회의 때 핸더슨이 말한 대로 분기점에 다다랐다.
‘그렇다면.’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던 이진한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그러면.”
크루시아가 가볍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작별을 고할 찰나, 이진한은 그의 어깨를 누르며 재차 말을 이었다.
“척후대는 돌려보내지. 대신 나는 동행할 거다.”
“…괜찮겠습니까?”
“나탈리한테는 여러 도움을 받았으니 말이야. 이런 식으로라도 갚아줘야지.”
“하하.”
크루시아로서는 더없이 반가운 이야기였다.
“날이 밝으면 척후대에 이야기를 전하지. 그때까지는 너도 조금 쉬고 있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그를 떠나갔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동이 터올 찰나에 척후대의 요인들은 다시 한 자리에 모여 희의를 시작했다.
“여기서 후퇴한다. 더 나아갔다간 헨더슨의 말 대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면 곧바로 준비….”
“대신 나는 남는다. 찾아야 할 것이 있거든.”
“…홀로 남으시겠다 이 말씀이십니까?”
“아니, 일행과 함께.”
헨더슨의 물음에 이진한은 고개를 들어 이미 채비를 끝낸 크루시아와 자신의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전날 밤 이미 그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했고, 당연히 따라가겠다는 의사를 되돌려받았다.
예전이었더라면 말렸겠지만, 마도사 두 명, 소드 마스터 한 명, 팔라딘, 그리고 상급 정령사까지.
모험가 파티로 치면 최상급이지 않은가.
적어도 이제는 발목 잡힐 일이 없기에 쓴웃음을 지으며 동행을 허락했다.
“흐음.”
호베르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직접 듣지 못했지만, 크루시아가 풍기는 묘한 분위기를 보아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일 것이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원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이진한이 직접 척후대에 포함할 리가 있겠는가.
‘그들과 관련된 일인가.’
헨더슨과 짤막하게 시선을 맞춘 호베르투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무사히 목적을 완수하시길.”
“그래. 너희도 최대한 충돌을 피한 채 빨리 빠져나가고.”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국경 쪽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신호탄을 쏘시면 바로 달려가지요.”
“그래. 시일이 지나면 곧바로 후퇴하고.”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제시간 내에 제국을 빠져나가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괜히 무리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기다릴 녀석들이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척후대와의 이별을 고했다.
이윽고 그들과 서로 갈라져 방향을 틀었고, 그렇게 몇 시간을 더 나아간 끝에 지척에 두고 있던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데르구비아는 오스칼 제국의 수도 다음으로 큰 대도시였다.
추정 인구만 해도 거의 천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그 자체만 해도 소규모 왕국 몇 개를 합친 크기를 자랑했다.
여기까지 마주친 피난민들의 흐름으로 보아 이 도시에도 아직 적지 않은 생존자가 남아 있으리라.
이진한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도시에 발을 들여놓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아니, 이진한뿐이 아니었다.
그 뒤를 따라 시선을 옮긴 다른 일행 역시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 서서히 입을 벌렸다.
도시는 전반적으로 반파된 모습이었다.
아직 불길이 잡히지 않은 곳도 있었고, 이미 새카맣게 타버려 재밖에 남지 않은 곳, 그리고 거대한 무언가에 짓밟힌 듯 아주 조금의 잔해만이 남아 있는 곳도 있었다.
거리 곳곳엔 썩은 시체가 즐비하다. 그 가운데로 구울과 스켈레톤을 비롯한 마물이 지성을 잃은 채 돌아다녔고, 그나마 멀쩡한 민가의 안쪽에는 마물화가 진행돼가는 인간들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끄아아악!
-사, 살려줘! 제발!
하급 마족들이 도시를 돌아다니며 숨어 있는 인간들을 사냥한다. 먹이로 먹기 위함이 아닌 자신들의 희열과 가학심을 채우기 위한 유희에 불과한 일이었다.
덜덜─.
유리아는 큰 충격을 받았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손을 덜덜 떨며 목에 건 로자리오를 붙잡았다.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인지 뻐끔거리는 입으로 쉴새 없이 기도문을 외우며 자신이 목격한 현실에서 도피하려 애썼다.
“….”
엘레오노라 역시 꽉진 손을 소매 밑으로 내렸다.
어찌나 강하게 주먹을 쥐었던지 살을 파고든 손톱 사이로 시뻘건 피가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미르엘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더 상처가 생기는 것을 막아줄 뿐이었다.
이리아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입을 막았고, 일레이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훑어보다가 이진한에게 물었다.
“…당신. 아직 마물화가 전부 진행되지 않은 사람들을 되돌릴 수 있나요? 성검으로 정화해서 말이에요.”
“불가. 그건 어떤 수를 써도 불가능하다.”
대답은 크루시아 쪽에서 나왔다.
그 역시 짤막한 탄식을 뱉어낸 후였다.
천년을 살아온 장수 종인 크루시아에게도 이런 참혹한 광경은 사뭇 충격적인 것이었다.
차라리 인간끼리 전쟁하는 것이 더 나을 지경이었다.
“이 도시 자체가 저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사육 우리다. 차라리 다 소멸시켜버리는 게 낫겠군.”
“…그래. 편하게 해주는 것이 도리겠군.”
이진한은 혹시 몰라 로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크루시아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바포메트의 힘을 빌리거나 초월 마법으로 폭격을 가한다면 조금 더 효율적으로 이 도시를 없앨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마기에 물들어 타락해버린 영혼들은 구원을 받지 못해 저 마계 깊숙한 곳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
이진한은 문득 자신이 용사 클래스를 각성한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손을 뻗어 아스칼론을 뽑아냈다.
스릉.
성검은 제 주인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은은한 빛을 흩뿌리며 성스러움을 자아냈다.
불온한 분위기가 걷혀 나가며 그 주위를 성역으로 만들어 온갖 부정적인 기운을 종식했다.
이진한은 아스칼론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으로, 마치 한 선지자가 뱀의 저주를 쫓듯 찬란한 빛을 피워냈다.
용사 클래스 초월 스킬 「신성의 증명」
빛의 파도가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무너진 성벽, 부서진 건물, 마기와 피로 응어리진 땅을 넘어 수많은 원념과 저주가 섞인 그것들을 모조리 정화하며 종래엔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스스스스─.
구울, 스켈레톤, 뱀파이어 등 격이 낮은 마물은 순식간에 소멸한다. 마물화가 진행되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미 죽을 운명이었지만, 마기에 의해 생명이 지속되고 있던 상황.
다행인 점이라면 잠이 드는 것처럼 일말의 고통 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었다.
-키에엑!
-크륵.
그들을 제외하고 가장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하급 마족들이 온몸을 태우는 신성의 기운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성벽 위에서 찬란히 빛나는 성검을 들고 있는 이진한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도시 곳곳에 존재했던 수백, 수천의 마족들이 땅을 박차며 그에게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탁.
그 앞으로 엘레오노라가 내려섰다.
눈물 자국이 서린 그녀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사나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닥쳐온 태풍이 바람의 벽을 만들었고, 수십 개의 보이지 않는 칼날이 솟구쳐 닥쳐오던 마족들의 몸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웬 놈들이냐.
바람의 벽을 넘어 그들 앞으로 닥쳐온 것은 상급 마족에 드는 존재들뿐이었다.
박쥐의 것을 닮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근육질 몸을 지닌 발록이 새빨간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엘레오노라 옆으로 따라나선 일레이나는 마찬가지로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수결을 맺었다.
“네놈들 따위와 섞을 말 따위는 없어.”
「사계」로 증폭된 불의 고리가 삽시간에 발록들을 에워싼다. 시뻘건 불꽃은 이내 온도를 점점 높이며 몸집을 부풀려가더니 이내 지옥의 불꽃이 되어 발록들의 마기를 잡아먹고,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다니던 녀석들을 모조리 지상 위로 떨어뜨렸다.
쐐애애액!
그 가운데 미르엘과 이리아, 그리고 유리아가 빛살처럼 달려나갔다.
각기 오러와 신성력, 그리고 바람의 가호가 깃든 검을 휘두르며 추락한 발록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일해의 성장세가 예사롭지 않군요.”
“당연하지 누가 가르쳤는데.”
살짝 놀란 크루시아가 감탄을 토해내자 이진한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애쓴 것도 있지만, 저들의 의지와 노력이 컸다.
그저 이쪽이 주는 것에서만 만족하며 안주했다면 그것으로 그치고 말았을 터.
하지만 각자 피나는 수련을 멈추지 않았고, 종래에는 성국에 있다는 위험한 시련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해 제힘을 길렀다.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척척 제 몫을 해내는 모습을 보자니, 그간의 감회가 색달라지는 느낌이었다.
“…!”
잠시간 그녀들의 활약을 감상하고 있던 이진한은 돌연 저 멀리서부터 무언가가 빠르게 자신들을 향해 닥쳐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눈부신 속도로 아스칼론을 휘둘렀을 때, 크루시아 역시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집어던지며 팔을 휘둘렀다.
쿵!
성벽 위로 큰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마족의 군세를 상대하고 있던 그녀들이 일순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을 정도의 여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균열이 가 있던 성벽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라 그 주위를 뒤덮었다.
그 가운데서 이진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공격해온 적을 바라보았다.
“…다리우스.”
“오랜만이군, 검은 현자여.”
다리우스.
검성의 후계자인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찍어 눌러왔다.